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20. 두 번째 과거(3) 최선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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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두 번째 과거(3) 최선의 늪
[18년_02월_12일_월요일]
[12:35]
“오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손목을 타고 흐르는 물의 냉기에 정신을 차린 상혁.
그런 그가 살짝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 아픈 거 맞죠…? 빨리 병원부터 가는 게”
“아니야… 덥다며, 이거 마셔.”
윤서의 걱정에 상혁은 애써 괜찮다는 얼굴로 물컵을 건넸지만,
이마와 관자놀이를 짚는 걸 관두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그, 아까 할 말 있다고 한 거 기억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안색 진짜 나빠 보인다니까요…?”
“중요해. 정말 중요한 일이야.”
“하… 알겠어요, 뭔데요. 말해봐요.”
“글에 관한 이야기야. 너 지금 연재 중인 소설 완결 코앞이지?”
“외전도 있어서, 그래서 못해도 서너 달은 더 붙잡고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갑자기 웬 글이요?”
“시기상으로 딱 들어맞긴 하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것일까.
윤서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다 들릴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되는 상혁이었다.
“네…?”
“아, 그게 내가 쓴 글은 아니고… 내가 쓸 글도 아니야.”
“그럼요?”
“네가 쓸 글이야. 네가 쓴 글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윤서가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식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가 써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어.”
그런 반응을 기다렸을 상혁은 첫 번째 과거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바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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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상혁은 윤서에게 자초지종은 털어놓지 않되, 그녀가 11월의 사건에서 최대한 멀어질 미래를 만들어야 했다.
오늘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그것을 망가트린 제게서 되도록 멀어지도록.
그것을 위해 상혁이 선택한 방법은 ‘이 여자, 그 남자’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전하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면 윤서가 11월에 자신을 찾아올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진다는 이론이었지만,
그 그럴듯한 이론은 차마 윤서와의 인연을 끊어낼 수 없는 나약한 마음에서 시작된 미련이었기에.
그저 소중한 관계를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자, 저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방법일 뿐이었고,
그렇게 윤서의 생사는 동전의 앞뒷면에 걸려, 알 수 없는 미래로 던져지게 된 꼴이었다.
거기에 동전을 던진 상혁조차도 이 길이 최선인지 차선인지, 최악인지 차악인지를 알 수 없었기에.
그렇기에 ‘이 여자, 그 남자’의 줄거리를 전한 뒤부터 지금까지.
“그… 있잖아요…?”
불안감에 휩싸여, 윤서가 말 거는 것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 생각의 늪에 잠길 뿐이었다.
미래를 예측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변수를 알아내고, 정리해야 했다.
“아까 그 이야기 어디서 들은 거예요…?”
윤서를 되살리기 위해 찾아온 두 번째 과거.
첫 번째 과거의 일을 외면하려 했지만, 마냥 그럴 수가 없었다.
상혁은 첫 번째 과거에서 제가 사라진 그 순간, 현지의 자취방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내야 했다.
그건 자신이 알아낸 변수도, 앞으로 알아낼 모든 변수도 그날로 이어지며,
“…저기, 제 말 듣고 있긴 해요?”
그것만 알아내면 벼랑 끝에 내몰린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란 확신 탓이었다.
“저기요!”
“어…?”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데요.”
“아… 미안, 뭐라고 했더라…?”
“됐어, 이제 슬슬 돌아가요.”
윤서는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지만, 당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향했고,
“이제 돌아가려고?”
“네… 할머니, 조만간 또 올게요.”
상혁도 그런 윤서를 뒤따라, 주인 할머니께 인사를 전했다.
“그,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요. 조심해서 가고, 다음에 윤서랑 같이 와요.”
“…네, 꼭 같이 오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윤서를 되살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듯, 허리를 반쯤 숙여 인사하는 상혁.
“할머니, 그럼 저희 갈게요!”
