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7. 놓아주는 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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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놓아주는 길(2)
[19년_12월_01일_일요일]
[04:00]
사랑으로 치러진 일이 선악을 초월한다 해서, 모든 행위가 용납되는 건 아니다.
상혁은 미래를 등지고 과거를 쫓았지만, 점점 더 어두워지는 자신의 그림자만 마주할 뿐이었다.
‘상혁 씨의 욕심이 윤서 씨의 죽음을 탄생시키고, 그것을 반복시킬 뿐이었어요.’
‘윤서 씨를 살해하려 드는 건, 현지 씨가 아니라’
그리고 짙어진 그림자가 늘어트린 죄책감.
그것이 발목을 붙잡아,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주저앉게 했다.
제가 쫓던 사랑이 누군가에게 독이 되어버린 상황을 더는 방관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현지의 죽음을 막아내면 윤서의 죽음도 사라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기에 애써 윤서를 외면하고 현지의 발자취를 쫓아왔지만, 이젠 정말 방법이 없었다.
“….”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이곳은 상혁의 집.
바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지저분하지만, 그런 거실에 상혁이 아무렇게나 누워있다.
더는 쫓지 않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무색해지지만, 상혁은 자신과 과거를 이어줄 또 하나의 물건을 찾고 있었다.
다만, 상혁에겐 현지 부모님의 사고 시기인 09년도를 펼쳐줄 물건이 없었다.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혁은 그것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남다른 이유가 있다 한들, 그 시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기에.
상혁이 그 시절, 제게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을 찾아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건 아니었다.
누워있는 상혁의 한쪽 손에 쥐어져 있는 국방색 목토시.
조금 헤진 모양의 그것은 상혁과 과거를 이어줄, 현지와의 인연을 매듭지어줄 마지막 물건이었다.
‘그리고 아까 말한 방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망에 주저앉을 때마다 들려온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듯 떠올랐을 테지만,
“…이게 마지막인 것 같네.”
상혁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중얼거리다, 쥐고 있던 목토시를 천장과 마주하게 들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이곳에서, 상혁의 눈에 어떤 색감의 추억이 차올랐을까.
‘더는 못 숨겨.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
‘…좋아해. 그것도 엄청…! 그, 그래서 말인데…!’
목토시에서 흘러내리는 소중한 추억과 그것을 바라보면 떠오르는 기억.
둘은 분명하게 다른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챌 수 없는 상혁은 현지를 떠올리며 두 눈을 가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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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이제야 조금은 익숙해진 골목길, 누구도 거닐지 않는 이 길에 상혁이 버려진 것처럼 홀로 서 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이라는 지금이 되기까지.
해가 뜨고 지기까지라는 긴 시간이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으로 흘러갔다.
“….”
시선에 무엇도 담기지 않는 건, 그렇다 할 잡념조차 해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탓이었을까.
그리고 이제는 무너진 마음마저도 전부 정리하려는 것이었을까.
상혁이 공허했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그린 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여기 학교 앞이에요.’
‘바로 옆이 대로인데, 설마 아니겠죠.’
그리고 담배를 피울 때마다 제 앞에 나타나 주었던 유진을 소원하듯.
닿지 못할 희망으로 향하던 동아줄에 불이 붙었다.
상혁이 이곳에서 유진을 기다리는 것에는 본인조차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만큼 복잡한 이유가 담겨있었다.
‘아저씨라면 둘 다 되살릴 수 있으니까.’
이곳은 그토록 애절했던 사랑을 놓아주는 길의 시작점이지만, 상혁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유진을 기다리려 했다.
그건 만에 하나라도, 억에 하나라도.
두 사람을 전부 되살릴 수 있다던 유진이 나타나 준다면, 절망의 늪에 잠길 저를 다시 한번 끌어올려 준다면.
저 멀리 돌아왔더라도,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마주하고 있을지라도.
상혁은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유진을 붙잡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향이 높았던 만큼,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한 마음은 끝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으로 흩어져 사라질 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져,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상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골목길로 들어서는 바로 옆 건물에 교복 차림의 여자가 기대 서 있다.
상혁이 담배 피우는 걸 말리지 않고, 어째선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유진이었다.
“…하늘이 항상 이러면 참 서러울 것 같네요.”
유진은 자신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먹구름이 드리워 새까매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고,
그런 식으로 서럽게 울려 퍼진 목소리는 전해질 수 없었던 것인지.
어느새 골목길을 나선 상혁이 바로 옆의 유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어디론가 향해 걸었다.
“아 아저씨?”
열일곱 소녀에게는 어렵게만 느껴질 공허한 모습.
유진은 저도 모르게 상혁에게 뻗었던 손을 거둔 뒤,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걸어서 가기엔 무리가 있었던 산부인과, 건물의 잔해뿐인 이곳에서도 상혁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현지의 모교에서도, 그녀의 본가에서도.
상혁은 마치, 제겐 없는 기억과 추억을 훑어보듯 현지가 살아온 거리를 거닐었다.
