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9. 찾아가는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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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찾아가는 길(1)
[19년_11월_30일_토요일]
[02:10]
수많은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태엽 소리와 클래식 음악이 조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난무하지만,
그저 평온한 얼굴로 책상 위에 올려둔 모래시계를 바라볼 뿐이었던 노신사.
“슬슬 돌아오실 시간이군요….”
그런 그가 문득, 조금 난처하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의 턴테이블로 향했다.
엘피판에서 카트리지가 떼어지자, 태엽 소리가 전보다 선명해졌다.
노신사는 그것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도로 자리에 앉아, 비어있는 모래시계가 아닌, 비어있던 맞은편 자리를 바라봤다.
자리의 상태가 과거형이 된 건, 그곳에 익숙한 사람의 형체가 모여들기 시작한 탓.
상혁이 두 번째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윽…!”
흩어졌던 감각을 되찾은 상혁이 외마디 비명을 흘리곤, 한쪽 눈과 이마를 움켜줬다.
모습은 선명해졌지만, 그와 반대로 의식이 점점 흐릿해진 것일까.
고통을 호소하던 상혁의 몸이 옆으로 기울여지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씨가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상혁 씨는 나약하기 짝이 없군요.”
제대로 들린 것도, 초점이 잡힌 것도 아니었지만, 상혁은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느꼈을 것이었다.
노신사가 쓰러진 제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모습을.
물론, 그런 식으로 빈정대는 이유까진 이해할 수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 ▶▶▶
[14:00]
침대에 던져진 것처럼 엎드려 누워있던 상혁의 몸이 미약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작은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반나절 이상이 걸렸다.
의식이 끊어졌던 건 과거가 뒤바뀌며 생긴 두통 탓만은 아니었다.
2주일가량의 과거를 재구성해야 할 기억이 부여받은 시간이 단 몇 시간뿐이었기에.
그렇기에 과거에서 돌아온 상혁이 느낄 정신적 피로감은 몇 시간 기절한 정도로 해소될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상혁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무거운 몸을 돌려 누워, 또다시 익숙한 천장을 마주했다.
“여긴….”
서재가 아니라는 것에 당황한 것일까.
그게 아니면, 현재와 첫 번째 과거를 혼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상혁은 익숙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던 얼굴을 굳히며, 베개 오른편에 손을 뻗다 문득.
“어…?”
옷이 침대를 스치는 소리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던 모양인지, 제 몸 이곳저곳을 만져댔다.
회사에 다니지 않는 자신이 정장을 입고 있다는 게, 지금이 언제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상혁은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몸을 일으킨 뒤, 정장 안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방전되기 직전인 휴대전화기는 19년 11월 30일 오후 2시라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토록 많은 과거를 마주했건만.
현지의 기일에서 단 하루 지난 시간일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상혁은 아직도 휴대전화기를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 당장 윤서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지만,
달라진 게 없을 거라는 직감,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낙인처럼 새겨진 과거가 떠오르고 있었기에.
“….”
또다시 실패했다는 상실감에 이 방의 어둠이 더욱더 짙어졌고,
‘너 누구야?’
그와 동시에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상혁의 목을 조이듯 옭아매기 시작했다.
“아니야….”
하지만 침대 시트를 찢어질 정도로 세게 쥐어뜯는 상혁의 손은 밝은 미래를 붙잡고 싶을 것이었기에.
“또 가면 되니까… 다시 하면 되잖아….”
어두운 현실에서 일어나, 더욱더 깊은 과거로 향해야 했다.
상혁은 다시 한번 과거를 바꾸기 위해, 소중한 물건을 찾아내기 위해 거실로 나섰고, 그런 순간.
휴대전화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저장된 건 아니지만, 이제는 분명히 기억할 번호.
박철식 형사였다.
▶▶▶ ▶▶▶
[16:00]
새로운 기억이 선명할 것이었다.
유진의 조언을 따라도 윤서를 되살릴 수 없었고, 철식에게 과거를 맡겨도 현지를 막아낼 수 없었던 과거가 말이다.
또다시 실패했다는 상실감이 두 사람을 원망하게 했을 테지만,
정작 그런 둘에게 모든 일을 떠맡긴 게 자신이었기에.
두 사람을 원망해선 안 됐고,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도 이상혁 본인일 것이었다.
그렇게 제게 내려온 단 하나의 동아줄을 붙잡듯.
상혁이 철식과의 약속 장소,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맞으며 유진을 찾았던 카페 앞에 도착했다.
휴식이 부족했던 것인지, 상혁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상혁은 기운을 내려는 듯,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카페 옆 골목길로 들어섰다.
담배라도 피우며 착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고, 라이터 부싯돌이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바로 옆이 대로인데, 설마 아니겠죠.”
자신을 나무라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상혁이 그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교복 차림의 유진이 서 있었다.
“…정말 왔네.”
“약속했으니까요.”
상혁이 철식과의 약속 장소를 서로에게 쓸데없이 멀리 떨어진 현지의 본가 지역으로 정한 건,
[여기서 다시 만나요]
두 번째 과거에서 만난 유진이 제게 남긴 쪽지 탓이었다.
물론, 그런 짧은 문구 탓에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상혁은 자신을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이곳에 찾아왔지만,
“되게 바보 같은 표정이네요.”
이제는 자신을 놀리듯 조잘대는 유진 쪽이 조금 더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2년이야, 사실상 2년이 지났다고.”
“벌써 2년인가요. 아저씨 아니, 누군가에겐 어제 나눈 약속처럼 생생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찾아온 거 아니겠어요.”
“너도 참… 아니다.”
상혁은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말을 멈추고,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돌려 넣으며 골목길을 나섰다.
“그건 모욕죄.”