가까운 시일을 기약하듯, 손만 살짝 흔들며 인사하는 윤서.
내일을 기약하는 모습도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 그렇게 가게를 나섰다.
“….” / “….”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도 침묵이 당연한 일처럼 이어지자,
드디어 불만이 터진 윤서가 상혁의 소매를 세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아니! 도대체 오늘 왜 그래?”
“어? 아… 어, 그러게…?”
“도대체 그러게가 왜 나오는 거냐고….”
“미안….”
“하, 그래. 뭐가 미안한데요.”
“전부라고 말하면 혼날 것 같고… 괜히 거짓말 둘러대면 더 혼나겠지?”
“당연한 걸 물어.”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 건지.”
“에…?”
“그래도 하나는 알겠네. 다음에… 아니, 이번 겨울에 꼭 다시 오자.”
“대사가 너무 뒤죽박죽인 건 알죠…?”
“그러게. 그래도 아직 아홉 번 남았으니까….”
상혁은 살짝 웃으며 대답하다, 점점 멀어지는 분식집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고,
그런 난잡한 대사가 마냥 싫지는 않았던 것인지.
윤서는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도 발끝을 바라보며 걷다, 수줍어진 고개를 힘겹게 들고 물었다.
“…연재 끝나면 아까 말한 글 쓰라는 거 맞죠?”
“응, 그리고”
“조언도 받으러 가지 말고?”
“중간에 막혀도, 보기 좋게 완성해도”
“오빠 찾아가선 안 되고?”
“11월만큼은”
“11월만큼은 절대로 찾아가지 말고! 그 말만 열 번은 넘게 했어요! 주문이 너무 많은 건 알아요?”
불만을 토로할 차례를 새치기하며 기다리던 윤서가 입술을 빼쭉 내밀고 대꾸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는데, 11월만큼은 절대로 찾아오지 마. 나도 현지도.”
상혁에게선 같은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다시 한번은 무슨… 귀에서 피 날 것 같아….”
“그래, 차라리 올해는 외출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해?”
“저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안 될 건 없잖”
“없긴 뭐가 없어! 엄청 있거든요! 아니, 도대체 아까부터 뭐라는 건지… 지금 오빠가 하는 말 중에 제대로 이해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음… 그러면 다시 설명”
“아니야, 이해했어. 그러니까 그만. 진짜 그만….”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것 같았지만,
호기심이 많은 윤서의 마음엔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처럼 쌓여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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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더 많은 변수를 알아내고, 그날의 진상을 마주하기 위해 다시 찾은 이곳은 현지의 본가.
상혁이 그나마 멀쩡한 가운데 초인종을 눌렀다.
[네, 누구세요.]
“나야.”
[네?]
2층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상혁이었지만, 전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아? 어… 여기 현지네 집 아닌가요?”
[현지? 네, 아닌데요?]
“아, 죄송합니다. 주소는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아, 혹시 이거 3층 초인종 아닌가요?”
[응? 3층? 3층이요?]
“네, 아… 어쩌면 옆 건물이랑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잠, 잠시만! 제가 나갈게요!]
상혁은 첫 번째 과거와 사뭇 다른 방식으로 아주머니에게 접근했다.
똑같은 대화로 알아낼 현지의 정보는 더는 필요 없다는 판단 탓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집 아주머니가 현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편이 단서를 수집하기 용이할 거라는 예상 그대로였다.
아주머니는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와, 입구 철문을 열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 오라 했다고요?”
“김현지라고 하는데… 여기 3층에 산다더라고요. 여기 맞나요?”
“네, 네. 너무 오래전이라 이름도 잊고 있었네요. 근데 누구시라 했죠?”
“아, 저는 현지 친구고, 오늘 짐 옮길 게 있다 해서 왔어요.”
제가 바라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던 상혁이 조금 머뭇거리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이었다.
