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6. 놓아주는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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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놓아주는 길(1)
[19년_11월_30일_토요일]
[20:37]
과거로 향할수록, 소중했던 추억들은 잊고 싶은 새로운 기억들로 덧칠해졌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을 바쳐 과거로 향한다는 건,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해주는 물건만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소중한 물건과 함께, 그곳에 담긴 소중한 추억까지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제는 사라져 잊혀졌지만, 소중한 물건과 추억을 바쳐 과거를 헤매고 다녔는데도.
상혁은 현지와 함께할 미래를 찾아낼 수도, 만들어낼 수조차도 없었다.
아니, 무엇하나 제대로 전해지는 것마저 없었다.
상혁을 바라보는 현지의 얼굴에서 그토록 밝았던 미소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그런 현지를 바라보는 상혁이 슬픈 표정마저도 지어 보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무엇보다 애달파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혁이 사랑이라는 마음을 놓아주려 하기 시작했기에.
노신사는 평범한 마음가짐으로는 견뎌낼 수 없었던 그날의 두통을 되새기듯,
“슬슬 무리겠군요.”
제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상혁을 바라보며 낙담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상혁이 수많은 시계가 노신사를 감시하는 이곳에 돌아왔다.
“윽…!”
그리고 자칫하면 의식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이전보다 더욱 심해진 두통에 직감한 것처럼.
흩어졌던 감각을 두통이라는 형태로 되찾은 상혁은 곧바로 책상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랑이라는 마음을 놓아주려 했기에, 그것에 가려져 있던 어두운 진실을 마주할 차례였다.
제 욕심으로 뒤바뀐 새로운 이야기, 현지가 윤서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기억.
그런 과거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다고 외치는 강렬한 두통.
“하아, 하아… 하윽…!”
상혁은 손톱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허벅지를 긁어대고, 책상다리가 무너질 정도로 그곳에 머리를 짓눌러댔다.
언제라도 흩어질 것 같은 감각을, 견디고 싶지 않을 두통을 붙잡는 것이었다.
그렇게 치아 사이로 침까지 흘려대며 고통을 견디는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지만,
“흠….”
그것을 바라보는 노신사는 상혁이 흘리는 신음이 아닌,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제발… 제발, 멈춰, 멈추라고…!”
다시 한번, 제게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마주하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통에 격양되어 부르르 떨리던 상혁의 몸이 점차 진정되었고,
“음…? 하하, 그렇군요. 그래, 이건 정말 예상조차 못 했네요.”
노신사는 제게 찾아온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사그라졌던 흥미가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했다는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도달하셨군요… 그리고 그걸 확실시하기 위해 절 찾아왔었던 거고요.”
그에게도 상혁이 세 번째 과거에서 일으킨 변화가, 새로운 기억이 전해진 것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아니요. 여기서 옆길로 새는 건 아쉬우니, 저도 질문을 하나 해볼까 합니다.”
노신사의 정체와 목적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상혁이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노신사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그런 질문을 가로채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과거에서의 조언을 기억하시겠죠. 타임 리프, 지난 과거를 다시 재생시킬 뿐이다.”
“….”
“이어서 어제였죠. 소중한 물건에 깃든 시간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는 분해, 그리고 그런 과거에서의 선택이 원래의 시간으로 모여드는 구축.”
노신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현상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리는 이미 알고 있을뿐더러, 자신의 의문에 관한 대답이 되어주지 않았기에.
상혁은 차오르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책상을 내려치며 고개를 들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만 좀… 내가 궁금한 건 그딴 게 아니라고….”
절실한 마음이 외치는 애달픈 목소리. 그것을 외치는 상혁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러자 노신사가 잠시 말을 멈춘 뒤, 손과 손 사이라는 허공에서 웬 나무 조각들을 창조해냈다.
“하….”
그리고 그런 신비한 현상에 미간을 좁히는 상혁 앞에 그것들을 내려놓으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었죠. 분해와 구축, 아니, 분해와 재구축이라고.”
말에 재가 붙어있었다.
“아…?”
이번엔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게 된 것이었을까.
상혁은 조금 멍한 표정이 되어, 열쇠고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제멋대로 해석했던 재의 의미를 되짚었다.
과거를 마주한 상혁이라면, 그것의 본래 의미에 도달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음… 아니라고 해야겠죠.’
‘분해, 그리고 재구축입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현지를 알고 있었고… 내게 구축이 아닌, 재구축이라 말했지… 역시 현지는….”
“드디어 시작점에 닿으셨군요.”
현지를 아는 듯한 눈치도, 구축에 달려있던 재라는 형태의 말장난도.
처음부터 전부, 노신사에 의해 미리 장치된 복선인 것이었다.
그것들을 이제야 알아챈 상혁은 멍하니 벌어진 입으로 아무 말도 잇지 않았고,
노신사는 얼빠진 모습의 상혁을 뒤로한 채, 나무 조각들을 이리저리 뭉쳐대며 끊어진 대화를 이어나갔다.