그렇게 카페로 들어선 두 사람.
유진이 카운터 위편의 메뉴판을 바라보며 조금 멍한 표정을 짓자,
“딸기 스무디?”
상혁이 제겐 얼마 전인 과거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건 조금 아… 조그마한 사이즈, 바나나 스무디로 부탁할게요. 순서가 꼬였네요.”
순서가 꼬였다는 이유 탓에 조금 더 어색하게 느껴진 말실수.
“음?”
그것이 의아하게 느껴졌을 상혁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유진은 이미 창가 자리로 향한 뒤였다.
“그래, 그래… 아, 여기 바나나 스무디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아메리카노 하나만 작은 사이즈로 부탁할게요.”
상혁은 이전과 비교하면 평범하게 주문을 마치고, 유진이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가 말했다.
“그때도 여기였는데, 기억력 좋네.”
“그래서 이야기는 어떻게 됐나요.”
“아….”
조금은 원색적인 질문에 상혁이 의도적으로 당황 섞인 목소리를 흘렸지만,
유진은 진지한 얼굴과 올곧은 눈동자로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다는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상혁은 유진과 나눌 대화에 사사로운 이야기로 시작점을 잡을 필요는 없겠다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줄래?”
“어째서죠.”
“곧 일행 한 분이 도착할 거거든.”
“그게 사담을 늘어놨던 이유였군요.”
“하하….”
상혁은 조금 멋쩍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유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현지를 빼닮았다고 생각했던 얼굴과 그녀와 비슷한 길이라 느껴졌던 단발머리.
마냥 둥글둥글한 것 같았던 얼굴과 눈매가 조금 날카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상혁이 조금 묘한 시선으로 유진을 바라보게 됐고,
“…왜요.”
“혹시 화장했니?”
유진은 그런 뜬금없는 질문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한참을 멍하니 보더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뇌를 다친 건가요.”
“…무섭게도 말하네. 아니, 그냥 인상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들어서.”
“전혀요. 2년 전 그날에서 변한 점이라곤, 그거뿐이겠죠.”
유진이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서 울리기 시작한 진동벨을 가리켰다.
“아, 가져올게.”
“…그걸 말한 게 아니고, 딸기에서 바나나 스무디라는 얘기였어요. 그리고 제가 가져올게요.”
“그거였냐… 됐어, 이번엔 내 차례지.”
상혁은 일어서려는 유진보다 먼저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앉히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 순간, 카페 출입문이 조금 사납게 열리고, 그 사이로 남자가 한 명 들어와 크게 소리쳤다.
“이상혁, 이상혁 어딨어!”
거칠게 열었던 출입문, 상혁을 부르짖는 날카로운 목소리.
철식이 도착한 것이었다.
현지와 윤서의 사건을 조사했던 철식은 상혁에 대한 감정이 그 누구보다 격양되어 있었을 테지만,
“…오셨군요.”
“….”
막상 제 앞으로 다가온 상혁을 마주했을 땐, 허탈한 표정만 짓게 될 뿐이었다.
“…자리를 옮기는 편이 좋으려나요.”
상혁이 카페 손님들의 시선을 살피며 말했지만, 그런 의연한 대처는 발화점이 될 뿐이었다.
철식은 이토록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상혁 덕에,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뎌진 분노가 다시금 차올랐고,
“꽉 깨물어….”
짧은 충고를 전하며 강하게 움켜쥔 주먹을 날렸다.
제아무리 윤서가 타인이었을지라도, 그녀의 죽음을 방관한 것 같은 상혁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뒤로 나자빠질 터였지만,
철식의 분노를 어느 정도 예상한 상혁이었기에.
“…나가서 하시죠.”
주먹질에 고개만 살짝 틀어진 채, 바닥을 내려보며 짧게 대답했다.
‘선배… 선배한테 커헉… 꼭… 전해야 해….’
‘언니가 아니었어… 애초부터….’
“도대체 당신들은….”
두 사람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철식이 이번엔 상혁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그날 이윤서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고 있어? 그 여자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널 찾았다고!”
“…나가서 하시죠.”
침착했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지만, 그런데도 입은 같은 대답만 전할 뿐이었다.
“하.”
점점 가열되는 상황에 짧은 한숨을 내쉬던 유진.
그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해, 카페 종업원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이거로 참아주실 수 있을까요. 이미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데, 한 번 더 저지를 것 같아서요.”
“네?”
유진은 상혁이 주문해준 바나나 스무디를 종업원에게 건네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부탁을 건넸고,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철식의 주먹이 다시 한번 어깨높이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상혁과 철식에게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각각 한 잔씩 뿌려졌다.
“….” / “뭐, 뭐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상혁과 철식은 자신들에게 커피를 끼얹은 유진을 바라봤고,
“너 갑자기 뭐 하는….” / “지금 무슨 짓을….”
“그건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이네요. 새로운 아저씨는 뭐 하시는 분인지 모르겠는데, 그거 일반 폭행은 물론이고, 영업방해죄에 포함되고도 남아요.”
제대로 따지지도 못한 채, 그녀만의 매도법에 다시금 멍해질 뿐이었다.
유진은 그런 둘을 뒤로하고, 이제는 비어버린 컵을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종업원에게 말을 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걸 닦고 가야겠지만, 저 두 사람은 무리일 것 같아요. 원칙상 제가 닦고 가야 맞는데”
“아, 아니에요. 상황이 커지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좋죠… 그리고 청소는 금방 하니까 괜찮은데… 그, 수건이라도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니에요. 수건은 아깝다고 생각되네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꼭 사죄하러 오겠습니다.”
여차여차 상황을 정리해낸 유진.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하지만, 당찬 모습의 그녀가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두 남자의 등을 떠밀며 카페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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