〈 39화 〉 #39. 목토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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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목토시(2)
[15년_01월_02일_금요일]
[17:10]
얼어붙은 마음이 소중한 사람의 온기로 녹아내리기 시작할 때.
꽁꽁 싸매어두었던 마음속에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엇인가가 흘러넘치기 시작할 것이었다.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
하지만 윤서는 제 마음에서 흐르기 시작한 감정이 사랑의 색감을 띠고 있다는 것도,
제 모습이 사랑의 온도로 물들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아차리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었기에.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떨림이 소중한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으로만 생각할 것이었다.
“무서웠어… 무서웠다고요….”
그렇게 상혁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서러움을 토해내던 윤서.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상혁의 목에 팔을 걸어, 그를 제 품 깊숙이 끌어당겼고,
상혁은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듯, 윤서의 등을 가볍고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응, 응. 이제 괜찮아.”
그토록 빠르게 흐르던 세상이 상혁의 품속에선 천천히 흐르듯 느껴지는 게 의아한 탓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불안함으로 시작된 떨림과 사랑으로 시작된 두근거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 탓이었을까.
“….”
윤서는 점점 벌어지는 입을 다물며 상혁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살짝 들었던 엉덩이를 내려 정좌 자세로 앉아 상혁과 시선을 마주하려 했지만,
“괜찮아?”
“…응.”
다정한 목소리 탓에 시선은 자동으로 바닥에 떨궈질 뿐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나와도 괜찮아…? 그리고 전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예요… 내가 뭐라고….”
“음….”
옆에 있어 줄 수 없어서 조바심만 차올랐을 마음.
그런 마음 탓에 미친 사람처럼 달리기만 해서,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장면을 떠올릴 수 없을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와 지나간 장면을 되새기고 떠올렸다 한들, 지금이 저조차도 분명히 헤아리지 못한 마음을 전할만한 순간은 아니었기에.
“…뛰어오지 말고, 날아올 걸 그랬나.”
상혁은 괜스레 간지럽게 느껴진 관자놀이 탓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곳을 긁어대며 장난 섞인 대답만 전할 뿐이었다.
“….” / “….”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불렀던 여자도, 옆에 있어 주려고 미친 듯이 달려온 남자도.
드디어 같은 장소에 있게 됐지만, 애먼 곳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
그건 마주한 겨울이 아무리 시리고 차갑더라도, 제 나이에 걸맞게 봄처럼 풋풋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봄을 향해, 내일로 한 발짝 먼저 나아가 윤서를 이끌어줘야 했던 상혁.
그런 그가 뒤편의 수술실을 흘끗 바라본 뒤, 윤서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곁에 있어만 줄 수 없다는 선택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차분히 대답해야 해.”
“…응.”
“아버님 수술 언제 들어가셨어?”
“다섯 시간 정도 전에….”
수술이 진행되는 방식도, 그것의 절차나 시간이 소요되는 정도도.
무엇 하나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을 테지만, 그런 무능력한 자신에게 윤서가 제대로 기댈 수 있게끔.
상혁은 전부 이해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랬구나. 친인척 분들께 전화는 드렸고?”
“…못 했어요.”
“음… 그러면 어머님하고 윤태 소식은 어떻게 들은 거야?”
“엄마한테 전화 와서 받았더니… 병원이라 해서… 그래서….”
그 뒤부터는 말을 잇기가 힘들었던 것인지.
윤서는 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그런 자신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였고,
상혁은 윤서가 그러지 못하도록, 그녀의 양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너 바보 아니잖아.”
“바보야….”
“아닐 텐데… 그리고 지금 나는 바보가 아니라, 내가 아는 여자 중에 가장 똑 부러지는 여자한테 부탁을 하나 하려 했는데… 이거 어쩐다….”
“누구요…?”
“…바보 맞네. 당연히 너지, 그럼 누구겠어.”
“….”
“으이구… 정확히 말하면 부탁이 아니라, 역할분담이야.”
“역할분담…?”
“지금부터 친인척 분들께 전화 드리자. 아버님 수술 시작한 점, 어머님이랑 윤태 사고 소식까지 전부.”
“…응, 바로 할게요.”
“그러면 지금부터 나는 어머님이랑 윤태한테 다녀와야겠네.”
“….”
윤서는 다시 혼자가 되는 건 무서웠기에, 가지 말라는 말 대신 상혁의 군복 소매를 붙잡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식으로 붙잡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인정한 것처럼.
망설이게 되는 손을 애써 거두며 상혁을 놓아주었고,
“역시 강하네.”
상혁은 그런 모습이 대견하다는 듯, 윤서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가장 힘든 순간에 날 찾았으니까. 나는 네 옆에 있어 주는 것만이 아닌, 너희 가족을 위한 일을 해야 해. 그게 너를 위한 일일 테니까.”
“응, 응…!”
“그럼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아니…! 아니야, 천천히 다녀와요… 그리고 차 조심해야 해… 뛰어가면 안 된다…? 알았죠…?”
“…응.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전화해, 날아올 테니 아니, 아니… 조심해서 올 게.”
상혁은 그런 말을 끝으로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술실 반대편을 향해 나아갔다.
