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7. 두 번째 과거(10) 꽃망울
* * *
#27. 두 번째 과거(10) 꽃망울
[18년_02월_17일_토요일]
[22:00]
두 번째 과거가 어느새 마지막 하루만을 남겨두고 있다.
‘첫 번째와 같군요. 이번에도 7일입니다.’
상혁이 과거에 머무를 수 있었던 7일.
그게 7일이라는 온전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저 7일이라는 기간을 뜻했던 것인지.
상혁은 정답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첫 번째 과거는 현지의 사망 추정 시간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끊어졌기에.
그렇기에 두 번째 과거도 현지가 마지막 편지를 받고 읽는 순간까지 이어지지 않고,
원래의 과거에서 마지막 편지가 적혀졌던 내일 아침에 끊어질 게 분명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예감 탓에 어두운 표정을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입 앞에 손을 모으고 불안에 잠기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된 것이었다.
상혁이 거실 소파에 앉아,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무기력하게 흘려보내고 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잖아… 이 정도면 분명….”
불안에 젖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지탱해주는 건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혼잣말뿐이었고,
“최소한 윤서는 되살아날 테니까… 당장은 그거면 된 거니까….”
그런 공허함 속에 홀로 서,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거짓말만 되뇌는 건,
혼자가 되어서야 마주할 수 있었던 자신의 이중성. 역겹기 그지없는 그 모습을 외면하기 위해서였다.
제아무리 3일 이상이라는 시간을 잃고 다급해졌더라도.
제가 했던 이중적인 행동들을 포장할 순 없었다.
제 탓에 죽은 윤서를 되살리기 위해 찾아온 과거에서 그녀를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현지를 되살리고 싶어했으니까.
그러고 싶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일을 철식에게 떠넘기고, 저는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이렇게 자위할 뿐이니까.
사랑이란 마음으로도 감출 수 없다던 거북한 기분.
그건 현지와 화해하고, 이번 과거에서 그녀까지 되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것과 동시에 시작된 기분.
상혁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제 모습을 말이다.
“하….”
상혁이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밝아진 주방에서도 변함없이 눈살을 찌푸리다, 아무 그릇을 집어 수돗물을 틀었고,
그것을 한 모금 마시며 뒤편의 식탁에 몸을 기대어 주변을 바라봤다.
제가 설거지를 한 덕에 물기가 남아있는 식기 도구.
현지가 샤워 중인 탓에 욕실 앞에 흐트러져 있는 실내 덧신.
누가 언제 담아둔 것인지, 생기가 돌아온 꽃과 투명한 유리 화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금이라는 과거가 끝나면 전부 사라질 풍경처럼 느껴질 것이었기에.
상혁은 제가 가장 바랐던 장면을 바라보며 절망할 뿐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절망하면서도 다음 과거를 생각해야 했다.
이번 과거가 끝나고 윤서가 되살아난다면, 현지를 되살리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윤서가 되살아난다면, 현지도 되살릴 수 있다는 뜻이 되니까.
하지만 점점 깊어지는 과거에서 현지의 죽음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도대체 어떡해야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인지.
끝없는 자문은 방황하는 칼날처럼 상혁의 마음을 무참히 베어댔고,
“뭐해?”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현지가 그런 마음을 헤집고 다닐 뿐이었다.
▶▶▶ ▶▶▶
[18년_02월_18일_일요일]
[00:00]
안방 침대에 누워, 상혁을 기다리고 있던 현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이젠 뾰로통한 표정도 무리라는 듯, 무거워진 눈가를 비비며 거실로 고개만 살짝 내밀고 말했다.
“열두 시 넘었는데… 안 잘 거야?”
“아, 응… 아직 할 일이 있어서.”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만 있으면서 할 일은 무슨 할 일….”
“그게….”
상혁이 현지와 밤을 보낼 수 없었던 이유.
그건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제 몸이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고,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생각하며 대답에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힘들게 화해했는데도 이렇게 미적지근한 거리를 유지하는 상혁이 미워진 것일까.
“알겠어.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해. 나 먼저 잘 게.”
현지가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지만,
“…잘 자.”
상혁은 이곳에 해가 뜰 때까지 멍하니 앉아, 같은 생각만 반복해야 했다.
도대체 어떡해야 현지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게 최선인 상혁의 마음을 알 수 없었던 현지.
그런 그녀에겐 오히려 상혁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기에.
“이 바보야!”
안방 문 옆에 기대 서 있던 현지가 거실로 나와, 상혁의 앞으로 다가가 조금 따지듯 소리쳤다.
“화해했잖아! 빨리 와서 팔베개해달라고!”
아무리 망설여지더라도.
사랑하는 여자가 이렇게 애교 섞인 모습을 보이며 팔을 잡아당기면 어쩔 수 없기 마련인 모양이다.
“…응.”
어두운 표정만큼은 풀지 못했어도, 상혁은 짧게 대답하며 현지를 따라 안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별다른 말 없이 안방에 들어선 두 사람.
현지는 형광등을 끄고 침대에 먼저 누워, 고개만 살짝 들었다.
