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19화 (19/76)

〈 19화 〉 #19. 두 번째 과거(2) ­ 이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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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두 번째 과거(2) ­ 이질감

[18년_02월_12일_월요일]

[09:08]

좋은 향기가 나는 세면용품으로 샤워를 다시 하고,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간단한 화장까지 마치고 나서야 욕실을 나설 수 있었던 윤서.

그런 그녀의 눈이 상혁이 없는 거실을 방황하자, 소파에 앉아있던 윤서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 상혁이 네 방에 들어갔­”

“그게 아니지… 들어간 게 아니라, 돌아간 거지?”

“어… 음, 잘 모르겠네! 아구, 아침부터 피곤하네. 엄마는 방에 들어가서 쉬고 있으련다…!”

윤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방으로 도망치는 것 같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아닐 거야….”

전신에 드리우는 불길한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제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자신의 취미 용품과 책상에 엎드려 있는 상혁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

무엇인가가 끊어진 것 같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갈 길을 잃은 동공이 지나치게 흔들거렸고,

분홍색 커튼에 형광등 조명이 반사된 탓일까. 기초화장을 머금은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비명은 언제라도 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윤서는 책상 옆으로 다가가, 상혁의 어깨부터 흔들었다.

“저기요… 이상혁 씨….”

그건 최소한의 자초지종 정도는 들어주겠다는 아량을 베푼 것이었지만,

창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평온한 얼굴로 잠든 상혁에게선 그렇다 할 해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잔다고…? 이 상황에…?”

그런 현실도 믿을 수 없었던 윤서.

그런 그녀가 어깨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상혁의 얼굴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곤 상혁의 눈앞에서 손을 살살 흔들었다.

“진짜 자요?”

상혁은 정말 깊이 잠든 상태였고, 윤서는 그런 상황이 어이없었을 테지만,

“하… 일어나기만 해봐… 진짜 죽었어….”

그래도 당장은 일보 후퇴라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침대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

익숙한 피아노 전주가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컥.”

예쁜 가사까지 시작된 건 아니었지만, 윤서는 순식간에 침대로 몸을 던져 알람을 껐다.

설마 싶어 확인한 시간은 09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아.”

윤서의 입에서 다시 한번 짧은 탄식 흘렀다.

그건 알람은 9시에 울리고, 거기서 끝나게 설정되어있는 탓이었다.

그런 알람이 9시에서 10분이나 지난 지금 울렸다는 건,

누군가 주인 없이 울리는 알람을 확인하고 그것을 대신 해결해 줬다는 뜻이었다.

윤서는 소리 없이 벌어지는 입을 양손으로 가리며 상상했다.

책상에 엎드려 세상 편히 자는 저 남자가 알람 소리를 듣고 당황하다, 적당히 아무 버튼을 눌러대는 장면을.

그리고 아무렇게나 눌린 건 알람 연기 버튼이었고, 그런 복선이 지금이 되어서 회수되었다는 것을.

입을 가리던 손은 어느새 볼까지 올라와 있었고,

윤서는 문득,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옅은 화장 기운을 느꼈다.

갑자기 일어나 샤워를 하고, 하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화장까지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것인지.

“어째서…?”

인제 와서 잠든 상혁을 쏘아본다 한들, 해소되지 못할 부끄럼만 한없이 늘어질 뿐이었다.

▶▶▶ ▶▶▶

[11:00]

온몸을 짓누르는 해야 할 일이라는 중압감 탓이었을까.

“하윽…!”

어두운 시야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 상혁.

그런 그가 눈을 뜨자마자 찾아오는 두통에 인상부터 크게 찌푸렸다.

“선배!”

그리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던 윤서가 그런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침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요? 땀도 엄청나게 많이 흘리던데…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윤서는 잠든 상혁을 위해 스탠드 조명조차 켜지 않았지만,

상혁은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흐릿한 햇빛도 부담이란 듯, 이마와 눈을 가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야?”

깨어나고 뱉은 첫 마디에 불안이 젖어있었다.

“이제 열한 시… 아니, 어디 아픈 거 아니에­”

“날짜, 날짜는!”

그리고 시간만으로 안도할 수 없었을 상혁이 몸을 황급히 일으키며 소리치자,

윤서가 그런 몸을 밀어, 도로 눕히며 대답했다.

“…무슨, 여기서 이틀이라도 잠들었게요?”

“하….”

상혁이 한숨만 내쉬자, 윤서는 그의 머리맡에 놓아둔 작은 대야와 물수건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요.”

“아니야… 근데 내가 왜 침대에 누워있는 거야? 분명 잠시 책상에 앉아있었는데….”