그리고 이 이상 갈법한 곳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상혁을 일으켜 세우고 싶을 유진이었기에.
“그만 해요!”
그녀가 잿빛으로 물든 고요한 거리에,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었던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너무 늦어버린 탓이었을까.
“….”
걸음을 멈춰선 상혁이 몸까지 돌리진 않았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 길이 누군가를 놓아주는 길이라는 걸 알아챈 유진의 목소리는 멈춰 서질 않았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되살리겠다는 생각을 말았어야죠. 어떻게 사람이 이래?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어?”
유진이 난데없이 열을 내며 소리치자, 상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더는 방법이 없네.”
“찾으면 되잖아!”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이 수십 수백 가지의 형태로 차올랐을 테지만,
상혁은 입안 가득 차오른 절망감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
그리고 그런 두 사람에게로, 상혁이 태워 올린 희망이 까만 빗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악재였다.
“…있잖아?”
“….”
“현지도 과거를 바꿨더라. 부모님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과거로 향했지만, 실패했던 모양이더라고.”
겨울에 내리는 빗방울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어조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상혁이 몸을 돌려 유진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현지한테 청혼한 날, 그날이 현지 부모님 기일이더라.”
상혁이 현지에게 청혼했던 18년 11월 23일.
그리고 현지의 부모님이 떠나간 08년 11월 23일.
상혁은 그런 날들을 되새기면, 모든 일의 원흉은 현지의 자살이 아닌, 제가 했던 청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니기를 바랐던 게 정답이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애초부터 우리 사이엔 미래는 없었던 거야. 내 청혼의 끝은 현지의 자살인 거고.”
“그럴 리가 없다고요….”
유진은 상혁의 단언이 틀렸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당장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듯한 애달픈 눈이 되어 말을 이었다.
“…증명할 수 있어. 아저씨랑 여자 친구 씨한테 누구보다 밝은 미래가 있었다는 걸”
“아니, 할 수 없어.”
“…할 수 있다고요!”
“10년 전 그날, 내가 무엇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아. 그 시절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그런 내게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 있을 리가 없잖아….”
“찾아보면… 같이 찾아보면 되잖아”
내리는 빗방울이 입안에 가득했던 절망감을 흐르게 한 것이었을까.
“도대체 얼마나 몇 번을!”
상혁이 유진에게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 소리치자,
새까만 빗방울 사이로 죄책감의 무게를 전해 받은 유진이 상혁과 마주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애초부터 우리가 함께할 미래가 없었던 거니까… 그러니까 여기까지야.”
하나의 형태로 뱉어진 마음, 그 안에 담긴 불안을 알아차린 것이었을까.
유진이 무엇인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세게 깨물었던 입술을 놓아줬다.
그리고 상혁에게 한 발짝 다가가,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많이 힘들었죠.”
“….”
“이상혁이란 남자는 정말 다정한 남자였네요.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잖아.”
“그게 무슨”
“아니야, 내가 알고 있어.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언제까지나 기억할 끄윽…!”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레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던 유진이 자신을 가로막는 무엇인가를 원망하듯,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요.”
그리고 끝끝내 붙잡을 수 없었던 상혁의 손을 바라보며 몸을 돌렸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겠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흘리며 이곳을 떠나갔다.
▶▶▶ ▶▶▶
[23:45]
언제라도 무너질 것처럼 허름한 건물에 자리한 이곳.
상혁은 제게 소중한 사람을 놓아주기 위해, 마지막이 될 과거로 향하기 위해 이곳을 다시 찾았다.
그렇게 마주한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상혁을 기다리고 있던 노신사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다만, 상혁은 아무 대답 없이 노신사를 지나쳐 뒤편의 안쪽 방으로 향했다.
“하하.”
노신사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상혁을 뒤따랐다.
그리고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상혁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의 손에 쥐어진 목토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깊은 과거로 향할 물건은 있나요?”
“…없습니다.”
“음… 후회는 없다… 라는 건가요?”
“네.”
노신사에게 목토시를 건네려는 상혁의 손엔 머뭇거림이 조금 묻어났지만,
“사랑 속에 광기가 있다면, 광기 속엔 이성이 있어야 하기 마련이죠.”
“…출발하죠.”
알고 있는 격언에 정신을 차린 듯, 마지막이었을 추억을 제게서 떠나보냈다.
그렇게 목토시를 건네받은 노신사는 제 손 위에서 금빛 알갱이로 뒤바뀐 목토시가 모래시계에 담기는 것을 보고는 씩 웃어 보였고,
“2일이 아니라, 3일이 되겠군요.”
상혁이 이해할 수 없을 말과 함께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제 눈에는 지금부터가”
과거와 과거가 맞닿기 시작한 탓이었을까.
상혁이 이전보다 빠르게 떠나간 탓에 어떤 말도 전할 수 없었지만, 노신사는 빈자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겠군요. 마주하시길, 그리고 선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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