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24화 (24/76)

〈 24화 〉 #24. 두 번째 과거(7) ­ 절실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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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두 번째 과거(7) ­ 절실한 고백

[18년_02월_17일_토요일]

[08:57]

거실 한복판에 나란히 누워 잠든 상혁과 윤서.

그런 두 사람의 눈꺼풀이 윤서가 켜놓고 잠든 형광등 탓에 조금 찌푸려져 있다.

그리고 그런 형광등 탓이었는지, 아니면 지난밤의 숙취 탓이었는지.

윤서의 잠꼬대는 오늘따라 유난히 심했고, 그렇게 주변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던 주먹이 결국.

상혁의 얼굴 한가운데에 명중했다.

“윽….”

상혁은 갑작스러운 얼굴의 통증 탓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습관적으로 이마와 관자놀이부터 매만졌고, 그대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이곳이 서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에?”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멍한 목소리를 흘렸고,

이어서 제 옆구리에 꼭 붙어 잠든 윤서의 모습을 발견하곤,

“에…?”

그런 목소리를 다시 한번 흘렸다.

“이윤서…? 네가 왜….”

잠든 윤서에게 묻는다고 한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본다 한들, 마땅한 이유가 떠오를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미뤄두고,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이곳에 얼마나 쓰러져 있던 것인지, 그런 시간이 또 얼마나 흘렀을 것인지.

이른 아침부터 어두운 조바심이 시작된 것이었다.

상혁은 휴대전화기를 찾아 제 주변과 윤서의 몸 근처를 살폈다.

그리고 그 작은 인기척이 선잠에 빠져있던 윤서를 깨어나게 했다.

윤서는 어딘가 어수선한 기분에 잠에서 깨어나, 한쪽 눈만 얇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런 시야에 아기자기한 인형들로 꾸며진 제 방이 아닌, 조금 낯선 천장과 상혁의 모습이 담기자,

그제야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는 듯.

“히익…!”

윤서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속으로 들이키다, 그대로 눈을 감고 몸을 뒤척이는 척 등을 돌려 누웠다.

그 덕분에 상혁에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출 수 있었지만,

“어떡해, 어떡해…!”

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입은 ‘어떡해’라는 입 모양으로 비명만 그려볼 뿐이었다.

거기에 시간은 윤서의 창피함을 한계까지 몰아세우려는 것처럼.

­ ♬

현관 입구 쪽에 내팽개쳐져 있던 휴대전화기에서 익숙한 피아노 전주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과 동시였다.

상혁의 눈엔 아직 자는 것처럼 보였을 윤서.

그런 그녀가 마치 진루에 성공한 야구 선수처럼. 제대로 일으키지 못한 몸을 현관 쪽으로 내던졌고,

­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가사가 한 소절 끝나기도 전에 알람을 끄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윤서의 억장은 피아노 전주가 울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무너져 내렸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 시간을 확인하려 했던 상혁에겐 소녀의 노래가 그저 알람만으로 느껴질 뿐이었기에.

“9시구나….”

흘려선 안 됐을 감상을 작게 중얼거렸고, 그것이 결국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넘쳐흐르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게 된 윤서는 살기 어린 눈을 뒤로 돌렸고,

“내가 죽는다고 했죠….”

그대로 상혁을 노려보며, 불만을 속사포처럼 빠르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냥 좀 넘어가면 어디 덧나냐고! 그리고 굳이 9시구나… 이렇게 중얼거릴 필요가 있어요? 하나도 없잖아! 아니, 그리고 중얼거릴 거면 들리지 않게라도 하던가! 내가 할머니도 아니고, 다 들린다고, 다 들려! 아악!”

“하하….”

윤서가 짜증을 잔뜩 부렸지만, 상혁은 작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미소는 시간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며 지어 보인 것이 아니라,

윤서의 짜증이 여느 때와 같은 투정처럼 보인 탓에 잠시나마 일상을 느끼며 지어 보인 평범한 미소였다.

“지금 웃음이 나와…?”

그리고 그런 일상을 막아서려는 것처럼.

상혁은 강해지는 두통을 한쪽 눈만 세게 찡그리는 것으로 버텨냈고, 그대로 소파에 걸터앉아 말했다.

