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 두 번째 과거(1) 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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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두 번째 과거(1) 원점
[첫 번째 편지]
글 쓴다는 사람인데, 이 만년필마저도 참 오랜만에 쥐는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이젠 말로 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네.
어떤 말을 해도 인제 와서 뭐하자는 건가 싶고, 꼴사납게 보일 뿐이겠지.
적어도 나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여. 또 그렇게만 보일 것 같아.
하지만 그래도 매일 편지를 적고, 너희 집 앞에 놓고 가려 해.
마냥 널 붙잡으려는 수단이라 생각하고 적는 편지는 아니야.
물론, 이 편지를 네가 읽지 않는다면 이 또한 우리가 헤어지던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어가겠지.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내일 이 편지가 집 앞에 그대로 남겨져 있을까, 그게 정말 두렵다.
그리고 네가 이런 기분을 얼마나 긴 시간 느껴왔던 건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나쁜 모습을 고치지도, 고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던 내가 얼마나 밉고 싫었을까.
내가, 그리고 내가 적는 이 편지가 참 밉다.
편지지는 벌써 다 차가는데,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네.
사랑해, 그래서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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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_02월_12일_월요일]
[07:30]
상혁과 현지는 헤어졌다.
그건 현지의 결정으로 이뤄진 결과이지만, 상혁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었다.
상혁은 자신의 문제를 뒤늦게 알아차렸기에, 그런 결정에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별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가장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무너져내린다는 게 이리도 슬픈 일인지 몰랐고,
그것을 방관해온 자신을 죽도록 원망했다.
상혁에겐 자신의 문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생각나는 것들을 편지에 적고, 그것을 곧바로 현지의 자취방 앞에 두고 돌아왔다.
관계를 돌리고 싶다는 미련보다, 제 잘못을 마주하는 반성이 담긴 편지였다.
그리고 지금, 상혁이 그런 이야기가 담긴 편지들을 바쳐 두 번째 과거로 돌아왔다.
두 번째 과거는 노신사의 충고대로 상혁에게 강한 두통을 선사하며 시작됐고,
“윽…!”
그런 고통 속에서도 주변부터 살피는 상혁의 눈엔 첫 번째 과거와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익숙한 천장 아래가 아닌, 서재 책상 앞이었다.
그건 첫 번째 과거가 현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던 침대 위에서 시작된 것처럼.
두 번째 과거 또한, 상혁이 편지를 적었던 시간과 공간, 취했던 자세까지도 전부 똑같이 재현되어 펼쳐진 것이었다.
“….”
원래의 상혁이라면 과거가 서재에서 시작된 이유를 짐작하려 들었을 테지만,
지금의 상혁은 그러지 않고, 주변을 뒤적거리며 휴대전화기부터 찾았다.
“2월 12일….”
그리고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며 원래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세게 저어댔다.
원래의 과거 속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그런 과거로 찾아온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달라진 탓이었다.
아직은 비어있는 편지지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만년필.
그런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상혁이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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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0]
2월이라는 달은 확인했지만, 겨울이라는 계절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인지.
상혁의 얇은 옷차림은 아파트 난간을 타고 불어오는 쌀쌀한 겨울바람을 막아주질 못했다.
본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얇은 외투에 넣어뒀던 손을 꺼낼 시간.
“….”
상혁이 두 번째 과거에 오자마자 찾아온 이곳은 윤서의 집.
대부분을 유지하려 했던 첫 번째 과거와 달리, 두 번째 과거는 시작부터 뒤바뀌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혁은 윤서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는 현관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이제는 짧은 음성이 아닌, 발신음이 들려오는 탓이었다.
“제발… 제발….”
그런데도 불안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을 상혁이 제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려 했고, 그런 순간.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작게 울려왔다.
“하….”
상혁은 귓가를 맴도는 그 목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고 뒤편의 난간에 몸을 기대었고,
[어… 선배네…?]
이제 막 잠들었던 윤서는 상혁을 선배라 부르며 말끝을 늘일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게 된 윤서가 말을 이었다.
