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6. 첫 번째 과거(2) – 변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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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 번째 과거(2) 변하지 않는 것
[18년_11월_23일_금요일]
[22:00]
달빛이 파고들지 못하는 조명 아래 귀갓길.
현지는 온종일 붙잡고 있었던 상혁의 손을 잠시 내려놓고, 양팔을 하늘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후아…! 오늘 데이트 정말 오래 했다!”
“피곤했어?”
“아니, 아니! 길어서 너무 좋았어. 정말로!”
기지개는 피곤함 탓에 켠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듯.
현지는 고개를 여러 차례 저어보기도, 느릿해진 발걸음을 경쾌하게 바꿔 걸어보기도 했지만,
“다행이네….”
눈앞의 현지의 모습에 집중할 수 없었던 상혁은 조금 멍하니 대답할 뿐이었다.
“매일매일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살이라는 선택을 도대체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이제 주말이니까, 내일도 오늘처럼 보낼까?”
상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부 바쳐, 현지를 행복하게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며 물었고,
“좋 아니, 잠시만! 그것도 좋은데… 우선은 할 일이 있지 않아?”
현지는 집까지 얼마 남지 않은 가로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분명했다.
상혁도 현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런 가로등 아래서의 추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원고? 며칠 쉬지 뭐.”
현지의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을 전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에…? 원고를 쉰다고? 갑자기 왜?”
상혁이 떠올린 추억은 가로등 아래서 멋지게 청혼하는 장면이 아닌, 청혼 직후 제게서 떠나가는 현지의 뒷모습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의 청혼이 현지가 죽게 되는 계기일 리 없다고.
그렇기에 오늘이라는 과거만큼은 절대 바꾸지 않고 현지를 되살리겠다고.
그랬던 다짐이 무너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냥… 일주일 정도만 쉬려고.”
“그니까! 갑자기 왜!”
현지가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피했을 때.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상한 기억을 마주했을 때.
어쩌면 현지는 자살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너진 건, 다짐만이 아닌 확신까지였다.
“….”
고민에 잠긴 상혁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현지가 별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그럼 나도 휴가 쓸까?”
“어…?”
“월요일부터 바로는 무리겠지만, 어떻게 잘 말하면 괜찮겠지. 내일 연락드려야겠네.”
덤덤하게 말을 잇는 현지와 몹시 당황한 모습의 상혁.
“이따 무슨 약속 있지 않아…?”
상혁이 그런 말을 못 믿겠다는 듯, 원래의 과거에서 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묻자,
“응? 웬 약속? 없는데?”
현지는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없다고…? 어디 가야 할 곳 있는 거 아니었어?”
“이 시간에 가긴 어딜 가!”
“….”
어째선지 바뀐 과거는 어느새 도착한 집 앞으로 이어졌고,
남은 가로등이 하나뿐이라는 것에 조급해진 현지가 상혁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약속이든, 휴가든! 도대체 어쩌려는 거야!”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지막 가로등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가로등 이제 끝이잖아… 할 말 있다며….”
점점 시무룩해지는 현지의 얼굴. 그것을 바라보던 상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용기를 내는 것조차 고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론가 떠나지 않겠다는 변화를 마주한 지금이라면,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자기가 하려 했던 말이 이별 통보가 아닌 이상, 그럴 리는 없지 않을까?”
“….”
그렇다면 청혼은 그대로 이뤄져도 괜찮지 않을까.
상혁은 오늘이라는 과거만큼은 바꾸지 않겠다던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겼고,
비로소 망설이고 포기하려 했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역시 긴장되네… 집 도착한 줄도 몰랐어.”
그렇게 진정으로 마주 보게 된 두 사람의 감정은 사뭇 다르게 격양되어 있었다.
아직도 불안함이 가득 담긴 상혁의 모습과 달리,
현지는 설렘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반짝거렸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상혁을 올려보았다.
지금부터 듣게 될 말들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예쁜 모습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어. 내 삶에 네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걸 널 잃고 알았어.”
상혁의 목소리가 얕게 떨리자, 그것을 알아차린 현지가 눈과 입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적당한 미소였다.
“그래서 조심스러웠어. 내 마음이, 이 말이 전해져도 괜찮은 것인지.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어.”
“괜찮아.”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말하려는 걸 보면 나도 참 욕심쟁이인 것 같아.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너와 함께 할 미래를 바라게 되네.”
상혁은 현지를 잃고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며 말했고,
현지는 몇 달 전에 헤어질 뻔했던 서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들었다.
“사랑해. 누구보다, 무엇보다 사랑해. 네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상혁에겐 따뜻하면서 조금은 쌀쌀했던 겨울,
현지에겐 쌀쌀하면서 조금은 따뜻했던 겨울.
서로에게 중의적인 하루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우리 결혼하자.”
“….”
달빛은 보지 못할 가로등 아래, 남자를 애타게 하는 여자의 침묵.
“…눈 감아 봐!”
현지가 가슴 앞에 모았던 두 손을 허리 뒤로 가리며 말을 이었다.
“얼른 감으래도?”
“….”
그렇게 조금 머뭇거리던 상혁이 눈을 감자, 현지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꿈치를 살짝 들어 상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것으로.
이 세상 어떤 대답보다 예쁜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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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_11월_24일_토요일]
[08:30]
지난밤, 현지는 청혼을 승낙했고 상혁을 떠나지 않았다.
거기에 함께 집으로 돌아와 밤을 보냈다.