“일단… 그래, 너 왜 여기서 자고 있던 거야?”

그러자 윤서가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현관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대답했다.

“일단은 무슨… 몰라요. 아 몰라, 아무것도 몰라.”

풀 수 있으면 한 번 풀어보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상혁은 그대로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그 손으로 이마를 괼 뿐, 구태여 되묻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다는 분위기를 보이니, 이왕 대화가 끊어진 김에 저릿한 시야를 닫고 싶어진 것이었다.

“…음?”

제 기분을 풀어줄 차례인데,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윤서가 현관 쪽으로 돌렸던 고개를 소파 쪽으로 옮겨 상혁을 바라봤다.

“뭐해요…?”

“어… 응….”

“아니… 도대체 뭐가 응 이야… 어디 아파요?”

“아니야. 그래서 왜 여기서 자고 있던 거냐고.”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며칠째 연락도 안 되고 그래서 한 번 와봤어요. 집에 콕 박혀 있으라고­”

“…뭐?”

“왜요.”

“방금 뭐라고… 아니, 며칠째라니…?”

“음?”

윤서는 상혁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가락을 구부리며 날짜를 셌고,

주먹 쥔 손과 엄지만 구부린 손을 상혁에게 내밀고 말을 이었다.

“월요일에 부탁했잖아요. 벌써 엿새나 지났네.”

그리고 상혁은 윤서가 월요일부터 구부린 여섯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다,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엿새라고…? 수요일이 아니라…?”

“오늘 토요일인데요…?”

자신의 귀나 윤서의 말을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상혁이 윤서에게 다가가, 그녀가 쥐고 있던 휴대전화기를 가로챘고,

“깜짝이야… 아니, 왜 그러는데요…!”

그렇게 마주한 화면엔 2월 17일 토요일이란 날짜가 적혀있었다.

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아침이라는 지금까지.

자그마치 3일 이상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시간 중 절반 이상이라는 시간이 사라진 것이었다.

“선배…?”

유진에게 조언을 얻고, 어찌 됐든 집으로 돌아와 교감 선생님의 진술을 다시 들었을 뿐인데.

이제 현지와 화해하고, 과거에 변화를 줄 차례였는데.

해낸 일도, 해야 할 일도 고작 그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이렇게까지 가로막는 것인지.

상혁은 억울에 악이 바쳤을 테지만, 그런 마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무너져 내리는 상혁의 눈앞엔 애석하게도 애꿎은 윤서가 서 있었기에.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절망이 자연스레, 윤서에게 화풀이처럼 전해지기 시작할 뿐이었다.

“응?”

“부탁했잖아… 나랑 현지 피하라고….”

“아니, 그건 11월에­”

“지금이 11월이 아니더라도… 부탁했잖아, 집에 있어 줄 순 없겠냐고….”

“참나, 내가 선배 말 다 들어주는 기계예요? 그럼 이유라도 제대로­”

“부탁했잖아!”

고요했던 거실에 상혁의 목소리가 아주 사납게 메아리쳤다.

흠칫 놀란 윤서는 몸을 뒤로 반 발짝 내뺐고,

상혁은 맥빠진 얼굴로 그런 윤서를 바라보며 제 말만 이어나갔다.

“그렇게 부탁했잖아. 간절하지 않아 보였어…? 난 정말 간절하게 부탁한 거라고… 나오지 말라고,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부탁했잖아…!”

상혁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건,

시간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무기력함과 윤서를 되살리는 일에 대한 불안감 탓도 있었지만,

“왜, 왜? 왜 말을 안 들어? 왜…? 도대체 왜…? 그날도 네가 내 말만 좀 들었으면… 그랬다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 됐을 거잖아….”

첫 번째 과거에서의 윤서는 제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기에.

거기서 시작된 죄책감을 지금의 윤서에게 내던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냥 좀 들어, 들어… 좀 들어 달라고… 부탁이라고… 제발, 이렇게 부탁한다고….”

사나웠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안쓰러울 정도로 애처로워져 있었다.

