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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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년필
[17년_01월_24일_화요일]
[12:00]
선택받지 못한 옷가지들이 전신 거울 주변부터 방바닥을 포함해, 침대 위까지 점령한 방.
주변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어질러진 건,
이 방의 주인인 윤서가 거울 앞에 서서, 몇십 분째 패션쇼를 진행 중인 탓이었다.
윤서는 두 가지 문제를 당면하고 있었다.
우선, 상혁이 등단 시상식에 불러줬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뭘 입어야 좋으려나… 이게 끌리긴 하는데, 그래도 좀 짧지…?”
도대체 어떤 옷을 입고 가야 상혁에게 예쁘게 보일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예쁘게 입어야 현지의 눈치를 보지 않을지.
이것이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윤서에게만큼은 무척이나 복잡할 첫 번째 문제였다.
“아니야, 겨울이잖아… 선배도 잔소리할 테고, 언니 눈치도 엄청 보일 거고.”
우선, 치마는 전부 탈락인 모양이다.
“…그럼 바지?”
그렇게 다리에 긴 바지를 이것저것 대보던 윤서가 문득,
“맞아, 선물은 어쩐다….”
미뤄두고 있던 두 번째 문제가 떠올랐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윤서가 바라보는 뒤편의 책상 위엔 선물 봉투가 놓여있었다.
다만, 미리 준비해둔 그것을 평범하게 등단 선물이라며 전해도 괜찮은 것인지,
차라리 조금 뒤에 만나기로 한 현지 앞에서 적당히 아무거나 고르는 척, 같은 선물을 새로 구매할 것인지.
여자들 사이에선 미리 준비해둔 선물과 적당히 준비해 간 선물의 의미가 극명하게 다르다는 게 두 번째 문제였다.
“에휴…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거야….”
평범하게 선물을 전하는 것조차 수없이 망설여야 하는 처지.
그런 처지가 서러웠을 윤서는 오늘도 잔뜩 우울한 표정만 짓게 됐지만,
서러운 마음에 골라 집은 겉옷이 또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선배 검은색 좋아하니까, 거기에 양복도 잘 안 입는 편이고… 맞춰 입게 되진 않으려나…?”
그것을 제 몸에 대어보곤, 상혁과 비슷한 옷차림이 되리란 예감에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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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5]
사람들이 흩어졌다 모여들기를 반복하는 번화가 사거리.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 탓에 내리는 하얀 눈이 좀처럼 쌓이질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거리 속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며 통화 중인 여자.
“나 도착했어!”
[나도 도착해 있는데…?]
“응?”
갈색 단발머리와 잘 어울리는 연노랑 양털 후리스 재킷과 허벅지를 반쯤 가리는 갈색 체크무늬 치마.
거기에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니삭스로 교복풍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그녀, 김현지다.
“진짜? 어디야? 아, 숨어있구나! 얼른 나오시지!”
현지가 주변을 살피며 통화하는 모습은 지나가던 사람, 특히 남자들의 이목을 늘어트리기 알맞게 발랄했다.
[바보… 7번 출구라니까.]
“응? 나도 7번 출구 가 아니라 8번 출구네….”
현지는 제 옆의 지하철 출구 번호가 8번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사거리 건너편을 두리번거렸고,
“에고, 7번 출구 저기 보이네. 신호가… 오, 바뀌었다! 바로 건널게!”
타이밍 좋게 바뀐 신호등에 좋아진 기분을 내색하듯, 도로 위에서 슬러시처럼 녹아버린 눈을 경쾌하게 밟으며 길을 건넜다.
본래의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휴대전화기를 쥔 손을 살짝 흔들어 현지를 불렀다.
“언니, 여기…!”
주변 여성들보다 조금 큰 키를 돋보이게 하는 늘씬한 다리와 청바지.
그리고 그런 다리를 반쯤 집어삼킨 검은색 롱부츠.
등을 반쯤 가리는 가지런한 생머리가 눈에 젖을까, 그것을 검은색 가죽 재킷 안쪽에 숨겨둔 그녀,
현지에게서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이목 하나하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받아치는 이윤서다.
“많이 기다렸어? 미안…!”
현지가 약속 장소를 헷갈려 조금 늦었다는 것만으로 얼굴 앞에 손을 모으며 미안하다는 얼굴로 사과하자,
“나도 방금 왔어.”
윤서는 그런 탓에 마주하게 된 현지의 정수리를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괜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신을 표현하는 옷차림이라든지, 상대방을 생각하는 배려심이라든지.
모난 점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색감부터가 확연하게 다른 현지와 윤서.
그런 두 여자가 이렇게 함께 어우러져 걷게 된 까닭은, 오늘 있을 상혁의 등단 시상식에 함께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근데 선배는 따로 와? 같이 오는 줄 알았는데.”