과거가 바뀐 것이었다.
상혁은 1년 만에 자신의 품에서 잠드는 현지를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안도감은 별다른 이유 없이 바뀐 과거에 의문을 품지 못하게 할 만큼 편안한 것이었고,
밤을 지새우며 현지를 지키려 했던 눈꺼풀마저 감기게 했다.
그리고 지금, 아직은 잠결이기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혁이 현지의 온기를 찾으려 하고 있다.
어째선지 주변이 시리게 느껴진 탓이었다.
상혁은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옅어지는 온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극도의 불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잠긴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비어있는 옆자리를, 안방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지야…?”
상혁이 빈자리에 손을 올려봤지만, 그곳엔 조금의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고,
“현지야!”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다급히 침실을 나섰다.
잠에서 깨어난 지 10초도 지나지 않은 탓에 두 다리가 심하게 비틀거렸다.
그렇게 마주한 거실, 그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이곳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어두웠다.
“현지야, 어디야. 어디야…! 씻어?”
상혁은 서재와 욕실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집에는 자신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에…?”
현지가 사라졌다. 사고가 그런 사실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었다.
상혁은 어두컴컴한 거실 가운데서 굳어버렸다.
그나마 움직이는 건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물어뜯는 치아. 불안 증세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물어뜯던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흘렀고, 그것이 치아에 스며들어 혀에 닿았다.
“아….”
쓰라린 맛에 정신을 되찾은 상혁이 다급히 침실로 돌아와 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제발… 제발, 받아, 받으라고…!”
한 통, 두 통, 세 통.
현지의 목소리를 애타게 바라는 상혁의 귓가엔 발신음만 맴돌았다.
상혁은 영영 닿지 않을 것 같은 전화를 관두고, 침대에 주저앉아 문자를 적었다.
어디냐고, 무섭다고, 걱정된다고.
그리고 그런 문자를 보낸 뒤, 현시를 직시하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분명 과거는 바뀌었다.
현지는 떠나지 않았고, 상혁의 옆에서 잠들었다.
하지만 현지는 상혁이 잠든 사이에 사라졌다.
상혁은 자신이 안일했던 것인지, 아니면 현지가 사라지는 게 필연적인 사건인 것인지 생각해봤지만,
그것을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하….”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의미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었기에.
상혁은 한 장소를 떠올리며 겉옷을 챙겼다.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 ▶▶▶
[09:45]
상혁이 도착한 이곳은 그의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현지의 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가가 아닌, 상혁과 동거하기 전에 지냈던 자취방이었다.
동거를 시작했는데 계약을 유지하고 월세를 내는 이유는, 현지가 이곳에 돌아와 홀로 지내는 시간이 빈번하게 있는 탓이었다.
둘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다투거나 싸웠을 때를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현지에게도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고, 상혁도 그것을 이해해준 것이었다.
의미는 그뿐이었던 집.
상혁이 이곳에 찾아온 것은 현지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현지야, 김현지! 대답 좀 해봐! 안에 없어?”
애타는 목소리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안쪽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
굳게 닫힌 현관문은 비밀번호를 요구할 뿐이었다.
“갑자기 왜… 왜 이러는 건데… 제발, 제발… 안에 있는 것만 확인하면 돌아갈 테니까, 대답 좀 해줘….”
무작정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건, 상혁이 이 집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모르는 탓이었다.
경찰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현지를 만나야 했다.
“….”
상혁은 눈을 감고 작은 상황극을 그렸다.
‘이 집에 있는 여자가 자살하려는 것 같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누구시죠? 그 여성분이랑 관계는 어떻게 되죠?’
‘연인 관계입니다.’
‘연인 관계요? 자살할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아니야… 이게 아니야….”
‘네,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 빨리 와주세요.’
단순히 출동해주지 않을 것 같으면 연인 관계를 주장할 사진과 반지를 보여주면 그만이고,
자살에 관해선 상황을 급박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이 정도라면….”
경찰을 불러내, 잠긴 문을 열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어젯밤, 현지가 보였던 반응은 청혼을 거절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바라는 쪽에 가까웠다.
상혁이 전했던 말이나 현지가 보였던 반응은 원래의 과거와 차이가 있었지만, 청혼을 승낙했다는 결과만큼은 똑같았다.
그리고 그런 어제와 원래의 과거의 차이점은 현지의 행동뿐.
설명은 부족해도 어느 정도 예고라도 있었던 원래의 과거와 달리, 이번엔 갑작스럽게 떠났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다만, 현지는 제 발로 떠난 것이기에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것으로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당장 현지를 만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지.
제 발로 자신을 떠났는데, 힘겹게 만난다고 한들 또다시 떠날지도 모르는 것이었고,
그러다 한 번 불러낸 경찰에게 스토커나 미련 남은 전 남자친구 같은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상혁은 현지의 사망 추정 시간인 29일 저녁 7시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문을 열어야 했다.
그날만큼은 경찰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뜻.
즉, 어쩌면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기회. 경찰의 도움은 끝까지 미뤄야 할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젠장….”
상혁이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더 이상의 자문자답이 불가능해, 괴로운 탓이었다.
상혁의 앞길을 가로막는 진실이라는 벽은 부수기엔 너무 두터웠고, 그렇다고 피해서 가려면 너무 많은 길을 돌아가야 했다.
“없겠지… 여기 없는 거겠지….”
상혁은 자신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현지가 모습을 숨길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발을 돌렸다.
움직여야 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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