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22. 두 번째 과거(5) 변곡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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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두 번째 과거(5) 변곡점
[18년_02월_13일_화요일]
[17:10]
날이 조금 일찍 어두워진 건 그저 흐릿한 하늘 탓이었을까.
“여기면 되겠어?”
“나쁘지 않네요.”
상혁이 유진을 데리고 근처 카페에 들어섰다.
그녀가 보수로 바란 게 의외로 평범한 마실 것인 탓이었다.
“그나저나 여러모로 명예훼손이네요.”
“응?”
“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제가 아저씨와 원조교제를 하는 여학생으로”
“야, 야!”
주변을 개의치 않는 유진의 목소리와 그것에 당황한 상혁의 반응이 카페 내부에 울려 퍼지자,
“저는 딸기 스무디로 할게요.”
시선 하나 오지 않던 둘에게로 내부 손님들의 이목이 잔뜩 쏠렸다.
“신경 쓰는 건 맞아…? 그리고 적당히 선생과 제자 정도로 보이겠지…!”
“애초에 둘러댈 가치도 없는 시선이지만요. 음, 저쪽 창가 자리가 좋겠네요.”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려 했을 테지만, 유진은 이미 창가 쪽으로 등을 돌린 상태였다.
상혁은 그런 당돌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묘한 시선이 느껴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고,
“주문하시겠어요?”
“아… 네, 딸기 스무디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씩 주세요. 스무디만 큰 사이즈로 부탁합니다.”
괜스레 심해지는 죄악감 탓에 주문을 빠르게 마치고 유진에게 향했다.
“당차다고 해야 할지… 요즘 학생들은 다 그래?”
“요즘 학생이 아닌가 보죠.”
“됐다, 됐어….”
조금 퉁명스러운 대답만 전하던 유진.
그런 그녀가 제 앞에 마주 앉는 상혁을 골똘히 바라보더니,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네요.”
“뭐가.”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생김새가 아니라 표정이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지금이 몇 월인지 헷갈렸던 건가 싶어서요.”
평범하다면 평범했을 놀림.
그것이 꽤 예리한 감상처럼 느껴졌을 상혁이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자,
“요즘 학생한테는 말하기 힘든 사연인가 봐요?”
유진이 처음으로 말꼬리를 올려 물었다.
“…드디어 의문문이냐.”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눈치가 없네요.”
“….”
낯익은 말투와 익숙한 지적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현지를 빼닮은 것 같은 생김새 탓이었을까.
상혁의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뿐만도 아니었다.
지금 유진이 무슨 사연을 궁금해하는 것인지, 그것이 제게 벌어진 사건을 뜻하는 것인지.
그렇다고 해서 이걸 전부 털어놔도 괜찮은 것인지, 그래도 괜찮을 것인지.
머릿속엔 무수하게 많은 의문이 차올랐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없을 것이었다.
“이야기가 긴 모양이네요. 음료 받아 올게요.”
유진은 생각에 잠겨 진동벨 소리도, 제 말에 대답도 못하는 상혁을 대신해 카운터로 향했다.
“이야기….”
정말 긴 이야기다.
차라리 말 그대로 이야기였다면, 그랬다면 이것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 테지만
“자, 잠시만… 이야기라고…?”
밑천에 단비가 내리려는 모양이다.
기발한 계획이라도 떠올랐다는 듯. 상혁은 입 앞에 손을 모으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라는 설정….”
유진에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털어놓는다면.
그 모든 일에 ‘자신이 쓴 글의 이야기’라는 부가 설정을 첨가한다면.
그런 설정이 있다면, 자신과 연이 없는 유진의 과거나 미래에 별다른 피해도 주지 않을뿐더러,
할 수 있는 일이 밑천을 드러낸 지금, 가장 필요한 객관적인 조언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상혁에게로.
“저희 집엔 커피가 많았던 것 같은데, 아저씨도 커피를 좋아하시나요.”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유진이 두 번째 질문과 받아 온 음료를 건넸다.
“고마워. 응, 달고 사는 편이야.”
“고민은 끝난 모양이네요.”
“괜찮겠다 싶네. 고민이 있긴 해서…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대서사시 같은 도입이네요.”
“어… 맞아, 글 이야기거든. 그거 마실 동안이라도 괜찮으니까, 조언 좀 부탁하고 싶어.”
