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9화 (9/76)

〈 9화 〉 #9. 첫 번째 과거(5) ­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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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첫 번째 과거(5) ­ 갈림길

[18년_11월_27일_화요일]

[17:30]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쌀쌀한 바람에 흔들거린다.

윤서는 아주 작은 용무가 있어, 상혁의 집에 잠깐 들른 것이라 말할 테지만,

그에 반해 한껏 차려입은 옷차림이 눈에 띄게 청초하다.

하얀 피부가 비치는 얇은 스타킹, 그것을 조금밖에 가리지 못하는 검은색 짧은 치마.

그리고 그 위에 살구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모습.

그 청초한 모습은 주변 남자들의 이목을 끌기 알맞았지만, 거기까지 의도한 건 아니었기에.

윤서는 근처 약국에서 의료용품을 구매한 뒤, 서둘러 상혁의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하….”

상혁의 집이 보이기 시작하자, 윤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활짝 열려있는 현관문 탓이었다.

윤서가 계단을 올라, 그런 현관문을 닫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워진 하늘 탓도 있겠지만, 집 안은 커튼까지 쳐진 탓에 무척 깜깜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조금은 익숙했던 윤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거실 형광등 불을 켰다.

밝아진 거실. 상혁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조금 숙인 고개와 공허한 눈동자는 주변 변화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니,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한 치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약하고 붕대 사 왔어요.”

몇 초를 기다려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윤서는 이런 상황에 구태여 허락까지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상혁의 손을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한동안 이런 적 없었잖아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와 상처 부위를 살피는 따스한 손길.

상혁을 부르던 호칭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

대학교 선배이자 후배였던 상혁과 윤서. 그런 두 사람이 알고 지낸 기간은 과거 기준으로 7년.

그런 긴 시간을 남자와 여자가 아닌, 선후배라는 관계만으로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

그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같은 길을 걸어온 덕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었다.

상혁이 지칠 때 위로해주는 사람이 현지였다면, 이해해주는 쪽은 윤서였다.

상혁은 그런 윤서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고, 망가트리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실수로 한 걸음 다가가면, 남녀 관계라는 선을 넘을지도 모르는 탓이었다.

“미안.”

“됐어, 따끔할 거예요.”

엄지손가락에 소독약이 닿자, 상혁의 한쪽 눈이 작게 찌푸려졌다.

윤서는 그런 표정이 풀어지길 기다렸고, 이내 하얀 솜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거의 끝났어, 조금만 참아요.”

그리고 그런 윤서에게 상혁은 인생이라는 삶을 밝혀주는 가로등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글을 누구보다 아껴주는 그가 의지 됐고,

제게 힘든 일이 있을 땐, 저보다 앞장서 도와주는 그가 든든했다.

아버지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남자를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혁이 현지를 선택했기에, 윤서는 그와의 관계를 애증의 관계로 남겼다.

의미가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른 둘. 서로에게 서로가 각별함은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물어뜯으면 어떡해요….”

방금 댄 솜이 빨갛게 물들자, 그 위에 붕대를 조금 세게 감는 것으로 응급처치가 끝났다.

윤서는 상혁의 안색을 살피다, 걱정 어린 표정을 일순간에 굳히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상황에 따라선 차갑고 집요하다.

상혁도 그런 윤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망설였다.

과거로 온 것에 관해 말해선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함.

당장은 어딘가에 기대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속마음.

그리고 지금의 상혁은 누구보다 나약해진 상태였기에, 절실함이 두려움을 집어삼키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운을 떼는 것조차 망설이게 되는 상혁과 그런 그의 어깨를 다정히 다독여주는 윤서.

“괜찮아, 괜찮아요.”

안정감 있게 울려온 목소리에 상혁이 고개를 들었고, 그런 시선에 윤서의 가방이 담겼다.

윤서는 상혁이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가방이라는 것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이 여자, 그 남자였지….”

“어?”

“남자 주인공 이름은 이수찬, 아들은 이현수.”

“잠, 잠시만…!”

“여자 주인공은 김유정, 딸은 유예림.”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윤서의 용무는 원고 검토였다.

