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38. 목토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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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목토시(1)
[15년_01월_02일_금요일]
[11:45]
오전 5시부터 시작된 제설 작전 탓에 녹초가 된 병사들.
그리고 그런 병사들이 모여 쉬고 있는 10평 내지의 생활관.
“어떻게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나 싶습니다….”
그중에서 막내로 보이는 한 병사가 바닥에 널브러진 군화들을 침상 밑으로 정리하며 말하자,
침상 가운데 자리에 걸터앉아있던 상혁이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힘들긴 하네. 그래도 전방은 여기보다 훨씬 심할 거야. 기운 내자.”
“아… 감사합니다.”
신호를 알아차린 막내가 상혁의 옆에 앉아,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팔도 다리도 아픈데… 특히 어깨가 너무 아픈 것 같습니다.”
말투는 둘째 치더라도, 듣기 싫은 소리만 들려오는 게 싫었던 것이었을까.
“이병이 힘들단다… 누가 안마라도 해드려라.”
“이병이 아프단다… 누가 간호장교 데려와라.”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사람, 양쪽 침상 구석 자리에 누워있던 병장들이 몸을 일으켜 쓴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화스트 페이스, 화스트 페이스. 발령권자 이병 권태윤.”
“내 아래로 아무나 의무대로 모셔갈 것, 이상.”
그리고 이대로 가다간 자신까지 귀찮아진다는 것을 직감했을 상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너만 힘든 거 아니니까, 듣기 싫은 소리는 속으로만 하자.”
“…죄송합니다.”
중간쯤 되는 선에서 적당히 나무라줘야 덜 혼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막내가 입술을 빼쭉 내밀며 대답하자, 상혁의 맞후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따라나와라 손짓하며 말했다.
“태윤아, 잠시만 밖으로 나와봐.”
“아… 알겠습니다….”
지나고 보면 전부 추억이 된다지만, 막상 돌아오고 싶지 않을 장소.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풍경은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절대 통하지 않는 이곳.
강원도 산골 어딘가에 자리한, 상혁이 복무 중인 부대가 쓰레기라 불리는 하얀 눈에 뒤덮이고 있다.
상혁의 맞후임과 막내가 생활관을 나서자, 병장들이 몸을 일으켜 대화를 이었다.
“근데 상혁이 너 안 올라가도 돼? 쏘가리 죽어날 텐데.”
“맞아, 관리 장교 너 없으면 그냥 민간인이잖아.”
그런 질문에 지난달에 전입해 온 담당 장교와 밀려있을 업무가 떠오른 것이었을까.
상혁은 잠시 어두운 낯빛을 그려냈지만, 그곳에 애써 미소도 덧그려 보이며 대답했다.
“아직 연병장 쪽은 시작도 못 했고… 거기에 저만 바쁜 것도 아니니, 제설 작전은 끝내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음, 역시 차기 분대장… 아주 완벽한 대답이군.”
“A급인 건 좋은데… 배운 형이라 그런지 놀려 먹을 기회가 없다니까….”
“감사합니다.”
상혁을 놀려먹을 방법이 없어, 맥이 빠진 병장들이 다시 침상에 누우려 하는 순간이었다.
[후, 후.]
생활관마다 걸려있는 스피커에 잡음이 울려왔다.
[아, 아. 지휘통제실 전파사항. 참모소대 이상혁 상병, 사단 인사처 이상혁 상병. 지금 즉시 지휘통제실로 올라올 것.]
“푸하하하. 야, 실화냐?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아마도 다음 주 입영 자원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방금 한 말이 무색하긴 하지만, 일단 지휘통제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가라, 담당 장교 좀 잘 가르치고… 너만 무슨 고생이냐.”
그렇게 가벼운 위로를 받으며 생활관을 나선 상혁은 막사 2층에 자리한 지휘통제실로 향했고,
“충성. 상병 이상혁, 지휘통제실에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빠르게 출입 신고를 한 뒤, 지휘통제실 끝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행정 장교에게 다가갔다.
그건 스피커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그라는 점도 있겠지만,
“어, 그래. 상혁아.”
사단 인사처에서 본부근무대 행정 장교, 그리고 전파사항으로 이어지는 호출이 익숙한 탓이었다.
상혁은 통신 보안 스티커가 붙어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며 행정 장교에게 물었다.
“인사처에서 부른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아니야. 그쪽이 아니라, 그… 내 휴대전화기로 전화가 왔어.”
“…에?”
어딘가 난처하다는 표정의 행정 장교가 책상에 놓여있는 자신의 휴대전화기를 가리켰고,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던 상혁이 통화가 연결되어있는 번호를 확인하곤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안 된다고 하려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던데?”
“이럴 애가 아닌데… 일단 죄송합니다.”
“됐어. 얼른 받아 봐.”
“알겠습니다. 상병 이상혁.”
그렇게 조금 갑작스러운 통화가 시작됐다.
