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26화 (26/76)

〈 26화 〉 #26. 두 번째 과거(9) ­ 소화, 그리고 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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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두 번째 과거(9) ­ 소화, 그리고 발화

[18년_02월_17일_토요일]

[15:00]

분명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표현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지금 상황을 말이다.

‘봐, 모르잖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도대체 무엇을 모른다는 것이고,

‘…미워, 진짜 미워.’

어째서 화해를 바라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인지.

상혁은 그런 말을 하는 현지가 낯설게 느껴져, 이토록 쉽게 뒤바뀐 과거에 의아해하다가도,

‘차라리 과거를 크게 바꾸는 게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고 봐요.’

유진의 조언을 떠올리면 적당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상혁이었다면 이런 상황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의 상혁은 원래의 과거에서 서로가 화해했던 순간과 지금의 차이점마저 짚어볼 수 없었다.

그런 간단한 사고방식도 해낼 수 없게 된 건, 지금이라는 과거가 점점 익숙해져 가는 탓이었다.

두 번째 과거로 돌아왔을 때, 곧장 편지를 적지 않았던 시점부터 뒤바뀌기 시작한 과거.

그런 과거가 아무런 소리 없이, 원래의 과거가 새겨진 자리를 꿰차는 것이었다.

거기에 차이점을 짚어냈다 한들, 그 까닭은 지금의 상혁이 이해할 수 있을 부분도 아니었다.

과거가 서로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상혁과 현지.

그런 두 사람이 어느덧 동거하던 집에 도착했다.

상혁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주차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조수석에서 느껴지는 미약하면서도 빈번한 시선에 고개만 살짝 돌리고 입을 열었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야.”

집으로 돌아오던 길 2시간가량 이어졌던 정적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별과 화해라는 사건이 처음일 현지와 이런 상황이 조금이라도 더 익숙한 상혁.

대화를 이끌어야 할 쪽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 안 와도 괜찮은데….”

미래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과거에 능숙할 수 없었던 것인지.

상혁이 조금 어수룩하게 말하자, 현지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집 앞까지 와놓고? 인제 와서 돌아가라고?”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분위기에 휩쓸려 억지로 데려온 건 아닐까 싶어서 그렇지….”

“아니라니까.”

“응….”

“…점심은 먹었어?”

“안 먹었어. 너는? 아… 집에 있었으니까, 부모님하고 먹었으려나?”

의도가 다분하지만, 어색하진 않았던 질문. 꽤 자연스러운 추궁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도 안 먹었어. 조금 출출하네.”

물론, 현지는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제외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럼 뭐 먹고 들어가는 게 좋으려나…? 아, 인제 와서 말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한데… 부모님께 말씀 안 드리고 돌아온 거 아니야?”

“…괜찮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도 걱정하실 텐데….”

“문자 드렸어.”

낮아지던 목소리가 짧은 대답을 전하게 됐고, 상혁을 바라보던 고개도 어느새 창가 방향으로 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한 상혁이었기에, 이제는 확신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집에서 먹자. 내가 차려줄게.”

현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모님에 관한 질문은 이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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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

이곳은 상혁의 집이 아닌, 근처의 대형 할인마트.

‘일주일 만에 텅 비었네… 장부터 봐야겠다.’

상혁이 이곳에 홀로 찾아온 건,

텅 비어있던 냉장고나, 현지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청소를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당장은 상황을 정리할 혼자만의 시간이 갖고 싶었기에, 따라오려는 현지를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하….”

현지가 윤서를 살해했을 거란 생각.

그런 그녀가 제게 거짓말만 하는 상황.

사랑이란 마음으로 완벽히 감출 수 없었던 거북한 기분이 상혁의 얼굴에 드러나 있다.

물론, 그런 얼굴을 하고서 볶음밥에 들어갈 재료를 고르는 모습은 대칭이 안 되지만 말이다.

상혁은 바구니에 양파나 당근 같은 채소를 넣으며,

‘혹시 일란성 쌍둥이 자매 있어?’

‘등본에도 없는데, 있을 리가 없겠지.’

뱉을 수 없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여진 의문들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리고 볶음밥 재료를 고르며 헛된 희망을 내려놓는 상혁을 지나,

“아니, 어떻게 집에 라면밖에 없어요?”

“혼자 사는데 뭐 어때.”

조금 익숙한 목소리의 두 사람이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허구한 날 라면만 끓여 먹는 건 아니죠. 쉴 땐 쌀도 챙겨 먹고 그래야지.”

