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5. 첫 번째 과거(1) –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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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첫 번째 과거(1) 두 번째 이야기
[18년_11월_23일_금요일]
[11:45]
상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외출을 준비하는 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휴대전화기로 영화를 예매하다, 원래의 과거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며 생각에 잠겼다.
1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자신의 행동이 현재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에 사소한 행동마저 신중해야 했다.
현지를 되살리기 위해서 어떤 것을 바꾸고 무엇을 알아내야 하는지.
현지와 함께할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 어떤 것을 유지하고 본래에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1년 전 오늘 내가 했던 일….”
이제 막 생각을 시작했을 뿐인데, 해야 할 일은 구름 낀 산처럼 드높게 느껴질 뿐이었다.
지난날을 후회하며 살아온 상혁이었지만, 막상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 자살, 자살….”
상혁이 긴 한숨을 내뱉고, 일반적인 자살의 원인을 떠올리기 위해 같은 말을 되뇌었다.
“자살의 이유… 우발적인 행동? 그래, 그래… 이게 관건이려나….”
만약 현지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 증상이 심해져 우발적으로 자살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상혁이 제게 주어진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현지의 자살을 저지할 수 있을 테지만,
“만약, 계획적인 행동이라면….”
그게 아니라 어떤 이유 탓에 계획적으로 자살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상혁이 할 수 있는 일은 터무니없이 좁혀졌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할 정도였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정말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상혁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려 한들.
자살이라는 무거운 결심을 단 일주일 만에 돌려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사건 현장을 직접 확인한 상혁이었기에, 현지의 자살이 우발적인 일이라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결국, 상혁은 타살이라는 작은 가능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사건 현장을 조사했던 경찰은 살인 사건이라 여겨질 심증이나 물증, 용의자나 목격자도 확보하지 못했기에 사건을 보이는 그대로인 자살로 종결시켰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뿐이지만, 일주일 뒤가 현지의 사망 추정 시간과 일치한다는 점.
그건 상혁이 제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는 11월 29일 사건 현장인 현지의 자취방에 도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이번 과거에서 현지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건의 진상을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지의 죽음이 자살이라면 그것을 막아내야 하고, 타살이라면 범인을 붙잡아야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생각이 꼬리잡기하듯 늘어나던 순간에 들려온 목소리.
“아….”
“준비 끝났어! 얼른 출발하자.”
상혁이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외출 준비를 마친 현지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얼른, 얼른!”
간만의 데이트라는 점보다, 그 마지막을 장식할 청혼에 기대감이 한껏 부푼 탓일까.
현지는 평소보다 한껏 힘을 주어 꾸민 어여쁜 모습이 되어있었고,
그런 여자 친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상혁은 현지에겐 역시, 자살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오늘 손잡고 다닐까…?”
그건 조금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는 대답이자 질문이었지만,
상혁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껴왔기에.
그렇기에 지난 1년간 자신을 맴돌았던 공허함을 떨쳐내고 싶어 부탁한 것이었다.
“응? 그냥 잡지, 뭘 굳이 말로 하고 그래….”
현지는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내심 듣기 좋은 구석이 있었기에 상혁의 손에 흔쾌히 깍지를 끼웠다.
그렇게 현관을 나서는 두 사람에게로.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푸른 하늘에서 따스한 햇볕이 내려왔고,
곧이어 겨울을 알리는 쌀쌀한 바람도 불어왔다.
“따뜻하네.”
“응?”
현지는 상혁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애써 정돈한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조금 쌀쌀하지 않아? 기온도 엄청 내려갔고.”
“아… 손 말하는 거야.”
“…자기 손은 조금 찬 것 같기도 하네. 큭큭, 근데 오늘 꽤 오글거린다?”
“그런가… 그리고 오늘은 차 타지 말고 걸어 다니자.”
“응? 그래! 그럼 간만에 연애 초기 느낌 나겠네, 뚜벅이 시절!”
현지는 상혁과 지내온 날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이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을 것이고,
그런 시절을 같이 떠올리고 싶어서 상혁을 바라보고 해맑게 대답한 것이었지만,
“그러게, 오늘 화장 잘 받았다. 되게 어려 보여.”
상혁은 그런 현지에게서 그녀의 20대 초반, 대학교 신입생 시절을 떠올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힘 좀 썼”
엇갈린 기억에 말이 끊겼다.
그것이 아쉬웠을 현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고,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손잡고 걸어 다니면서 데이트하는 게 오랜만이라는 거잖아!”
바라는 기억을 떠올려주지 못하는 상혁의 얼굴에 깍지낀 서로의 손을 들이밀었다.
“아…!”
비로소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된 두 사람.
상혁은 멋쩍어진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괜스레 무심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뭐, 그 무렵엔 항상 이렇게 다녔잖아. 좋았지….”