“여보세요? 윤서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행정 장교님 번호는 어떻게 알았고.”
[선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건 윤서의 목소리가 분명했지만, 이토록 어두운 분위기가 낯선 탓이었을까.
상혁은 휴대전화기에 적힌 번호를 다시 확인한 뒤, 그것을 도로 귀에 가져다 대며 걱정하듯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어떡해… 나 어떡해요….]
“…무슨 일이야. 여보세요? 윤서야?”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답답함보다는 불안함을 느꼈을 상혁.
그런 그가 이번에는 통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데, 왜 그러냐고….”
[하윽….]
제가 처한 상황을 전하고 싶어도, 그걸 전하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기에.
윤서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어, 대답이 아닌, 울음을 참아내려 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들,
“…아버님은, 아버님 괜찮으시지?”
[방금 수술 들어갔어요….]
윤서가 처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던 상혁이 누구보다 당황한 모습으로, 하지만 누구보다 차분한 어조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윤태는? 윤태 어디 있어? 같이 있지? 전화 바꿔 줄래?”
[윤태… 아… 어떡해… 윤태 어떡해….]
“진정하자, 진정하고 천천히.”
[아빠가… 아빠가 의식을 잃어서… 그래서 윤태한테 전화했는데… 그렇게 전했는데… 하우으….]
윤서는 한마디 말을 이어갈 때마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숨을 허덕이고 있었고,
그에 점점 초조해졌을 상혁은 윤서가 뱉고 싶지 않을 말들만 묻게 될 뿐이었다.
“지금 그리로 가고 있다는 거지…?”
[못 와… 윤태도, 엄마도 여기 못 와… 사고 났데요… 여기 오다 교통사고 났데요….]
어린 시절에 묻은 때가 그대로인 마음,
“뭐…?”
[내가 너무 급하게 말했나 봐… 내가 울어서… 그래서 둘이 급하게 오다가… 그러니까 전부 내 탓이야… 전부 나 때문에 이렇게]
이별을 받아들이기에 상처 하나 없는 여린 마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윤서, 내 말 똑바로 들어. 네 탓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하우우… 하우으… 선배, 선배… 나 무서워요… 나 어떡해요….]
그런 마음에 너무 많은 아픔이 시작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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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
직속 상관인 본부 대장에게 지휘관 승인을 받고, 자신의 근무처인 사단 인사처로 향했던 상혁.
병 인사 관리계원으로서, 자신이 출타할 2주간 입소하게 될 신병교육대 입소자 명단이라도 정리하려던 그에게 돌아온 건,
‘본부 대장한테 들었다. 그거하고 출발하면, 너 휴가 나가 있는 동안 1분기 간부사관 지원서 제출할 거야.’
인사참모의 간무사관 제의였다.
평소 상혁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본부 대장도 인사참모도 갑작스러운 휴가를 너그러이 이해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약 4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던 상혁은 터미널에서 택시가 보일 때까지 달렸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윤서의 아버님이 입원했던 병실로 미친 듯이 뛰었다.
다만, 그곳에서 상혁을 맞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허억, 허억….”
폐가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이, 상혁은 제 근처를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아 다급히 물었다.
“저기 하아, 하아… 그, 여기 입원하셨던 분… 그, 지금 어디에….”
“아… 가족분 되시나요…? 그, 옆 병동으로 넘어가셔서 3층 암센터 오른쪽 길 따라가시면 수술실 나올 거예요….”
간호사가 늘인 말끝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지만,
“감사합니다…!”
췌장암이 얼마나 위험한 병인지, 그런 병의 수술이 이토록 갑작스럽게 시작됐다는 것의 심각성을 모르는 상혁의 모습.
그 역시 윤서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때 묻은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상혁은 옆 병동이라는 말만 듣고, 제대로 된 방향 감각도 없이 무작정 뛰어다녔지만,
“하아… 하아….”
그런 무식한 행동을 노력으로 이겨내, 빠르게 수술실 앞에 도착해냈다.
“윤서, 윤서야…!”
그리고 곧바로 수술실 입구 옆에 놓인 간이의자 쪽으로,
그 옆에 주저앉아 무릎을 모으고, 그곳에 고개를 파묻은 윤서에게로 다가갔다.
“나 왔어.”
“…선배?”
“응, 이상혁 맞아.”
“여길 어떻게….”
“무섭다며.”
얼룩진 베레모와 군복을 바라보면 눈이 내리던 바깥이 떠오를 것이었고,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빨갛게 달아오른 상혁의 얼굴을 바라보면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드는 기분이 느껴질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온전히 기대고 싶어진 것이었을까.
“선배… 선배….”
윤서는 무릎을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상혁에게 내밀었고,
상혁은 언제라도 떨어질 것 같은 그 팔을 붙잡아, 한쪽 다리를 굽혀 앉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흐아아앙….”
“괜찮아, 책임지고 약속할 게. 전부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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