얼른 제 옆에 누워, 그곳에 팔을 넣으란 뜻이었다.
바라는 바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모습에 상혁도 알겠다는 듯, 그곳에 오른팔을 넣으며 현지의 옆에 누웠다.
현지의 머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를 쫓아, 상혁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고,
상혁의 오른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를 쫓아, 현지의 어깨를 감싸 제 품에 끌어넣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참 예쁜 자세였다.
“…미안해.”
“나는 사랑해.”
제 품에 안겨 사랑을 고백하는 현지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기울어졌던 마음과 내려놓으려 수없이 노력했던 바람엔 어느샌가 무게감이 돌아와 있을 것이었다.
“현지야.”
“응?”
“…혹시 쌍둥이 자매 있어?”
상혁은 돌아올 대답이 초조했던 탓에 두 눈을 질끈 감자,
“응? 웬 동생?”
현지가 조금 맥 빠지는 반응을 보였다.
“어… 그, 일란성 쌍둥이라든지.”
“나 외동딸이잖아… 저기,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않아요?”
자신은 외동딸이라는 확실한 대답.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피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게 아니라, 얼마 전에 길에서 널 똑 빼닮은 사람을 봤거든.”
“정말? 적당히 닮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나였다고?”
“응.”
“말도 안 돼… 그럼 아까부터 거실에서 생각하고 있던 것도 그 사람이야?”
“어… 맞아.”
“…죽을래?”
“네?”
“나랑 헤어지자마자 날 닮은 다른 여자한테 한눈팔고 있었다는 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미워. 다시 거실로 돌아가서 그 여자 생각이나 열심히 하세요.”
현지가 상혁의 품에서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 빠져나와, 등을 돌려 누웠다.
“현지야…?”
“쿨.”
▶▶▶ ▶▶▶
[06:50]
현지의 잠버릇은 좋은 편이었고, 밤새 같은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상혁이 밤을 지새울 수 있었다.
몇 시간 전부터 온몸의 감각이 흐려졌을 테지만, 현지의 목에 깔려 절여오는 오른팔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며 현실감을 붙잡은 것이었다.
상혁은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하며, 곤히 잠든 현지를 바라봤다.
“….”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가 자살을 결심할 수 있다는 게,
이토록 가녀린 여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을 것이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현지는 여러 의미로 상혁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놓아줘야 하는 쪽은 그걸 가장 바라던 상혁이었다.
상혁은 현지의 머리를 살짝 들어 팔을 빼낸 뒤, 침대에서 내려와 현관으로 향했다.
두 발에 감각이 없는 탓에 이리저리 휘청였지만, 넘어지지 않고 바깥으로 나설 수 있었고,
그렇게 노란색 동이 트기 시작한 겨울의 아침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상혁의 눈엔 주변은 조금 어둡고,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을 테지만 말이다.
상혁이 비틀거리며 향한 곳은 집 앞에 주차해둔 차였다.
어디론가 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곧 사라질 몸을 이곳에 숨기려는 것이었다.
차 안으로 들어선 상혁은 시트에 몸을 기댄 뒤, 정신력으로 붙잡고 있던 감각을 전부 놓아줬다.
그리고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두 번째 과거에서 벌어진 일들을 떠올렸다.
다소 급하게 찾아왔던 과거였기에 윤서를 구해내는 방식도 급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비로소 윤서를 이번 사건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었다.
현지의 가족에 관한 의문을 놓아줄 수 있게 됐고, 쌍둥이 자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남은 불안은 전부 철식에게 맡겼다.
상혁은 창밖에 보이는 어렴풋한 달을 보며 소원할 것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불행이 담겨있지 않기를.
그렇게 두 번째 과거가 끝을 향해가는 순간,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잠시 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깼어…?”
[아, 그렇구나… 근데 다름이 아니라… 내가 정말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응?”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어. 그날 따라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잠결에 늘어지던 현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또렷해졌고, 당황한 상혁은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이상한 건 열쇠나 옥상 문뿐만도 아니었고. 그, 알려준 적 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어?]
“…지금 무슨 말을”
[아니다, 이게 아니지….]
“…뭐?”
[너 누구야?]
영하라는 온도도 느끼지 못했던 상혁의 몸이 일순간 느껴진 싸늘함에 굳어졌다.
그리고 그 질문은 상혁이 되레 묻고 싶을 말이었지만, 시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혁의 몸이 먼지처럼 흩어져,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두 번째 과거가 절실한 소원을 머금은 노란색 가로등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막을 내린 것이었다.
지금은 피어오르지 않을 꽃망울처럼 말이다.
▶▶▶ ▶▶▶
[일곱 번째 편지]
정말 고마워.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게 떨리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하다.
잘 할 수 있을까.
요즘 제대로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거든.
근데 말하는 건 편지처럼 고쳐가며 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두 번 다신 실수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편지는 이만 멈추고, 말하는 연습을 하려고 해.
이 편지는 숨겨 놓는 편이 좋으려나….
아무튼, 널 위해 연습해야 할 일이 생겼네.
참 좋다.
아, 방금 웃었어. 좋아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