그리고 가방에 담겨있던 ‘이 여자, 그 남자.’의 원고는 아직 아무도 몰라야 정상인 원고.

오늘 아침에 막 완성한 시놉시스일 터인데, 그것을 상혁이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윤서는 그런 기묘한 상황 속에서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가리기 바빴고,

흐릿한 기억을 되뇌던 상혁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잘 들어.”

“네…?”

“나 미래에서 왔어.”

“에?”

▶▶▶ ▶▶▶

[18:00]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부 털어놓은 상혁이 후련한 얼굴이 되어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괴로움은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해소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 윤서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언니가 며칠 뒤에 죽고, 오빠는 그걸 막기 위해 미래에서 왔다. 그런데 주어진 시간이 짧은 와중에 하루가 아닌, 이틀이 지나있었고, 그래서 패닉이 왔다. 맞죠?”

“빠르네….”

장황한 이야기가 간결하게 정리되자, 상혁이 놀랍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상혁은 윤서가 자신을 신뢰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정도를 가뿐히 뛰어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전했기에, 제 말을 믿어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아 준 것에 감사를 느끼며 옅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듣느라 고생했어. 역시… 거짓말 같지?”

“음… 들으면서 생각했는데, 혹시 이 오빠 손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게 아닐까? 나는 머리까지 치료할 수는 없는데, 어쩐다… 싶었어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윤서의 솔직담백한 대답이 상혁을 웃게 했다.

“푸하하, 그래, 그게 당연한 반응이지.”

“…제정신도 아닌 것 같고, 아! 혹시 새로 쓰려는 소설 이야기?”

“그래… 재밌을 것 같지?”

상혁이 이번에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묻자,

“하지만 이건 어제 떠오른 이야기잖아. 누구한테 보여준 적 없는 이야기….”

윤서는 제 가방에서 원고 뭉치를 꺼내며 대답하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알겠다, 알겠어. 내가 이번만 믿어줄게요.”

“뭐?”

“믿어준다고요. 오빠 미래에서 왔다는 거. 뭐… 믿어주는 내가 멍청한 것 같지만요. 아, 거짓말이라는 게 탄로 나는 순간엔 각오해야 할 거예요.”

윤서가 오른손을 세게 쥐어 상혁의 얼굴 코앞까지 가져다 대자,

상혁이 그런 주먹을 무심하게 내리며 어이없다는 식으로 되물었다.

“제정신이야…? 이걸 믿는다고…?”

맞닿은 손이라든지, 점점 가까워지는 고개라든지.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어쩌려고요.”

그런 것들을 좀처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윤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도망치듯 향하며 말했고,

그런 윤서를 멍하니 바라보던 상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늦었으니까. 그래, 우선은 이거부터 해야겠지.”

“그나저나 먹을 게 하나도 없네… 밥은 먹고 다녀요? 청소도 좀 하고 그래야지.”

상혁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윤서는 텅 빈 주방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잔소리를 늘어놨고,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고개를 돌렸다.

“에? 아니, 뭐 해요…?”

윤서가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

상혁이 원고를 읽고 있는 탓이었다.

“아니… 이 상황에 원고를 봐준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다는 남자.

그런 남자가 자신의 원고를 검토해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기… 지금 그게 읽어져요…?”

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과거로 온 것도,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란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윤서의 미래를 바꾸러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것은 현지의 죽음과 달리, 성공이나 실패로 구분돼선 안 되는 일.

지금이라는 시간은 최대한 원래의 과거와 똑같이 흘러야 했다.

그런 결론을 내린 상혁이었기에, 이런 상황 속에서 윤서의 원고를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용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다시 한번 집중해서 읽으려는 다정한 모습.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상혁이 원고 뭉치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잘 읽었어.”

“…어때요?”

조금 전까진 어이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던 윤서도 어느새 상혁의 옆에 앉아, 그의 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밌을 것 같아. 난 로맨스에 재능이 없다 보니까, 게다가 넌 요즘 이야기나 유행이란 틀에 구속받지 않으니까, 개성도 있고.”

“다행이다… 근데­”

“그래, 아들 설정이 좀 특이하네. 어쩌려고?”

“모르겠어요… 그래서 조언을 좀 구할까 해서 온 거였거든요.”