“잠시는 무슨, 세상 편히 자더니! 나도 할 일이 있는데, 거기서 자고 있으니까… 그래서 여기로 옮겼죠.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되려 불만이에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윤서가 잠든 상혁을 쏘아보고 있을 때.

윤서는 상혁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잤으면 하는 마음에 그를 침대로 옮겨 눕혔다.

거기에 몸무게가 크게 차이 나는 탓에 한참을 낑낑거리며 옮겼는데, 그것이 불편하지도 않았는지.

상혁은 좀처럼 깨어나질 않았다.

그렇기에 윤서는 상혁이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면 아침부터 보였던 불안한 모습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생각했고,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상혁을 걱정이라는 명목하에 간호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시간가량이 흘러, 지금이라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었다.

“미안….”

“아니! 됐고, 진짜 아픈 거 아니죠?”

상혁은 두통에 찌푸려진 미간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뒤, 침대에서 내려와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 그나저나 네 방 처음 들어왔는데, 이렇게 침대까지 쓰고… 엄청 실례했네.”

그리고 윤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하는 상혁의 모습에 잊고 있던 창피함이 몰려와,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했네요. 그, 그래서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찾아온 건데요.”

“….”

이유야 단순했다.

지금이란 과거에 살아있을 네 모습을, 그 모습을 눈에 담아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그런 마음을 전할 수 없는 상혁은 대답에 뜸을 들였고,

“에휴….”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예상한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그란 형광등을 켜고 말을 이었다.

“옮기느라 힘들어 죽을 뻔했어요. 왜 이렇게 무거워?”

거기에 자신의 노고를 알아차려 달라는 듯, 손목도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미안….”

“미안한 게 그렇게 많으면, 음… 그래, 밥이나 사요 슬슬 배고프다.”

“어…?”

“이제 곧 점심시간이잖아요. 아, 약속 있어요? 언니랑 데이트? 연휴 기간이라 휴가라도 썼나…?”

상혁은 대답을 한참 망설이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음….”

어두운 표정이 현지라는 이름에서 시작된 걸 알아차린 것일까.

“혹시 돈 없어서 그래요? 오빠 지갑 사정은 내가 잘 아는데… 그럼 뭐지?”

윤서가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척 말을 돌려줬지만,

“…미안. 다른 약속이 있어.”

그런 상냥함을 눈치채지 못한 상혁은 평소처럼 미끼를 덥석 물고 말 뿐이었다.

“풉… 기껏 나온 게 그거예요? 오늘은 안 속아 줄 거니까, 일단은 나가요.”

“….”

어떤 일이 있어도 거절해야 했다.

상혁은 윤서를 되살릴 방법을 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할 계획도 준비된 게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유일한 계획을 위해 그녀와 거리를 둬야 했다.

윤서를 구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녀와 연을 끊을 각오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난처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던 상혁이 윤서의 시선을 피했고,

“어…?”

그런 장소에 놓인 책상을 바라보다, 일순간에 머리를 스치는 계획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날 찾아왔던 이유….”

우선, 윤서가 자신을 찾아왔던 이유는 ‘이 여자, 그 남자’라는 글의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걸 지금 알려주면….”

그리고 아직은 창조되지 못했을 그 이야기를 지금 직접 전해준다면,

윤서가 11월에 자신을 찾아올 미래가 없어진다는 가설이 하나의 이론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뭘 알려줘요?”

이보다 좋은 계획도, 이 이상 좋은 수도 없으리라 확신한 것일까.

어두운 표정으로 망설이기만 했던 상혁이 이제는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자.”

“응?”

“밥 먹으러 가자. 바로 출발할까?”

“아니… 갑자기 이렇게 흔쾌하다고?”

“응, 할 말도 있고. 뭐 먹고 싶은 건 있어?”

“저기… 선배 오늘 엄청 이상한 거 알아요? 아니, 그리고 일단은 나가라고요!”

더는 부끄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었던 윤서가 상혁의 팔을 잡아당기며 방에서 내쫓자,

조금 커다랬을 소란에 윤서의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꽤 오래 있었네?”

“아… 제가 깜빡 잠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잠들었다고? 설마 둘이­”

“아, 엄마! 이상한 소리 좀­ 아니, 선배, 그냥 빨리 나가죠.”

“으휴, 싱겁긴. 맞다, 딸 취미가 독특­”

“꺄아악! 빨리 나가라고!”

윤서는 적당히 넘어가나 싶었던 취미가 튀어나오자, 집 안이 떠내려갈 정도로 비명을 질렀고,

“어… 그게­”

상혁의 대답 또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으로 끊어냈다.

“급하다, 급해! 그래서 둘이 나가려고? 그런 걸 요즘 말로 뭐라 하더라…?”

