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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바꾸는 방법-32화 (32/76)

〈 32화 〉 #32. 세 번째 과거(1) – 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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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세 번째 과거(1) ­ 색감

[17년_01월_24일_화요일]

[13:00]

상혁의 세 번째 과거를 펼쳐줄 물건, 만년필에 소중한 마음이 담기기 시작한 것일까.

흩어졌던 감각을 되찾은 상혁이 가장 먼저 느낀 건, 과거의 시작을 알리는 익숙한 대화들이었다.

“우리가 알던 문학은 번데기의 형태였다. 이런 느낌일까나요…?”

“변태보단, 저도 모르게 도태되고 있던 부류겠죠.”

“하하, 그렇게 무감각한 얼굴로 단언하셔 봤자, 신인 작가들 눈엔 자해하는 꼴로 보일 뿐이라고요.”

“…저의를 이해하셨으면서 구태여 설명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시군요.”

목소리는 조금 낯설어도, 오갔던 대화는 어렴풋하게 떠오를 것이었기에.

시야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을 테지만, 상혁은 제 앞에 펼쳐질 장소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와의 소중한 추억이 남아있는 것도, 제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것도 아닌 이곳.

이곳은 안방이나 서재가 아닌, 조금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중식당이었다.

그리고 등단 시상식 직전, 신문사 관계자 사람들과 이곳에서 식사했던 어렴풋한 기억이 머릿속에 스케치 되고 나서야,

“….”

상혁은 원래부터 뜨고 있던 두 눈에 이곳의 풍경이라는 의미 없는 색감을 덧칠할 수 있었다.

“자자, 너무 저희끼리 떠드는 것 같네요. 그래서 상혁 씨는 요즘 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요, 요즘은 순문학보다는 각본이라든지… 영상 쪽 노선을 타려 하잖아요.”

“만화나 장르 소설 쪽 시나리오가 강세긴 하죠. 월등한 인기작은 보증 수표가 되니까.”

“주변 지인 중에 작가가 있나요? 요즘 사람들은 전부 그쪽에서 활동할 것 같은데.”

출품작들을 심사했던 고문 위원들과 신문사 편집자의 시선이 상혁에게 모여들었지만,

“….”

상혁은 계속해서 침묵할 뿐이었다.

그건 대답 따위를 고민하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순서를 전부 다 떠올려냈을 때.

“죄송합니다.”

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반쯤 숙여 사과한 뒤, 몸을 돌려 식당을 나서려 했다.

“네?” / “…음?”

“이, 이상혁 씨?”

지금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것이 등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곳을 떠난다는 선택에 변함은 없을 것이었다.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가야 할 곳, 직접 세우지 않아도 세워져 있던 해야 할 일.

상혁은 지금 당장, 세 번째 과거를 풀어가는데 핵심이 되어줄 인물, 박철식 형사를 만나야 했다.

▶▶▶ ▶▶▶

[13:20]

지구대나 파출소와 달리, 건물이 내뿜는 위압감부터가 격이 다른 이곳은 총경이 자리를 지키는 지역구 경찰서.

그런 이곳에 찾아온 목적의 무모함 탓이었을까.

‘나를 설득할 방법?’

상혁은 경찰서에 들어서기 전, 미리 준비된 해야 할 일에 패착은 없는지 검토하고 있었다.

‘자수라도 해보는 건 어때?’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철식의 조언.

그건 지금이라는 과거의 철식을 불러내기에 최적의 묘수이기도 하면서,

‘첫 팀장 달고 있을 때니까, 살인이나 자살 같은 사건이라면 덥석 물겠지.’

이어질 상황은 오롯이 상혁의 언변에 달리게 되는 도박 수이기도 했다.

‘…경찰서에 구금됐다 돌아올 생각인가요. 이런 일을 믿어줄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러니까 신빙성부터 해결해야 해요.’