윤서는 어딘가 뒤엉킨 듯한 상혁의 모습에 점점 더 당황하게 될 뿐이었지만,

그저 선배이자 동료 작가일 뿐인 상혁에게 다가가, 그에게만 다정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약속 어겨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당장은 상혁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많이 화났죠. 나, 약속 어기는 사람 싫어하잖아, 근데 내가 그랬네. 엄청 나빴다, 그렇죠?”

그리고 그런 다정한 모습이 상혁의 죄책감을 더욱더 증폭시킨다는 것도 모른 채.

상혁이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어떤 사람으로 변하더라도.

그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다정한 여자로 남고 싶었을 윤서는 따스한 말만 이어갈 뿐이었다.

“약속 지킬게. 난, 11월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어. 당분간 외출도 자제하고, 오빠랑 언니도 되도록 피할게. 그니까 화 풀면 안 돼요? 조금 무서워서 그래요….”

“….”

떨지 않으려고 억지로 음을 낮춘 목소리와 제 옷소매를 꽉 붙잡은 두 손.

그것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끝없이 늘려대던 상혁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생각했다.

‘미래에서 왔다는 점이요. 이번에도 그걸 후배 씨한테 말해야죠.’

‘설마 그렇게 말했는데 찾아올 바보라는 설정은 아니겠죠.’

초라하고 추잡한 모습을 이렇게까지 보인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전부 다 털어놓는다면.

그렇다면 윤서가 현지의 자취방에 찾아오는 변수만큼은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을 확신할 수 없는 마음이 꼭 붙잡은 아랫입술을 놓아주지 않았고,

과거를 전하는 것이 점점 더 두려워졌을 상혁의 귓가로 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왔다.

‘가능하고 불가능하고 신경 쓸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터무니없을 정도로 처지를 꿰뚫린 탓에 어이가 없어진 것일까.

“하….”

상혁은 아랫입술을 놓치게 될 정도로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마른 침에 뒤섞인 핏물을 삼키고 나서야, 절실한 마음을 붙잡고 입을 열 수 있었다.

“전부 설명할 게.”

“정말…?”

“우선 앉자.”

“아, 잠시만, 잠시만. 제 말부터 들어봐요.”

“…응?”

“일단 제가 궁금한 것부터 전부 알려줄게요. 이거 전부 포함해서 설명하라는 뜻이에요.”

조금 전까지 보였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가려지려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윤서는 따로 정리한 건 아니지만,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온 의문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선은 월요일에 울었던 이유, 저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던 이유, 언니랑 헤어졌는데 절 찾아온 이유요.”

“알겠으니까­”

“그, 이제 시작이에요. 오빠는 관심도 없었던 로맨스 소설을 적으라는 이유랑 그 소설이 제가 쓰려고 했던 소설이랑 똑같은 내용인 건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으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던 건지.”

“…끝?”

중간중간 말을 가로채였는데도,

“당연히 더 있죠!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이유랑 11월에 두 사람을 찾아가선 안 되는 이유요. 아, 언니랑 헤어지고서 연락 안 한 이유도 궁금해요.”

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튀어나온 질문이 열 가지나 되었지만,

“그러게, 제 호기심을 알면서 숨겨요?”

“시작할게.”

비로소 과거가 새로운 방향으로 펼쳐지려 한다.

죽은 현지를 되살리기 위해 과거로 향했던 일도.

그런 과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일도.

마지막엔 현지에게 살해당한다는 것까지도.

머금을 뿐이었던 마음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전해지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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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편지]

편지가 드디어 사라졌다는 게 정말 홀가분했어.

누가 버렸을지도 모르고, 네가 가져갔을 수도 있겠지.

네가 편지를 읽었다면, 그럼 어떤 생각을 할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그래서 미친 척 문 두들기고 널 만나고 싶었는데, 참게 되더라.

어떻게 참았을 것 같아?

문 두들기려는 내 모습이 스토커 같았거든. 그래서 참게 되더라.

혹여나 네가 날 무서워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런 네 모습을 내 눈에 담게 될까.

그게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려웠어.

그래서 말인데, 전화나 문자도 괜찮으니까, 뭐든 좋으니까, 네 생각이 듣고 싶어.

내가 이렇게 반성하는 모습도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건 해선 안 될 일인 거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쓸 게.

그리고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네.

미안해.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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