“아, 이상혁!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나가라고!”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윤서에게 등을 떠밀리던 상혁이 힘겹게 인사를 전했지만,

“고생이 많아. 딸 성격이­”

­쾅

돌아오는 인사는 끝까지 듣지 못하고, 결국은 집 밖으로 쫓겨나게 된 상혁이었다.

물론,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말이다.

곧이어, 서로의 신발을 챙겨 현관 밖으로 나온 윤서가 구두를 신으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요. 말 안 하려 했는데, 오늘 내 방에서 본 거 전부 잊어요. 한 번이라도 언급하는 순간… 선배는 그날 내 손에 죽는 거예요.”

거기에 가녀리지만, 살기만큼은 분명한 주먹도 상혁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조심할게….”

“자, 자! 그럼 이제 표정 풀어요. 사실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렇죠?”

“에…?”

“그렇죠?”

“아…! 응, 그렇지…!”

온도 차이를 따라가기 힘들었을 상혁이 버벅대자, 윤서가 살기 가득한 미소를 풀고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차 끌고 왔어요?”

“갑자기 차는 왜?”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아… 떡볶이?”

두루뭉술한 대답에 자연스러운 질문이 더해지자,

심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윤서가 상혁을 멍하니 바라봤고,

“요즘 연재하느라 못 갔을 거 아니야. 괜찮네, 거기로 가자.”

그렇게 자연스러운 말이 한 번 더 이어지자,

“네… 뭐….”

뾰로통했던 얼굴은 또다시 분홍빛으로 물들게 될 뿐이었다.

▶▶▶ ▶▶▶

[12:30]

높은 건물이 없는 대신, 낮은 건물이 촘촘하게 밀집된 도시 외곽.

그리고 그 안쪽의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길을 나란히 오르는 상혁과 윤서.

두 사람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언덕 끝자락에선, 윤서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보인다! 빨리 가요!”

아직은 상혁의 시야에도 안 보이는 그곳이, 윤서에겐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

잔뜩 신이 난 윤서가 상혁의 소매 끝자락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그렇게 분식집 입구에 도착하자, 윤서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고,

“그렇게 좋냐….”

티가 나지 않게 숨을 고르던 상혁은 입구에 달린 종을 떠올리며 출입문을 살며시 닫았다.

“할머니!”

“어머, 윤서니?”

윤서의 목소리가 조금 크게 울려 퍼지자, 주방에 계셨던 주인 할머니가 밖으로 나와 팔을 벌렸고,

윤서가 그 품에 쏙 들어가 애교를 부렸다.

“건강히 계셨죠? 죄송해요, 자주 와야 하는데….”

“암! 잘 있었지. 그리고 괜찮아, 한창인 나이잖니.”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목소리는 정정한 건강 상태를 의미하듯 또박또박 울렸다.

“그래서 이쪽은?”

“아, 안녕하세요. 이상혁이라고 합니다.”

“…인사가 뭐 그렇게 길어요!”

상혁의 소개가 괜스레 부끄럽게 느껴진 것인지.

윤서는 상혁을 제 등 뒤로 살며시 가리며 말을 이었다.

“나, 어제부터 한 끼도 못 먹었어… 배고파요….”

“으이구, 부끄럼 많은 건 여전하네. 그래, 그래. 가서 앉아있어. 얼른 만들어줄게.”

“아… 할머니…!”

눈치 빠른 할머니가 주방으로 돌아가자, 투정을 부리던 윤서가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 더워….”

“바보. 그렇게 뛰었는데, 당연히 덥지. 우선 앉자.”

“바보는… 아니다, 큭큭.”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바보라 생각하며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몇 초 이상 마주 본 것도 아닌데, 그것이 몇 분처럼 느껴졌을 윤서.

“아, 왜 이렇게 덥지…?”

그런 그녀의 부채질이 조금 더 격해지자, 그것을 정말 더위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상혁이 ‘물은 셀프’라는 안내판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방 입구로 향해, 컵에 찬물을 담으며 정수기 위에 달린 안내판을 바라봤다.

그곳엔 ‘물은 셀프’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음…?”

하지만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상혁은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고,

이내 흐릿하게 느껴지는 시야에 고개를 살짝 비틀거렸다.

익숙한 문구가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었고,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로 언덕을 오를 수 없는 탓에 자연스레 찾아간 유료 주차장도,

언덕을 오르며 마주했던 아름다운 도시 전경도,

입구에서 들었던 요란스러운 종소리도,

거기에 윤서가 가장 소중히 여긴다고 했던 이 분식집까지도.

그것들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던 것처럼 낯설게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이 분식집에 오늘 처음 온 사람처럼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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