[뭐야, 왜 말을 안 해요….]
“미안해… 미안….”
[갑자기 뭐가요… 아침부터 장난치는 거지…? 나 방금 누웠어요… 피곤해….]
“잠시만 나올 수 있어? 잠깐이면 괜찮아… 잠깐만 보자.”
[갑자기 나오라니… 에? 아니, 잠시만… 뭐, 뭐라고? 나오라고요? 지금 집 앞이야?]
“응.”
[잠, 잠시만요!]
아직 모습을 보인 건 아니지만, 윤서의 얼굴엔 ‘나 지금 당황했어요.’라고 적혀있을 것만 같았다.
현관문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열렸고,
윤서가 그런 문 틈새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 바깥에 서 있는 상혁을 확인했다.
“헐… 진짜 왔어….”
그리고 상혁의 눈에도 그런 윤서의 모습이 담겼다.
“….”
얼마나 걱정하고 후회했는지, 얼마나 무서워하고 미안해했는지.
그런 잘못을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에 얼어붙었던 감정이 녹아내린 것일까.
상혁은 매일같이 이마를 짚어대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에…? 잠시만, 지금 울어요?”
그렇게 손바닥을 타고 흐르던 감정이 바닥에 떨어지자,
윤서가 다급히 현관 밖으로 뛰쳐나와, 상혁의 목에 손을 걸고,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까치발 모양의 두 발은 제 민낯을 신경 쓰며 바닥을 동동 구르고 싶었을 테지만,
상혁을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 더 강했던 것인지.
“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여기 있으니까 불안해하지 마요. 괜찮아요.”
윤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도,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남아있어도.
당장은 상혁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려 할 뿐이었다.
“….”
그리고 그런 품에 안겨있던 상혁은 윤서의 어깨를 붙잡아 떼어내,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윤서였다.
제 탓에 죽은 윤서가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숨 가빴던 감정에 여유가 생기자, 그것을 지탱하던 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었을까.
“다행이다, 다행이야… 되돌릴 수 있어… 되돌릴 수 있다고….”
상혁은 그렇게 말하며 윤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
그러자 윤서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상혁의 얼굴을 살피며 걱정하듯 물었지만,
“이거면 된 거야… 지금은 이게 최선일 테니까….”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중얼거림만 돌아올 뿐이었다.
“음…?”
“이만 돌아갈 게….”
“에…? 간다고요?”
아직 되살릴 방법을 정해낸 건 아니지만, 상혁은 윤서와 거리를 두려 했다.
윤서는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와도 상냥하게 대해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 여자이기에.
거리를 두지 않으면 또다시 같은 과거가 반복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짜 간다고…?”
윤서는 그런 옆모습, 이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떨떨한 표정만 지어 보였고,
힘없이 보여도, 윤서의 목소리론 붙잡을 수 없었을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던 순간,
“누구 왔니?”
아침부터 벌어진 소란에 현관 밖으로 사람이 한 명 더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익숙한 목소리가 상혁의 발목을 대신 붙잡았다.
“어머, 상혁이구나!”
윤서의 어머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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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5]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거실에 상혁이 덩그러니 앉아있다.
곧장 돌아가려 했던 계획이 틀어진 것이었다.
“뜨거우니 조심히 마시렴.”
그리고 주방에서 차를 내리던 윤서의 어머니가 상혁에게 다가와 찻잔을 건넨 뒤,
그 안에 담긴 차의 온기만큼 따스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면 아줌마가 잔소리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하다 하려고? 전혀, 그리고 애초에 상혁이라면 아줌마도 윤서도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죄송합니다.”
“으이구, 못 말려… 상혁이 너는 남 챙기는 만큼 자신도 챙길 줄 알아야 한다니까.”
윤서의 어머니는 상혁에게 받았던 고마운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지만,
“죄송합니다….”
그런 말에 죄책감만 늘어졌을 상혁은 사죄만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자주 왔으면 좋겠는데? 집은 나 몰라라 하는 윤태보다 훨씬 아들 같고!”