“아! 그… 신문사 관계자분들? 그분들이랑 점심 먹고 오는 모양이더라고. 아침부터 붙잡혀 있는 것 같더라.”
“와… 듣기만 해도 울렁거리네.”
윤서는 쓸데없이 과한 격식이 오가는 자리는 상상만 해도 지친다는 듯, 고개를 연신 저어댔다.
그리고 처음부터 의식하고 있었지만, 마치 문득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현지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뭐야?”
“아, 선물! 사실, 뭘 선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주변에 등단한 작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까… 그래서 등단 기념이라기보단, 어울릴 것 같았던 색으로 준비해봤지.”
“음…! 그 정도 크기에 선배가 어울릴 것 같은 색깔의 물건이라면… 음… 옷 같은 건가…? 뭔데?”
호기심이 차오른 윤서가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궁금해? 궁금하지!”
현지는 그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허리를 살짝 숙이고 윤서를 올려다보며 대화를 이었다.
“알려줄까?”
“…그래놓고 비밀이라 할 거잖아.”
“큭큭, 정답! 비밀입니다!”
“처음부터 별로 안 궁금했거든.”
“아…! 그랬구나, 윤서는 하나도 궁금했구나!”
그건 서로를 잘 아는 두 사람의 대화였지만,
대화 주제가 서로인 적은 거의 없었던 두 여자의 대화이기도 했다.
서로의 마음에 담긴 남자 탓에 도돌이표처럼 반복될 그런 대화였다.
“음… 나도 빈손으로 가긴 좀 그렇겠지?”
“땡! 상혁이는 우리가 그런 고상한 자리에 가서 축하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풉… 그것도 그러네. 그럼 그냥 가자.”
윤서는 선물까진 괜찮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바로 옆 상가를 흘끗 보거나, 뒤편의 상가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그런 모습까지 못 본 체할 수 없었던 현지가 윤서의 재킷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정 그러면 어디 들렀다 갈래?”
“음… 늦지 않으려나?”
“1시 30분까지니까, 아직 여유 있을 것 같네.”
“…그럼 겉치레니까, 대충 사서 갈까? 선물 생각을 전혀 못 했네.”
윤서는 하고 싶지 않을 말과 그저 말뿐인 거짓말을 내뱉어 대다,
“어, 저기 괜찮을 것 같은데?”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가게를 발견했다는 것처럼, 그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으이구, 같이 가!”
그렇게 들어선 가게엔 서점처럼 많은 양의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윤서는 꼭 사야 할 선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즉, 이곳에 처음 와본 게 아니라는 것처럼, 미로처럼 복잡한 서점 내부를 가로질러, 도서 용품들이 가득한 코너에 도착했다.
“가게 되게 예쁘다. 근데 여기 와 본 적 있어?”
“아… 응, 언제 한 번 와봤던 것 같네. 아무튼, 뭘 사는 게 좋으려나…!”
“책은 어때? 나도 책 사줄까 고민했었는데.”
“책?”
“응, 응. 상혁이 철학 관련 서적에 환장하잖아.”
윤서는 현지의 조언을 듣자마자, 상혁이 말버릇처럼 내뱉던 명언들이 떠오른 것인지.
“아니야… 지금보다 더 심해지면 일상 소통도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아…?”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무섭다는 식으로 물었고,
“인정… 상혁이가 하는 말은 한 번씩 너무 어렵다니까…?”
현지도 그런 반응에 공감한다는 듯,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대답했다.
“겨우? 절반 이상이 어렵지… 그리고 아마, 선배는 본인이 그런 말을 할 때 엄청 멋지다고 생각할 거야… 정말이지”
“바보 같다니까.” / “바보 같다니까.”
“풉, 언니도 같은 생각 했구나…!”
“풋… 있잖아? 가끔이긴 한데… 사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냥 와…! 해줄 때 있지 않아?”
“대박, 언니도 똑같구나.”
“상혁이는 작가가 아니라 윤리 선생님이 어울렸을지도 모르겠어.”
“음…! 그것도 잘 어울린다. 윤리 선생님에 담배… 조합 괜찮은데? 캐릭터 사전에 추가해놔야겠다.”
“잠시만… 큭큭,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응? 뭐가?”
“상혁이가 또 여자 앞에선 은근 숙맥이잖아, 여자 고등학교로 보내는 이야기는 어때?”
“풉…! 그것도 좋네!”
두 여자는 여자 고등학교에서 윤리 수업을 가르칠 상혁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참을 키득거렸다.
그리고 그런 즐거운 대화가 오가던 와중에도, 미리 준비했던 선물을 떠올렸을 윤서.
“이세계에선 윤리 선생님이었을 선배한테 어울리는 선물이라….”
그런 그녀가 준비했던 선물과 똑같은 물건을 하나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조금 식상한 것 같기는 해도 이게 좋겠지?”
“음…! 상징적이고 괜찮네!”
“그래, 작가 등단이니까 상징적인 물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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