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30. 찾아가는 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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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찾아가는 길(2)
[19년_11월_30일_토요일]
[16:25]
편의점에서 수건을 구매해 온 유진이 상혁과 철식에게 그것을 한 장씩 건넸고,
“고마워.”
“…고맙다.”
두 남자가 서둘러 머리부터 말리는 모습이 조금 한심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얼어 죽진 않으려는 모양이네요.”
그것이 카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책망이란 걸 알아챈 것일까.
“미안.”
유진의 저의를 단번에 알아차린 상혁이 짧게 사과했다.
이제 두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녀의 속내를 곧잘 알아챌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학생에게 금전적 도움을 받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상혁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얼마 나왔어? 어, 잠시만… 내 겉옷”
“아저씨 카드로 계산했어요.”
“어? 아….”
어느 순간부터 유진의 팔에 걸려있는 정장 재킷과 그런 손에 쥐어진 지갑.
상혁은 그것들을 이제야 눈치챘지만, 괜한 말을 잇지 않고 멋쩍어진 뒤통수를 말렸다.
“그래서 이 학생은?”
“아… 그게”
“이 학생 바로 앞에 있어요. 직접 물어보시죠.”
“어? 아, 응.”
따가운 건 말투만이 아니었다.
철식은 유진의 눈초리에 살짝 움찔하다, 머리를 말리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등학생? 이름은… 이유진이구나.”
그건 교복과 오른쪽 가슴에 달린 명찰만 확인하면 이제 막, 말을 떼기 시작한 아이라도 할 수 있을 법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철식은 그것이 제법 성실한 대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한 것인지, 유진의 미간이 풀어질 걸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다.
물론, 유진은 조금 더 날카로워진 눈매로 철식을 쏘아보다 고개를 휙 돌려버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돌려 마주하게 된 상혁도 철식과 똑같은 전과가 있는 남자였기에.
“…풋.”
그것이 웃긴다는 듯, 유진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어 보이며 상혁과 철식 사이를 지나쳐 걸었다.
그건 예쁘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앳된 소녀가 보일 법한 얌전한 미소였고,
“차는 장식인가요. 들어가서 말려요.”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는 매도와 그것에 가려진 다정한 마음은 유진만이 보일 수 있는 개성이었다.
“요즘 애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편에 속하겠죠.”
그 특별함 덕분에 조금은 온화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걸 모르는 것인지.
눈치 없는 반응을 보이던 상혁과 철식도 유진을 뒤따라 주차된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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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소설 속 이야기라는 설정은 포기한 모양이네요.”
“….”
“참나….”
평소 같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이야기.
그런 허황한 이야기가 철식이 1년 동안 수사해도 풀어낼 수 없었던 사건을 해결하려 했다.
“…내가 일어날 수 없었던 이유, 그게 과거가 뒤바뀌는 현상 탓일 거라고?”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혹시 두통이라든지, 감각이 흐려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셨었나요?”
상혁이 비현실적인 현상을 알기 쉽게 묻자, 철식이 제 손바닥을 바라봤다.
그곳에 남아있는 흉터를 바라보면 상혁의 말을 미친 사람이 하는 소리라 취급하긴 힘들었던 것일까.
“그래, 그렇다고 쳐 보자… 당신이 시간 여행을 했다고 쳐 보자고.”
철식은 제게 쌓여있는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니, 자신을 설득시켜보라는 듯 호기롭게 질문을 이었다.
“그럼 그때 당신은 도대체 어디 있던 거지? 아니, 그 뒤로도. 이상혁 당신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었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
“저 역시도 지금 제 상황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리고 자꾸만 늘어지는 두 남자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유진.
그런 그녀가 조수석 시트에 기대었던 몸을 돌려, 뒤편에 앉아있는 철식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소설이 아니잖아요.”
“뭐?”
“현실에서 벌어진 소설 같은 일이니까. 그런 세세한 설정 같은 부분은 모를 수밖에 없겠죠.”
상혁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건,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알아내고, 과거를 어떻게 바꿔낼 것인지, 혹은 어떻게 되돌릴 것인지 논의하는 게 저희가 모인 이유일 테고요.”