‘어이, 신빙성이라는 게 지금은 있는 줄­’

‘형사 아저씨를 만나면, 형사 아저씨 신상 정보부터 읊어보는 게 좋겠네요.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일까지요.’

‘…어이?’

하지만 유진이 있었기에, 담배를 물어가며 고민에 잠길 필요는 없었다.

상혁은 발이 닿는 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누구처럼 똑 부러진다니까.”

익숙한 얼굴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상혁.

그런 그가 휴대전화기를 꺼내, 이제는 외워버린 전화번호를 누르며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여보세요.]

“박철식 형사님 맞으시죠, 지금 어디 계시죠?”

경찰서에 드나드는 게 이토록 쉬운 일이라는 것에 놀랄 틈도 없었다.

“아, 2층이군요.”

상혁은 중앙 현관에 달린 건물 안내도를 바라보고 중얼거리다, 곧장 계단을 올랐다.

[…아니, 갑자기 누구신데­]

“이름 박철식, 85년 5월 27일생, 33세. 혈액형은 O형­”

[당신 뭐야, 너 누구야­]

“공채 순경 출신이지만, 승진시험과 특진에 운이 따라, 이른 시기에 팀장을 달았다.”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방적인 대화는 상혁이 2층에 도착한 순간,

복도 끝자락의 강력 5반에서 뛰쳐나온 철식이 그런 상혁을 마주한 순간이 되어서야 끊어졌다.

서로에 귀에 닿아 있던 휴대전화기가 내려지고, 그런 서로에게 다가서는 두 남자.

“제겐 그렇게 말씀해주셨지만, 사실 능력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죠.”

“너 뭐야, 너 뭔데 그런 것들을….”

‘겨우 그거로 될 리가 없잖아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 이름 정도는 말해야죠.’

“…마지막으로 박지은 씨라고 했죠.”

“…뭐?”

“이 무렵부터 관심이 조금 생겼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역시 좋아한다는­”

“이런 미친!”

끝까지 전부 듣지 않아도, 상혁의 말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철식이 다급히 상혁의 어깻죽지를 붙잡고 입을 막으려 들자,

“…그 감정 그대로여도 괜찮습니다. 오늘 하루만 시간 좀 내어주시죠.”

상혁은 당황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담담히 제 말만 이어갈 뿐이었다.

▶▶▶ ▶▶▶

[16:15]

제게 벌어진 일을 몇 명에게 몇 번이나 설명한 것일까.

이제는 그런 것들을 세어볼 필요도 없이 말끔한 정리가 전해졌지만,

“미친놈이냐…?”

철식에게선 언제나, 누구나 그랬듯이 당연한 반응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 미친 사람 한 번만 도와주세요. 부탁합니다.”

사실, 철식의 반응은 상혁이 경찰을 조수석에 앉혀놓고 속도를 위반하며, 차선을 마구잡이로 변경하는 탓에 나온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예상조차 못 하는 듯한 대답을 듣던 철식은 정상적인 대화는 포기라는 식으로 같은 말만 되뇌게 될 뿐이었다.

“…미친놈 맞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상혁의 난폭한 운전이 현지의 본가 지역의 허름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고,

“살다 살다, 별 미친 짓을 다 하고 다니네.”

차에서 먼저 내린 철식이 바로 앞 건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 말을 믿어서 따라온 줄 알면, 그거 큰 착각­”

철식의 말이 끊어진 건, 상혁이 제 옆에 서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바로 앞 건물로 향해버린 탓이었다.

“어이, 어이… 하, 됐다, 됐어.”

철식은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상혁을 뒤따랐다.

그렇게 얼굴에 피곤함만 가득한 두 남자가 오래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쪽은 복합 상가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지만, 상가들은 죄다 문을 닫고 있었다.

철거 직전인 폐건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조금 더 과거였어야 했던 건가….”