“…쌍둥이 자매 만나서 온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 안 했나 보네요. 초인종이 하나라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래, 쌍둥이도 있었지… 아무튼, 그래서 애들은 잘 지내나 봐요? 갑자기 집만 비워서 이상했는데.”
“네, 지금은 서울에 살아요. 저는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야겠네요. 그럼 이만….”
이 정도 증언이면 충분했던 것일까.
상혁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척, 귓가에 휴대전화기를 대고 아주머니를 지나치자,
“네, 뭐….”
아주머니 또한 이미 뒷모습을 보인 상혁에게 별다른 말을 잇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 없이 3층에 도착한 상혁은 아랫집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제야 뒤편의 난간에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그래, 쌍둥이도 있었지….’
“쌍둥이 자매라….”
첫 번째 과거라는 미래에서도, 두 번째 과거라는 현재에서도 똑같은 진술이 반복됐다는 건,
아주머니가 한 진술의 신빙성 높아졌다는 뜻이 된다.
쌍둥이 자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울었던 저울의 균형이 가지런하게 맞춰진 것이었다.
즉, 지금 당장은 어느 쪽이 진실인지 저울질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해진 것이었지만,
상혁은 그 팽팽한 저울에 바람이란 추를 올리고 말았다.
“만약, 쌍둥이 자매가 정말 존재한다면….”
쌍둥이 자매가 존재한다면.
윤서를 살해한 사람이 차라리 현지이길 바랐던 마음을 고칠 수 있기에.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현지의 본가에 들어가, 쌍둥이 자매의 단서를 찾아내야 했다.
‘본가에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숨겨놓은 열쇠 같은 건 딱히 없었고….’
상혁은 윤서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윤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곳을 살피고, 차이점이 있는지 짚어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시선이 복도 끝자락에 붙잡혔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탓에 생긴 좁은 공간. 그곳에 무엇인가가 놓여있었다.
상혁은 윤서가 저곳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고,
그곳에서 낡은 목재 신발장을 발견해냈다.
방치된 기간이 길었던 탓에 이음쇠 부분에 녹이 슬어 문이 삐걱거렸고, 그 내부엔 낡은 신발 몇 켤레만 들어있었다.
그것들을 전부 꺼내 살펴도 오래된 먼지만 날릴 뿐이었다.
“어쩐다….”
상혁이 체념하며 신발을 돌려놓는 순간이었다.
무엇인가 찰랑거리는 소릴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건 현관문과 어울리지 않는 작고 넓적한 열쇠, 자물쇠에나 쓰일 법한 열쇠였다.
그리고 그런 열쇠를 집어 드는 것과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옥상 열쇠…!”
윤서의 목소리가 마치, 상혁에게 과거를 마주하란 것처럼.
더 깊은 과거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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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편지]
매일 보던 얼굴이 이렇게 그리워질 수도 있구나.
그래도 하루는 흐르고 내일은 오겠지.
어제는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
우리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주방에 너와 내가 함께 있던 모습.
그걸 떠올리려 했는데, 언제부터의 기억이 익숙해진 것인지.
그곳에 홀로 있는 네 모습만 떠오르더라.
아니, 사실 그것마저 흐릿해.
내게 추억으로 포장된 이 집이, 네겐 외롭고 쓸쓸한 장소일 뿐이었단 걸 깨닫게 되니까, 그때의 내게 묻고 싶어.
‘같이 살자 했던 이유가 뭐야?’
근데, 지금의 나조차도 그 선택을 뒤집진 못할 것 같아.
너랑 함께라서 정말 행복했거든.
어제는 편지가 그대로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그게 당연할 것 같다.
내 잘못을 마주하는 게, 그런 행동만 해왔다는 게.
그게 정말 끔찍하게 후회돼.
그래도 마주해야겠지, 그래야겠지.
오늘은 조금이라도 사과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잘못을 전부 깨우치고 하는 사과는 아니지만, 그런 마음이 온전히 전해질 리도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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