“아… 윤태 이번에 자취 시작했죠….”
“응. 자취하고 싶다고 그렇게 외쳐대더니, 조교 되자마자 홀라당 나가버리더라.”
“….”
이번엔 윤태의 얼굴이 떠올라, 말을 잇지 못하는 모양이다.
“음… 근데 윤서 얘는 아까 새벽에도 씻었으면서 왜 또 씻어? 평소엔 잘 씻지도 않으면서… 얘!”
[아, 엄마! 이거랑 그거랑 다르다고 했잖아!]
거실과 붙어있는 욕실 문에서 윤서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쯧….”
“그, 늦은 시간까지 글 썼을 테니까, 많이 피곤할 거예요.”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그래도 상혁이 너 안 왔으면”
[아, 좀!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이 정도의 대화까지 들릴 리가 만무했다.
윤서는 욕실 문에 귀를 대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 소리는 너만 지를 줄 아니?”
모녀의 투닥거림을 바라보는 상혁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그려지려고 했지만,
그것을 알아챈 상혁이 제 입술을 조금 세게 깨물어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이제 슬슬”
“그래, 윤서 방 들어가서 몸 녹이고 있어. 너흰 아침 안 먹을 테니까… 과일이라도 깎아줄까?”
“….”
바라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 그것을 처참히 망가트린 자신.
상혁은 당장은 윤서와 거리를 두고, 이 풍경을 지킬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윤서의 어머님께 만큼은 단호할 수가 없었고,
“아니에요, 그럼 들어가 조금 쉬고 있겠습니다.”
“그래, 푹 쉬고 있으렴!”
하다못해 난처하다는 표정마저도 무리인 탓에, 살짝 웃으며 윤서의 방으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윤서의 방에 들어서 방문을 닫자, 그런 상혁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윤서를 되살려야 한다는 어두운 문제를 마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와 거리감이 있는 일상적인 문제를 마주하고, 적잖이 당황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윤서의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든지, 여태껏 방에 들여 주지 않던 이유를 이해했다든지.
상혁의 머리맡엔 그런 식의 모놀로그가 흐르고 있었고,
“와….”
그와 동시에 감탄이 튀어나온 건, 그만큼 인상적인 윤서의 방 분위기 탓이었다.
흐릿한 날씨 탓에 햇빛이 들지 않아도,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방.
그런 방이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캐릭터 용품과 아기자기한 인형들로 잔뜩 꾸며져 있었다.
은밀했다면 은밀했을 윤서의 취미 생활을 마주한 것이었고,
상혁은 멋쩍어진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뒤늦은 후회를 시작했다.
“일 났네….”
그리고 그런 일상적인 고민에 점점 물들게 되는 상혁의 귓가로.
웬 상쾌한 분위기의 피아노 전주가 들려왔다.
♬
“음?”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걸♪
익숙했던 것인지, 상혁은 노래 리듬에 맞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말할 수 없어. 말하고 싶은데, 속마음만 들키는걸♬
노래는 침대 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내 사랑에 마법에 열쇠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
상혁은 전화가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침대 앞으로 다가가 이불을 들쳤고,
catch you~ catch you~ catch me~ catch me~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 그만~♬
그렇게 나타난 휴대전화기 화면엔 ‘일어나!’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우울한 건 모두 파란 하늘에 묻어버려♪
알람 소리였다.
상혁은 이토록 밝은 노래를 들으며 괜스레 서늘하게 느껴질 뒤편을 살폈고,
오늘도 너에게 달려가는 이 마음, 난 정말, 정말! 너를 좋아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서둘러 알람을 껐다.
“…진짜 큰일 났네.”
이제 곧 나타날 윤서에게 맞아 죽는 미래라도 예상한 것일까.
그게 아니면, 그녀의 방에 차곡차곡 쌓여간 분홍빛 마음에 물들기라도 한 것일까.
새까맣던 마음이 밝게 물들 듯, 어두웠던 얼굴에 물드는 옅은 미소를 받아들이는 상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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