“글 이야기라… 그래요. 어차피 궁금하다고 한 것도 제 쪽이고.”
“흔쾌하네. 그러면 각설하고 시작할게.”
“맞다, 저 거짓말하는 사람 되게 싫어해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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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
현지를 되살리기 위해 과거로 향했던 첫 번째 이야기.
그런 과거에서 자신을 도와주다 죽은 윤서를 되살리기 위해 더 깊은 과거로 향해야 했던 두 번째 이야기.
아직 진행 중인 일들이 소설이라는 부가 설정을 덧대어 전해지자,
“주인공이 바보 같네요.”
무뚝뚝한 감상평이 돌아왔다.
“하하….”
그래도 이야기라는 설정을 믿어준 것일까.
상혁의 말을 꽤 진지하게 들어준 유진이 턱을 괴고 자신의 휴대전화기 화면 상단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화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주인공은 지금이 몇 월이고,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저씨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건… 아, 작가는 글을 쓰다 보면 저도 모르게 제 성격을 인물한테 투영시킬 때가 있거든. 고쳐야지, 악습이야.”
유진이 다시 한번 예리한 감상을 전했지만, 이번엔 꽤 재치있는 답변을 내놓는 상혁이었다.
“재치 있네요. 그럼 남자 주인공은 앞으로의 계획, 해야 할 일에서 막힌 건가요.”
“응. 교감 선생님을 만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여기를 찾아온 거군요.”
“어… 자료 조사 같은 느낌으로.”
“알겠어요. 일단, 주인공의 계획은 후배 씨를 중점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놓치고 있는 점이 있네요.”
“놓치고 있는 점?”
“네, 미래에서 왔다는 점이요. 이번에도 그걸 후배 씨한테 말해야죠.”
“…그건 아니지. 그랬다가 과거나 미래가 어떻게 변할 줄 알고.”
“후배 씨를 살해한 사람이 누구든 간에 11월에 살해당하니까 찾아와선 안 된다고 해야죠. 설마 그렇게 말했는데 찾아올 바보라는 설정은 아니겠죠.”
“….”
“거기서 대답을 멈추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걸 떠나서 후배가 살해당한 이유를 알 수 없잖아. 만약”
“혼동하지 마요. 여자 친구 씨의 자살이 계획과 우발로 나뉜다 해서, 후배 씨가 살해당한 이유도 그 둘로 나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거기에 원래는 잘 살아있던 후배 씨잖아요. 당연히 우발적 살해를 당한 거겠죠.”
객관적인 조언을 얻고 싶었던 바람이 조금 매섭게 몰아쳤다.
둘은 사건을 마주하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상혁도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을 테지만,
제가 바랐던 희망을 잘라내는 단언에 열이 오른다는 듯, 조금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 그래, 솔직히 말할게. 윤서한테 그걸 말할 자신이 없어.”
“글 이야기 아니었나요.”
“…남자 주인공은 후배한테 제가 미래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싫은 거야. 만에 하나로 벌어진 변수가 후배를 죽였으니까.”
“이해는 되네요.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윤서를 되살리기 위해 찾아온 과거에서 현지에 관한 단서를 찾아다닌 어제가 떠오른 것일까.
상혁은 유진의 다음 말이 예상된다는 것처럼 그녀의 말을 끊고 대신 말했다.
“여자 친구가 범인이 아니길 바라는 희망… 그래, 그 헛된 희망도 붙잡고 있어. 여자 친구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쳐내질 못하는 거야. 하지만… 이번 과거에선 여자 친구가 아닌, 후배를 구해야 해. 그게 일 순위야.”
물론, 유진은 그런 초연한 반응도 무감각하게 바라보다 제 생각만 전할 뿐이었다.
“그러면 두 번째 과거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네요.”
“…어떤 점이.”
“당장은 후배 씨를 내려놓고, 여자 친구 씨가 죽지 않는 과거부터 만들어야겠죠.”
“절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후배부터”
“말 좀 끝까지 들어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고집쟁이시네요. 뭐, 그만큼 신중하다는 뜻이니 나쁘진 않지만요.”
묘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지금의 상혁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챌 수 없었고,
유진은 저도 모르게 보인 마음을 덮고,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봐요. 여자 친구 씨가 죽는 과거가 후배 씨를 죽이는 거잖아요. 거기에 후배 씨와 연을 끊을 순 없고, 후배 씨한테 미래를 전할 수도 없다는 거잖아요.”
