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17화 (17/76)

〈 17화 〉 #17.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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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편지

[18년_02월_12일_월요일]

[02:00]

좋아하는 캐릭터 용품들로 잔뜩 꾸며진 방.

그런 물건들 탓에 스탠드에 달린 하얀색 조명마저도 분홍색으로 빛나게 되는 방.

그런 방 창가 옆자리에 놓인 책상 앞엔, 컴퓨터 화면에 열중인 웹 소설 작가, 이윤서가 앉아있다.

“이것도 슬슬 완결이네… 차기작은 뭘 써야 반응이 좋으려나….”

윤서는 작게 중얼거리며 원고 작업 중이던 워드프로세서 창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의 고민이라면 상혁에게 연락할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듯.

“아…! 이거 물어본다고 연락하면 되겠네!”

멍했던 얼굴에 밝은 미소를 그리며 책상 구석에 놓여있던 휴대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문자는 온종일 써 내린 소설보다 술술 적혀졌지만,

“아니야, 지금쯤이면 둘이 같이 있을 거잖아….”

문자가 전부 적힌 휴대전화기는 그것을 차마 전송하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려 보내졌다.

“에휴….”

상혁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조차 망설여야 하는 처지가 서러웠을 윤서.

그런 그녀가 처량할 정도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다, 이제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짜증 나, 짜증 나!”

그리곤 두 발로 책상 아랫벽을 밀쳐, 의자를 방 한가운데로 옮겼다.

답답한 마음은 해소되지 못하면 점점 커져만 간다.

윤서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의자가, 마주한 천장에 달린 동그란 형광등이.

그것들이 마치 저 자신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쳇바퀴 돌 듯 그대로인 마음이 누군가에 의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학교 다닐 때보다 심해진 것 같잖아… 진짜 왜 이러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매끈한 양 볼에 바람을 넣고 투정부려도,

“그리고 한 번쯤은 한눈팔­ 아니, 아니야… 선배니까 그럴 리 없는 거잖아… 아니, 그래도 나 정도면….”

갸름한 입술을 내밀고 뾰로통하게 투덜거려도.

윤서의 속마음을 알아차려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헤어지진 않으려나­ 에?”

무심결에 흘러나온 본심.

그것에 화들짝 놀란 윤서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소리쳤다.

“지금 뭐라는 거야…! 진짜 미쳤나 봐…!”

상혁을 대학 선배나 동료 작가가 아닌, 한 명의 남자로 바라보며 이토록 미련을 가지는 건,

현지가 상혁에게 고백한 그날이 아쉬운 탓이었고,

“이래서 언니 얼굴 어떻게 봐….”

그와 동시에 현지에게 죄책감까지 가지는 건,

하루 차이로 고백이라는 선수를 빼앗긴 것이 허망해도, 현지를 원망하진 못하는 성격 탓이었다.

“그만, 그만!”

윤서가 제 뺨을 조금 세게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미련을 떨쳐내기 위해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는 것이었다.

▶▶▶ ▶▶▶

[02:30]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4평 내지의 욕실.

이곳에서 몸에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서 있던 윤서가 그것을 풀어 수건걸이에 걸쳐둔 뒤,

따스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로 발끝부터 천천히 들어섰다.

그리고 목이 잠길 정도로 느슨하게 기대 누워, 몸을 부르르 떨며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으….”

그렇게 여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욕실에 찾아온 이유를 떠올린 시무룩한 얼굴이 욕조에 반쯤 잠겨졌다.

“부….”

입에서 시작된 거품이 보글보글 끌어 오른다.

윤서는 고민이 있을 땐, 코앞에서 터지는 거품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것을 핑계 삼아 떠올린 미련이 마음을 헤집고 다녔다.

선수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상혁의 옆엔 제가 서 있었을 거라는 상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부… 부….”

미련이 커지는 만큼, 죄책감도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것이 반대로 무너진 자존감을 마주하게 했다.

“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윤서는 보글거리기를 멈추고, 욕조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윤서야,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상혁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욕심내려 한다는 게, 그와 함께할 미래가 자꾸만 떠오른다는 게.

그런 것들이 괴로웠을 윤서가 조금 따지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대체 왜…? 내 어디가, 뭐가 아쉬워서…?”

그리고 시선을 조금 내려, 자신의 몸을 훑어봤다.

단 한 곳만 빼면,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잘빠진 몸매였다.

“이건 대한민국 여자 대부분이… 아니, 하지만 언니는….”