과거를 직접 마주하고 변화를 일으킨 상혁도, 현지와 윤서의 사건을 조사했던 철식도 아닌, 이 사건과 아무 접점이 없을 유진이었다.
“지금처럼 쓸데없는 설전이 아니라.”
“….” / “….”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두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자,
유진은 다음 차례란 식으로 고개를 돌려, 상혁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또, 믿어주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는 건 이기적이니까, 믿게끔 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겠죠.”
단 몇 마디만으로 성인 남성 둘의 입을 틀어막은 유진.
그건 학생이 해낼 수 있는 수준의 상황정리나 훈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익숙한 모습에 다급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된 듯.
“…고맙다.”
상혁은 유진에게 감사를 표하고, 눈을 감아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말 그대로 순서의 문제.
설득은 타인을 존중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상혁은 제가 겪은 일들의 시작점이 아닌, 철식이 겪었을 일들의 시작점부터 설득을 시작해야 했다.
“…그날 마트에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던 이유부터 설명해야겠네요.”
“흥, 그때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전부 털어놨다면, 내가 당신 부탁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겠지.”
“네, 그래서 미룬 겁니다.”
“…뭐?”
“일단, 형사님이라면 제 부탁을 들어주실 거란 확신이 있었어요. 다만, 저한테는 형사님이 현지와 윤서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 때를 위한 대비책도 필요했고요.”
“잠시만, 설마….”
“애초에 마트에서 마주한 형사님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의 형사님을 납득시킬 기회가 생긴 거겠죠.”
두 번째 과거에서 상혁이 떠올린 수, 그건 철식에게 모든 일을 떠맡기는 계획인 것처럼 보였지만,
처음부터 실패를 예견하고,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견고해진,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을 최후의 대비책이기도 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최선 대신 차선을 택했다는 건가….”
“조금 다릅니다. 저 혼자선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 제겐 최선인 겁니다.”
“…살다 살다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고 있네.”
1년 동안 쌓인 고민이 해결되려 하자, 철식은 허탈하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반박할 자신이 없어진 것일 테지만,
마지못하다는 표정만큼은 사수하려는 것인지, 철식이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흥… 그래, 그 소설 같은 이야기에 속아볼게. 그래서 지금부터 어쩌려는 건데?”
“…우선, 그날 있었던 일을 듣고 싶습니다.”
과거가 전부 떠올랐더라도, 진실을 마주하지 못했기에 품게 되는 헛된 희망.
그것을 철식의 입을 통해 무너트리려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여자가 이윤서를 살해하고 자살했지.”
“…역시 현지였군요.”
“틀려.”
“네?”
“김현지가 아니야.”
“잠시만… 현지가 아니라, 그럼 설마 쌍둥이 자매를 말하는 건가요…?”
“이건 의외의 전개네요.”
철식의 발언은 상혁만이 아닌, 유진까지도 의아하다는 기색을 보이게 했다.
“언니가 아니었어, 애초부터. 그게 죽어가던 이윤서가 네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지.”
“….”
결국은 무너진 희망 탓이었을까.
상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철식이 긴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고,
“후… 얼굴로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일란성 쌍생아를 뜻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말을 토대로 수사를 시작했지만, 쌍둥이 자매에 관한 단서는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었어.”
그런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유진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보통 진료 기록을 얼마나 저장하죠.”
“…너 머리가 잘 굴러가네. 보통은 10년이야, 그 이상 보관하면 불법이고. 병원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폐기했겠지.”
“그럼 출생기록은 확인하지 못한 건가요, 하지 않은 건가요.”
“못 했어.”
“정부 기관에 저장된 자료가 아닌, 산부인과에 약식으로 기록되어있을 진료기록은요.”
“…마찬가지야. 참나, 사립 탐정 저리 가라네.”
“뭐, 30년 가까이 지난 기록이 남아있을 터도 없겠지만요.”
“김현지가 태어난 산부인과를 찾아내긴 했는데, 문제는 거기가 3년 전에 문을 닫았다는 점이었지. 거기까지만 확인했어도 이윤서가 남긴 말을 포기하든 배제하든 했을 텐데 말이지….”
“1년 동안 배제하지 못했다는 건, 그곳 말곤 이 사건을 수사할 길이 없었단 뜻이군요.”