“….”
“그렇다면 여자 친구 씨가 죽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후배 씨를 이 사건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겠죠.”
“단언할 수 없잖아. 여자 친구가 죽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도 후배가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단언할 수 있어요.”
“할 수 없어.”
“아니요. 할 수 있는데, 두려운 거겠죠. 후배 씨가 제 탓에 죽었기에 좌절했고, 그 탓에 죄책감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오고 가는 설전에 날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설전에 오히려 망설임만 늘어났을 상혁은 힘없이 고개만 숙이게 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여자 친구 씨부터 해결해야 해요. 후배 씨를 백번 천번 살려내도, 아저씨 말 따라 만에 하나라는 변수가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그건 간단하고 명료한 방법이지만, 죄책감이 상혁을 막아설 것이었고,
유진은 그런 마음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 조금 다정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네요. 쌍둥이 자매가 존재해야 할 텐데 말이죠.”
“이젠 없다고 봐야겠지….”
“아직 모르죠.”
“그랬다면 본가에서”
“본가에서 단서를 못 찾았다 해도, 그게 이웃집 아주머니가 거짓 진술을 할 이유가 되진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
“차라리 과거를 크게 바꾸는 게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고 봐요.”
“어떤 식으로?”
“여자 친구 씨를 만나서 화해한다든지요.”
“만나주지 않을 거야… 조금 크게 싸웠거든.”
“크게 싸웠다는 설정이겠죠.”
“아… 맞아, 그런 설정이야. 너무 깊게 빠져들었네… 하하.”
전부 들통 난 듯 보이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어려운 설정을 이어가는 상혁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지금 가능하고 불가능하고 신경 쓸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요. 뭐든 해봐야죠.”
“네 말이 맞네….”
반박할 수 없는 말에 기가 죽은 게 아니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도 계획하지 못했던 저 자신이 한심해, 또다시 고개를 숙이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상혁의 시선이 무릎으로 떨어지던 순간.
“너무 어렵네요. 주인공도 무척 힘들 것 같고”
상혁을 티 나지 않게 위로하던 유진의 목소리가 조금 부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고맙다. 은근 상냥한 구석도 있네.”
그녀의 얼굴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상혁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알겠어. 네 말대로 해볼 게.”
“…그럼 이제 가야겠네요.”
그러자 조금 갑작스럽게. 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을 돌렸다.
“에? 가야 해? 학원 갈 시간이야?”
“주인공은 이번 과거가 끝나면 언제로 돌아가는 거죠…? 19년…?”
“아, 응.”
“날짜, 날짜는요….”
“어… 그, 11월 29일. 아, 새벽 지났으니 이제 30일이겠네.”
“알겠어. 이건 저 가면 읽어요.”
그렇게 말하며 무엇인가를 끼적이던 유진.
“잠시만,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그런 그녀가 자신을 붙잡으려는 상혁의 어깨너머로 종이뭉치를 내던지곤,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 야, 유진아!”
부자연스럽지만, 한편으론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던 상혁이 서둘러 종이뭉치를 줍고 유진을 뒤쫓았지만,
바깥 어디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사도 못 했네….”
상혁은 유진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종이뭉치를 펼쳤다.
그리고 연락처가 적혀있으리란 생각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앞머리를 크게 쓸어넘기며 주변을 다시 살폈다.
“아니, 어떻게 만나자는 건데….”
종이 뭉치엔 짧은 글귀만 적혀있었다.
[여기서 다시 만나요]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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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편지]
어젠 네 집 앞에 그대로 남아있는 편지를 봤어.
당연할 거라고, 당연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현실을 막상 마주하니까 참 슬프더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 참느라 힘들었어.
겨우 세 통째인데, 별의별 말을 다 적고 있네.
기억나? 나 군대 있을 때 네가 보낸 편지들.
나는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네 모습이 참 예쁘게 그려져.
그런데 팬을 쥐고 편지를 썼다 지웠다 하는 내 모습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
이런 내 모습이 네게도 예쁘게 그려질 순 없는 걸까.
이젠 그저 욕심인 걸까.
닿지 않는다는 것이 이리도 슬픈 일인 줄 이제야 알았어.
오늘은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고, 네가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그런 기억을 나눌 수 있던 어제가 그립고, 그런 내일이 돌아오길 바래.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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