상혁은 바닥에 떨어진 임대, 매매 문의가 적힌 종이들을 바라보며 낙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전부 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철식의 손가락 끝엔 다행히도, 이 건물을 홀로 지키는 불이 켜진 산부인과가 자리하고 있었다.

“….”

정말로 마주했다는 것에 조바심을 느낀 것일까.

점점 굳어지는 두 발은 앞으로 나아가길 망설여했지만,

“열려 있네.”

이미 산부인과 앞으로 다가간 철식이 출입문에 걸린 진료 가능이라는 팻말 흔들고 있었기에.

“하….”

상혁은 긴 한숨으로 불안감을 내려놓으며 산부인과 앞으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출입문을 열었다.

안쪽에서는 이곳이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라는 걸 의미하듯 흐릿한 소독약 냄새가 풍겨왔고,

“음? 어서 오세요.” / “어서오세요.”

접수대에 있던 간호사들의 인사도 함께였다.

상혁과 철식은 그런 간호사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보통 간호사라 하면 젊은 여성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이곳의 간호사들은 그런 통념을 깨는 모습을 하고 있는 탓이었었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았다는 걸 알려주는 얼굴의 주름. 그것은 중년도 아닌, 노년의 것.

간호사보다, 수녀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잡념을 먼저 떨쳐낸 상혁이 접수대로 다가가, 고개를 꾸벅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그,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혹시 원장 선생님 좀 뵐 수 있을까요?”

“네, 네. 근데 혹시 어떤 일로…?”

난데없는 호출에 간호사 한 명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건 언제 문을 닫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산부인과에 찾아온 환자 탓이라든지,

그런 환자들의 성별이 남자들뿐이라는 점이 문제라든지.

후자의 경우는 이 세상 어떤 사람도 품을 수 있는 의문일 테지만,

간호사들은 그런 호기심 탓에 갸웃거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치, 어딘가 불안한 내색을 감출 수 없었던 것처럼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예리한 형사라면 절대 놓칠 리 없는 반응.

출입문 쪽에서 상혁과 간호사들을 지켜보던 철식이 접수대로 다가와, 경찰 공무원증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원장님 좀 뵈러 왔습니다. 안에 계시죠?”

“경, 경찰이요? 저, 저기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 다름이 아니라­”

조금 위압적인 분위기에 당황한 상혁이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됐고, 기다려봐. 얼른 원장님 불러오시죠.”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째선지 그런 위압적인 분위기가 먹혀들어, 간호사들이 고개 숙여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 진료 차트 때문에 그러시는 거 맞죠… 이제 곧 문 닫을 병원이고, 전부 폐기 처분하려 했어요.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 그이는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고요….”

“언니…! 아니, 아니. 형사님… 그, 보건소에 전달할 예정이었어요.”

“아, 맞아요, 맞아요.”

그리고 네 사람의 소란이 조금 커다랬던 것일까.

조금 갑작스레 원장실 문이 활짝 열리고, 그곳에서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일이면 문 닫을 병원이 뭐 이렇게 시끄러워!”

희끗희끗한 머리와 깨끗하면서도 누런 느낌이 드는 의사 가운.

그건 의사로서의 긴 경력이나, 검소한 자세 같은 것들을 아주 청렴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응? 뭐야, 웬 남자들이 왔어.”

“아, 원장님 되십니까? 경찰입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다만, 형사의 위압감 따위가 먹혀들 상대가 아니었던 것인지.

“…무슨 일이래? 여기는 친자 확인 같은 거 하는 곳이 아닌데? 큭큭.”

원장은 그런 말을 내뱉으며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부부야? 요즘 남자들은 쯧… 그래서 뭐, 상상임신이라도 했어? 그런 부분이라면 내가 확인해줄 수 있긴 하지.”

“네…?” / “참나….”

청렴했던 모습의 의사는 온데간데없이, 웬 돌팔이 의사 같은 노인을 마주하게 된 상혁과 철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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