“네, 네….”

“그리고 평생 혼자 살게요? 됐고, 오늘은 제가 반찬 좀 만들어 줄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한쪽이 티격태격하려 해도, 다른 쪽에서 무기력한 반응만 보이니 균형이 잘 맞는 모습.

그런 모습의 두 사람이 끌던 카트가 채소코너 앞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 멍하니 서 있는 남자 탓에 길이 가로막힌 탓이었다.

“저기요.”

“아이참… 그냥 돌아가면 될 거 갖고… 그냥 이쪽으로 와요…!”

“아니, 길이 있는데 뭐하러 돌아가. 저기요, 길 좀 지나갑시다.”

그리고 그 익숙한 목소리에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아….”

상혁은 서둘러 주변을 살피다 코너 끝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고, 허리 숙여 사과하려 했지만,

흘끗 바라보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이 익숙한 것을 넘어, 분명히 기억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에…?”

당혹감에 벌어진 입에선 사과가 아닌, 멍한 반응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단순히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운명 같은 만남.

현지와 윤서의 사건을 조사했던 형사들을 마주한 것이었다.

상혁은 거짓말처럼 기막힌 상황은 둘째치고,

“얼른 가자니까…!”

“그래, 뭐….”

자신을 지나쳐가는 철식과 지은을 붙잡으려 했다.

“저, 저기요…! 잠시만요!”

“저희요? 왜요.”

“아니… 좀 부드럽게 말해요, 부드럽게! 왜 그러세요?”

“…박철식 형사님 맞으시죠?”

“음? 저 아세요?”

물론, 조금 더 깊어진 과거에서 두 사람은 이제 막 처음 만난 사이일 뿐이었기에.

철식이 되레 질문을 건네다, 지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모르는 분인데….”

“박철식 형사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여기서 하시죠.”

“중요한 이야기라 그렇습니다. 저쪽 구석진 자리 정도면 충분합니다.”

난데없이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한 것일까.

철식은 조금 멍해진 얼굴로 지은을 다시 한번 바라봤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별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그렇게 채소코너에서, 구석진 생선코너로 자리를 옮긴 상혁과 철식.

상혁은 자신이 허무맹랑한 부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올해 말, 11월 29일 목요일 오후 7시쯤에 사람이 한 명 자살합니다.”

“에?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걸 막아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꼭 막아주십사,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리고 당신,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있던 거죠?”

“…절차가 필요하다면 전부 이행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 지금 하는 말의 의미가 뭔지는 알아요? 당신 자살 신고가 아니라, 살인 예고하는 거로 보인다고.”

“…상관없습니다. 내일이 지나면 곧바로 체포하셔도 좋습니다.”

“하…?”

“체포당한다 한들, 상황을 형사님께 납득 시킬 자신이 없는 건 똑같을 테지만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부탁하는 겁니다.”

“…그래, 이유나 들어보죠. 그 사람이 11월 그날에 자살한다고 했어요? 관계는요?”

“죄송합니다.”

“….”

상혁의 계획은 단순했다.

현지가 자살할 순간에 박철식 형사를 끼워 넣어, 그 상황을 깨부수려는 것이었다.

현지가 자살하려는 원인, 발화점을 파악하는 데 무리가 있다면,

현지가 자살한 결과, 곁불이라도 수습해 보려는 것이었다.

박철식 형사가 있다면, 최소한 11월 29일에 자살하진 못할 테니 말이다.

거기에 윤서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만에 하나의 변수까지도 차단할 수 있었다.

그것을 확신한 상혁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 있던 신분증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11월 29일 오후 7시입니다….”

현지의 사망 추정 시간. 상혁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정확한 단서였다.

“…다 떠나서 하나만 물어봅시다. 도대체 제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던 거죠?”

“…죄송합니다.”

상혁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며 사과하자,

철식이 미간을 좁히며, 건네받은 신분증과 상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진 속에선 이토록 평범한 모습이지만, 지금의 초췌한 얼굴엔 불안만 담겨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괴리감에 호기심이 늘어져, 말도 안 되는 부탁에 어울려주겠다는 듯.

철식이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것을 상혁에게 건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여기 적힌 번호로 날짜, 시간, 주소 정확하게 보내세요.”

예고 살인을 할 멍청이는 세상에 없으리란 생각과 상혁이 진실을 외치는 것 같다는 형사의 감.

그것에 과거가 다시 한번, 새로운 미래를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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