“각기 다른 조각들을 뭉쳐도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는데, 그런데도 과거를 계속해서 무너트리고, 바라는 미래를 마주할 때까지 이 일을 반복할 건가요?”
“….”
“그래도 되겠어요? 아니, 다시 묻죠. 그럴 수 있겠어요?”
노신사가 맞춘 나무 조각은 정육면체에 가깝지만, 한 곳이 튀어나온 모양을 하고 있었다.
“상혁 씨가 이 부분을 집어넣기 위해 향했던 과거. 상혁 씨의 욕심으로 반복된 과거는 어떤 변화를 만들었죠?”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상혁은 당황한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다만, 노신사는 제게서는 도망칠 수 있어도, 현실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는 식으로.
이곳에서 도망치려는 상혁의 뒷모습에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씨의 욕심이 윤서 씨의 죽음을 탄생시키고, 그것을 반복시킬 뿐이었어요.”
“그만….”
“지금 윤서 씨를 살해하려 드는 건, 현지 씨가 아니라”
“그만해….”
“이상혁 씨 본인이겠죠.”
“닥치라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상혁의 외침, 짧고 강한 그 목소리가 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울림이 얼마 못 가 사라졌을 때,
“….”
반동처럼 찾아온 고요함은 다시 한번, 결말이 똑같은 선택을 강요할 뿐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현지를 놓아줄 것인지, 윤서를 붙잡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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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0]
[역시… 김현지도 과거를 바꿨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기억이 왜곡된 거라니… 어렵군, 어려워.]
“뭐, 이젠….”
[…그래. 그나저나 정말 지독한 악연이네.]
“저도 두 분이 여기에 계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철식과 통화 중인 상혁이 달빛에 의지해 어두운 산길을 오르고 있다.
그건 윤서를 찾아가기 위해서가 아닌, 현지의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현지의 부모님은 어째선지, 본가 지역이 아닌 윤서가 있는 사찰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두 남자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고,
철식이 조금 뜸을 들이다, 어딘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유진이는 먼저 갔다.]
“…고마웠다는 말도 못 했네요. 혹시 연락처는 받으셨나요?”
[못 받았어. 이젠 끝이니까, 오늘은 거기까지만 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기서도 사라질라.]
“…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자신이 어떤 과거를 붙잡아야 하는지 결정했지만, 그것을 입으로 내뱉을 자신이 없었던 상혁.
그리고 그런 결정을 직감했지만, 선뜻 물어볼 수 없었던 철식.
과거를 뒤쫓기 위한 단서를 부탁한다든지, 그런 부탁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거절은 하지 않는다든지.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두 남자의 통화가 그렇게 끊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도착한 목적지,
“다시 오셨군요.”
윤서가 안치된 절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는 상혁에게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는 법사님이 서 있었다.
상혁은 그런 인사를 능숙하게 따라 한 뒤,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다른 분들을 뵈러 왔습니다. 혹시 안치된 분들의 명부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들어오시죠.”
조금 달라진 부탁에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법사님은 절 입구 왼편에 자리한 방으로 향했다.
이곳은 탕비실로 이용되는 장소처럼 보이지만,
“저기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법사님이 가리키는 맞은편 벽면엔 곳엔 년도 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명부들이 놓여있었다.
“…감사합니다.”
상혁은 곧장 09년도 명부를 집어, 뒤편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10년도를 지나, 11년도의 기록까지 살펴봐도 현지의 부모님 성함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차라리, 상혁은 안치소를 둘러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런 모습을 곰곰이 지켜보던 법사님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정말 혹시 해서 여쭙는 건데, 찾으시려는 분들이 부부인가요?”
“아,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따라오시죠….”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짐작 가는 곳이 있다는 것처럼 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법사님.
그녀는 개인 단이 안치된 방을 지나, 조금 더 안쪽에 자리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방 입구에서, 한 부부 단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만나시려는 분들이 저분들인가요?”
그리고 그곳을 바라보던 상혁이 세게 깨물었던 입술을 놓아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그게”
법사님은 자신이 그들을 어째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간략하게 설명하려 했을 테지만,
“아뇨, 이거면 됐습니다.”
상혁이 그런 말을 거절하며 지어 보인 얼굴 탓에 별다른 말을 잇지 않고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상혁은 앞으로 나아가, 부부 단으로 안치된 두 사람의 성함과 서로 다른 날에 태어난 날짜를,
두 분이 함께 떠나간 날짜인 09년 11월 23일이라는 날짜를 확인했다.
“…정말 끝이네.”
그 정도로 깊어진 과거와 자신을 이어줄 물건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었을까.
상혁이 미약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뱉을 수 없었던 결심을 다잡은 것처럼.
“안녕하세요, 이상혁이라고 합니다. 늦게 찾아 봬서 정말 죄송합니다.”
현지를 놓아주는 미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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