“흠… 그럼 일주일 정도만 기다려볼­ 아….”

상혁이 당황하며 말을 멈췄지만,

윤서는 뒷말이 전부 예상된 탓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설마 지금 합작하자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좋아요! 대학교 이후로 처음 아냐? 대박!”

“아니, 그니까­”

“사실 저도 이런 복합적인 장르는 자신 없었는데, 선배랑 같이 쓰면 서로 윈윈이기도 하네요! 아니다, 내가 조금 꿀리긴 하지…?”

윤서가 이렇게까지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은 꽤 드문 일이었다.

상혁은 그 밝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지만, 그런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가 너와 내가 했던 대화야.”

“응?”

“무서울 정도네. 원래의 과거랑 똑같이 말하면 그때의 대답이 돌아와. 그래도 보통은 조금씩 달라졌는데, 너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란 거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지금부터는 미래에서 온 선배의 조언.”

“에…?”

“일주일 뒤에 연락 못 해. 아니, 안 할 거야. 찾아와도 못 만날 수 있고… 그러니 혼자 해.”

“그럴 거면 합작하자는 말은 왜 한 건데요…?”

“원래의 과거랑 똑같아야 한다고 의식하다 보니까 실수했어.”

“….”

“그리고 어쩔 수 없잖아. 벌어졌던 일을 빼먹었다가, 아끼는 후배의 미래를 망치기라도 해봐.”

“…언니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내가 기다리면 되잖아.”

“그냥 써.”

“싫어.”

윤서는 어린아이가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고개를 휙 돌렸다.

“고집부리지 마.”

“내 마음이거든요? 내가 쓰나 봐라. 죽어도 안 쓸 거니까, 그만 말해요.”

“말 좀 들어라….”

“잠시만… 근데 원래의 과거랑 똑같아야 한다면서 이런 건 왜 알려주는 거에요? 앞뒤가 다른데?”

길어지는 대화에 상혁이 말꼬리를 붙잡혔다.

“…어?”

“설마, 미래에서 내가 이거 안 쓰고 기다리기라도 했어요? 선배랑 합작하려고?”

“아, 아니… 그랬을 리가 없잖아….”

의도치 않았을 테지만, 상혁이 딱 봐도 정답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랬나 보네. 오… 드디어 이해가 되네요. 그러면 이번에는 혼자서라도 쓰게 하려고 이렇게 꼼수를 부린 거고?”

“하….”

급히 세운 계획이라지만, 너무 쉽게 들통 나버린 탓에 긴 한숨이 늘어졌다.

상혁은 윤서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네 고집이 어딜 가겠냐….”

“기다려달라는 말을 쉽게 뱉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 그래….”

“이런 건 신고 못 하나? 내 미래를 바꾸려 했잖아. 인생 침해 아니야?”

윤서는 상혁이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지만, 그의 표정이나 감정 상태를 헤아려가며 대화에 작은 장난을 곁들였다.

상혁이 기운을 차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예쁜 행동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앞으로 뭐 했었어요?”

“뭘.”

“선배­ 아니, 오빠한테는 과거였고 나한테는 미래? 그때는 이렇게 글 검토하고 뭘 했었냐고요.”

“그땐… 저녁 겸 반주하면서­ 가 아니라, 바로 집에 돌려보냈지.”

상혁이 아차 싶어 말을 고쳤지만,

“헤에… 그렇구나, 술이라… 아, 걱정 마요. 저도 딱히 술 마실 생각은 없으니까.”

이미 늦어버린 듯하다.

“뭐든 안 돼. 절대 안 돼.”

“…저기, 아직 뭐 한다고 안 했는데요?”

“할 생각이잖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 이제 돌아가.”

“왜요? 원래는 안 돌아갔다면서요. 제 과거는 되도록 바꾸지 않겠다면서요.”

상혁의 처지를 그보다 완벽하게 이해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반론이었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아니, 어차피 나 집으로 돌아가면 아까처럼 있을 거잖아. 그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다, 내 미래 바뀌면 책임질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해 내 청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있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요. 앞으로 해야 할 일 정리해야 하잖아. 내가 도와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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