“…맞아.”
“형사 아저씨한테 산부인과는 없다고 봐야 할 단서였네요. 하지만 이쪽 아저씨한텐 아니니까.”
“음?”
“슬슬 정신 차려주세요. 나설 차례네요.”
유진이 현재에 도달해 전부 풀어진 실타래를 다시 뭉쳐, 그것을 상혁의 손에 쥐여준 것이었다.
하지만 상혁은 끝끝내 어두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만 살짝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전부 이해했어. 되살리고 싶으면, 당장은 현지에게 쌓인 의문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거지?”
“아저씨한텐 그게 차선으로 느껴질 테지만, 제 눈엔 그게 최선으로 보여요.”
“…알겠다. 3년 전으로 돌아갈 물건도 있어.”
“그럼 결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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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언제라도 무너질 것처럼 허름한 건물로 들어서는 상혁.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만년필 한 자루.
그건 3년 전 과거와 상혁을 이어줄 물건, 현지에게 등단 기념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니까… 계속 가면 되는 거잖아… 조급해하지 말자….”
상혁이 계단을 오르며 자신을 다독여대는 건,
세 번째 과거에선 윤서를 구해내는 일을 잠시 멈춰야 한다는 새로운 계획 탓이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못 세웠을 계획.
상혁은 그런 계획을 세워준 유진의 말을 되새기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과거엔 되도록 짧게 있어야 해요. 짧게 머무를 수 있을 물건을 사용하라는 뜻이에요.’
‘여자 친구 씨나, 후배 씨는 되도록 피해요. 언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니까요.’
‘과거가 바뀐다고 해서, 아파하는 거 아무도 몰라주잖아. 그러니까 무리하면 안 돼.’
유진은 상혁이 과거로 향할수록, 과거가 바뀔수록 심해지는 두통을 걱정해주고 있었고,
‘형사 아저씨도 있으니까, 최악은 면할 수 있잖아.’
‘그리고 아까 말한 방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저씨라면 둘 다 되살릴 수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듣는 건 참 서럽네요. 오늘은 이만 갈게요.’
자신이 할 수 있을 최선의 응원으로 상혁의 어깨에 쌓여가던 무게감을 덜어주려 했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어느덧 7층에 도착한 상혁은 서둘러 복도 끝자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정면의 커다란 괘종시계와 그곳에 기대 서 있는 노신사를 마주했다.
“오셨군요. 들어오시죠.”
노신사는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 분위기를 보이며 안쪽의 방으로 향했고, 상혁도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뒤따랐다.
그렇게 책상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상혁은 집에서 가져온 만년필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걸로 과거에 갈 수 있을까요?”
“본디 의도와 걸맞은 물건은 아니군요.”
“…역시 전부 알고 계시다는 눈치군요. 네, 당장은 현지에 대해 알아낼 생각입니다.”
“과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알아보고 싶다… 흠, 새로운 국면이군요.”
“…그래서 갈 수 있을까요?”
“하루… 아니, 몇 시간 정도뿐이겠죠. 괜찮겠어요? 상혁 씨가 때를 놓치면, 시간이 상혁 씨가 바라는 미래를 앗아갈 겁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였죠. 인용을 좋아하시네요. 충고는 감사하지만, 이게 최선인 모양입니다.”
“뭐… 선택은 상혁 씨의 몫이지만요.”
“네, 이거로 할게요. 곧장 출발하고 싶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보답하듯, 노신사가 제 손 위에 만년필을 올렸다.
그렇게 시작된 몽환적인 현상.
만년필이 금빛 알갱이로 변해, 책상 위의 모래시계 안으로 흐르듯 담겼다.
“7시간입니다.”
그리고 노신사가 모래시계를 뒤집자, 그와 동시에 이곳에서 상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전보다 빠르게, 상혁이 세 번째 과거로 떠난 것이었다.
“세 번째 음….”
의미 없는 충고가 전해질 틈이 없어진 건,
상혁과 과거가 점점 더 빠르게 이어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애타게 바라는 미래를 써 내릴 것인지, 허상뿐인 과거를 마주할 것인지… 이것 참, 일이 예상보다 커진 듯한 느낌이군요.”
더 깊어진 과거가 상혁과 어울리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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