윤서는 자신의 처지가 부족한 가슴 탓에 처량해진 것인지 생각해봤지만,

“잠시만, 선배 여자 가슴 보는 편인가? 진심…?”

이내 미간을 세게 찌푸리며, 하얀 김 속에 상혁을 그리곤 그곳에 짜증을 쏘아댔다.

“너도 그렇게 잘생긴 건 아니잖아.”

윤서는 그런 식으로 상혁의 겉모습을 나무라보기도 하고,

“아니면 키 때문에 그런가? 뭐… 그 정도면 적당히 설렐 정도긴 하지…? 에?”

저도 모르게 하얀 김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다, 또다시 이러고 마는 자신을 입을 살짝 꼬집어보기도 했지만,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아니야, 됐어, 인제 그만!”

결국은 뭉게뭉게 피어오른 상혁의 모습을 두 손으로 휘적거리며 욕조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부….”

윤서는 그렇게 한참을 보글거리다,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크게 소리쳤다.

“그래! 나보다 크니까 콧구멍만 보였잖아! 근데… 그렇다고 코털 삐져나온 적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까, 선배 의외로 자기관리 충실하구나… 이것도 은근 매력 포인트긴 하지….”

이런 흐름을 바란 것도 아니었을 테고, 이런 흐름이 또 시작됐다는 걸 의식하지도 못한 것 같지만,

어찌 됐든, 이제는 옆길로 새는 것을 개의치 않게 된 윤서였다.

“설마 코털이 안 자라나? 아니야, 그건 너무 불공평해… 음, 그래! 첫인상은 어땠지?”

둘의 첫 만남은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건 신입생 윤서가 같은 학과 선배인지도 몰랐던 상혁을 문예 창작 동아리에서 만났을 때의 이야기.

“그때도 되게 다정한 느낌으로 다가왔었지….”

윤서는 상혁과 함께한 어떤 기억을 떠올려도 주변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게 됐고,

“잠시만… 지금 보니까 이거, 나한테 작업 건 거 아니야?”

그런 색감을 어떻게든 망가트려 보려고 했지만, 그건 또 마음이 허락해주지 않았기에.

“아니야, 그건 아니지… 나 혼자 다니니까 챙겨준 거잖아….”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될 뿐이었다.

“에휴….”

더는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일까.

윤서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바로 옆 세면대로 향했다.

그리고 세면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탄했다.

“아깝다, 아까워… 이 얼굴에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니….”

애초부터 자존감은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만… 이 감정 그대로 차기작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

[05:30]

상혁에게 연락할 계기를 만들기 위해, 그것을 겸해 자신의 처지를 달래기 위해 시작된 창작.

윤서는 작가로서가 아닌, 한 명의 여자로서 느낀 감정을 기반 삼아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건 웹 소설 기성 작가가 된 뒤로 처음인 일이었다.

그 이유가 남들의 눈엔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물론, 남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든, 지금 윤서의 머릿속에선 마치 우주가 시작된 것처럼.

아직은 제목도, 그렇다 할 전개도 짜이지 않은 차기작이 무궁무진하게 창조될 뿐이었다.

어느덧 푸르스름해지기 시작한 창밖.

그리고 그런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웠지만, 아직도 누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윤서.

“플롯은 느낌이 대강 왔으니까… 그래, 일단은 등장인물 설정부터 명확하게 하자.”

보통의 작가라면 이런 도입부 설정 준비에 큰 벽을 느낀다.

첨예하고 치밀한 설정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처럼 중간에 무너지기 마련인 탓이다.

하지만 지금의 윤서에겐 그다지 통하지 않는 통념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남자 주인공은 둔하고, 조금은 바보 같아서 무뚝뚝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항상 다정해… 그리고 남의 일이라도, 절대 모른 척 지나치지 않아….”

평소라면 상혁을 떠올리는 제 모습에 투덜거리며 그러기를 멈춰왔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이건 상혁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차기작 남자 주인공 설정을 구성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엄청나게 예쁘게… 음, 그래! 여기선 요리도 잘하고, 애교도 많이 부려야겠다. 음, 가슴은… 미안하지만, 너도 A컵으로 살아야겠다…! 큭큭.”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다.

차기작이 차츰 윤곽을 잡아갈수록, 윤서의 체력 또한 점점 바닥을 드러낸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라도 한 것인지.

“오늘은 여기까지… 여유 날 때마다 써서 얼른 완성해야지… 후아암… 이상혁, 각오하라고… 내가 잔뜩 괴롭혀줄 테니까….”

점점 흐려지는 의식을 견디지 못하고, 책상에 그대로 엎드려 잠들고 마는 윤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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