“바보….”
등장부터 퇴장까지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남자주인공이 보일법한 모습과 대사뿐인 탓이었을까.
“…에?”
윤서는 제 눈에서 상혁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제가 느끼는 두근거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듯,
“…안 돼, 지금은 안 돼… 전화부터 해야 해…!”
차가운 눈으로 뒤덮인 겨울 속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봄을 향해, 상혁을 따라 내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17:45]
급해질 수밖에 없었던 마음 탓에 속도를 위반하고 있던 윤태.
좌측 도로에 들어서려면 신호를 기다려야 했지만, 시야에 다른 차량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리고 윤태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좌측 도로 저편에서 운전 중이던 트럭 기사.
눈이 내린 길이었지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신호를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악운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속도를 지키지 않은 두 차량이 부딪치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윤태의 차량이 운전석부터가 아닌, 좌측 정면 보닛부터 들이박혀진 게 천운이었다.
윤서의 어머님은 척추 손상 및 뇌진탕 증상으로 의식불명이었고, 윤태는 복합골절 및 장기 손상으로 수술 중이었다.
입원 수속 같은 문제를 떠난 상황이었다.
상혁은 두 사람의 안위를 확인하고, 윤서에게 긍정적인 소식을 전하고 싶었을 테지만,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리고 이제 스물다섯 된 상혁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고 사태를 파악하려 드는 것뿐이었다.
“저, 저기… 윤태 지금 어떤 상황이에요…? 괜찮은 거 맞죠…?”
“아… 그게 아직 수술 진행 중이라서요….”
전할 수 있는 말이 그뿐이었던 간호사 뒤로 가운차림의 의사가 다가왔고,
“어, 선생님! 수술 끝났”
그가 간호사의 어깨에 팔뚝을 올려, 그곳에 기대어 지쳤다는 얼굴로 말을 가로챘다.
“이윤태 환자분 수술 조금 전에 끝났어요.”
“하….”
“안심하긴 이릅니다. 잘 끝났다고 말한 게 아니니까요.”
“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시죠.”
“일주일 전에 쓰러진 환자가 췌장암 판정을 받았어요. 그리고 오늘 의식을 잃어서… 그래서 수술이 시작됐는데, 이제 5시간 정도 지난”
“잠시만, 잠시만…! 아니, 일주일 전에 판정인데, 오늘 수술이 시작됐다고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췌장암은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면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암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병이 쓰러져서 발견됐고… 그런 병인데도 갑작스럽게 수술이 진행됐다는 건….”
“….”
“항암치료가 아닌, 직접적인 수술이 시작됐다는 건, 이쪽보단 그쪽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뜻이 되겠죠. 정확하진 않겠다만, 말씀하신 부분만 살펴보면 어떤 의사도 똑같은 결론을 내릴 거예요.”
누구도 떠나보내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할 틈도,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숨 쉬는 것마저도 혼란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상혁에게로.
“어… 불 들어왔다…!”
“…네?”
“어머님 깨어나신 것 같아요…!”
희망이라는 욕심이 다가오고 있었다.
▶▶▶ ▶▶▶
[18:30]
윤태의 수술도 끝났고, 윤서의 어머님도 의식을 되찾으셨다.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다. 안심해도 될 정도로 괜찮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소식을 윤서에게 전하면, 그녀 또한 기운을 차릴 것이었다.
즉, 윤서의 아버님만 힘내주시면 모든 일이 좋게 마무리 지어질 상황이었다.
상혁은 윤서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 수술 병동에 도착한 뒤부터는 뛰지 않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수술실로 향했다.
“어…?”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수술실 앞 분위기가 어딘가 어수선했다.
아니, 상혁의 눈엔 무엇보다 낯설고, 이상하게만 느껴질 것이었다.
수술실 앞에 서 있는 여러 명의 의사.
그리고 그들을 마주한 윤서는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한치의 미동도 없는 그 모습은 주저앉은 게 아닌, 무너진 같았다.
현실에서 도망치지 못한 채, 넋이 나가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의사들 앞으로 다가온 상혁이 수술실 쪽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니죠…? 아니잖아요… 그렇죠…?”
이토록 많은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침묵이, 뒤편의 주저앉은 윤서의 모습이 대답을 대신했지만,
상혁은 그런 대답을 전부 외면한 채, 의사 한 명을 붙잡고 말을 이었다.
“아…! 회복실로 가면 되나요…? 그렇죠…? 네…? 그렇죠… 대답 좀 해 달라고요….”
의사들은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하는 것만큼은 최대한 피하려 한다.
애초부터 수술을 진행하지 않거나, 어떻게든 수술을 중단시켜 환자실로 돌려보낸다.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마지막 온기를 가족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사망 선고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의사가 모여있는데도 테이블 데스가 벌어진 것이었다.
“지금 뭐라는…?”
“이석진 환자, 2015년”
“하지 마….”
“1월 2일 18시”
“하지 마, 하지 말라고!”
“26분부로 사망하셨습니다.”
“….”
“죄송합니다.”
사람은 매일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그 선택이 최선이었길 바라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런 내일이 제멋대로 찾아오는 걸, 우리는 인생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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