“예뻤지…! 아, 그러고 보니까 그거 기억나?”
현지는 제겐 어제처럼 생생할 과거를 떠올리곤, 꼭 붙잡은 서로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 너 손에 땀 많이 나서 내 눈치 보고 그랬잖아. 나 몰래, 바지에 땀 닦고. 큭큭.”
“…그랬었나.”
“그땐 이상혁 씨도 참 귀여웠는데…! 혹시 아직도 그래? 지금도 조금 미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추억에 잠겨 잔뜩 신이 난 현지가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고, 상혁의 얼굴을 놀리듯 바라보자,
상혁이 그런 사랑스러운 시선을 살짝 피하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거든.”
“어? 귀도 빨개진 것 같은데?”
“…추워서 그래.”
“아깐 아… 손이랬지.”
“그리고 나는 첫 연애니까, 부끄러웠을 수도 있지.”
“네? 저기요… 저는 첫 연애 아니에요? 나도 처음이라 했잖아!”
“…고등학교 때 많이 했다고 했잖아.”
“제가요? 언제요?”
“음?”
상혁은 좀처럼 맞물려지지 않는 대화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잠시만, 그 표정 뭐야…? 설마 지금 누구랑 헷갈리는 거야? 이상혁 씨, 제가 처음이라면서요….”
현지는 밝았던 얼굴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색하며 물어댈 뿐이었다.
“아닐 텐데….”
“음… 아…? 고등학교 때 일주일 정도 문자 했던 거? 근데 내가 이걸 너한테 말했었나…?”
“…이거나 저거나. 지금은 상관없지만, 당시의 나에게 얼마나 슬픈 일이었으면 이렇게 기억하고 있겠어.”
“저기… 반응은 당시가 아니라 지금까지인 것 같은데요?”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는데”
“남자는 여자의 첫 번째 사랑이 되길 바라고,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 되길 바란다!”
“오….”
“어떻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는 말이 똑같아!”
“하하….”
상혁이 대사를 가로채인 탓에 부끄럽다는 듯 작게 웃자,
그런 모습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였을 현지는 남은 손으로 상혁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며 말을 이었다.
“내가 우리 이 작가님 덕분에 별의별 명언을 외우고 다녀요!”
흐릿해진 기억들이 일곱 빛깔을 곁들여 다채롭게 떠오를 때.
상혁의 코끝엔 왠지 모를 낯선 향기들만 느껴졌다.
지금의 분위기가 달콤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낯선 기분이 느껴진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도대체 나랑 누구를 헷갈리신 걸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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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서로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오랜만일 데이트.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려 들린 식당은 다시는 오지 않을 식당 1위로 선정했고,
추운 날씨 탓에 아무도 없는 공원을 벌벌 떨며 거닐다, 딱히 사고 싶은 물건도 없이 명동 거리를 구경했다.
그러다 발견한 연유도 모르는 긴 줄에 호기심이 생겨 따라 서 있다, 엉겁결에 흥미도 없는 전시회를 관람하게 된 것까지.
여기까지가 오늘만큼은 바꾸고 싶지 않았던 상혁의 바람 그대로 진행된 데이트였다.
그리고 잠시 쉬어가려 들른 카페 창가 자리에서 바깥 거리를 바라보며 멍해지려는 찰나였다.
“전시회는 데이트코스가 아닌 걸까?”
“응?”
“마냥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연인은 우리뿐이었고, 대부분 가족이었잖아.”
“…그랬나?”
“옛날에 열렸던 전시회도 똑같은 모습이었을까?”
“흠… 진지하게 대답해?”
“응, 응. 자기 생각 궁금해.”
“최초의 전시회라면 무엇인가 자랑할 것이 있는 계층 사람들의 소모임 정도였을 거야.”
“와….”
“다만, 자기가 궁금한 옛날은 그 정도로 옛날이 아닐 테니까… 그래, 그러면 병원을 예로 들어보자.”
“병원?”
“응. 누군가에게 병원은 자식이 태어난 장소여서 추억이 담긴 장소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가족이 죽은 장소여서 슬픈 장소일 수도 있지?”
“그렇죠…?”
“그리고 자기는 전시회장에서 가족들이 보였다 했지만, 나는 딱히 보지 못했고.”
“자기는 뭐가 보였는데?”
“…오글거릴 수 있습니다.”
“괘, 괘, 괜찮습니다!”
“나는 네가 전시회에 만족은 하고 있는지, 어떤 작품을 눈여겨보는지, 그러다 주변 사람이랑 부딪히지는 않을지… 그런 것들을 신경 쓰느라 바빴거든. 그러니까”
“큭큭, 귀엽네! 그래서 즉?”
“즉, 내가 어떤 장소를 누군가와 무엇을 하는 곳이라 정의해도, 그건 내게만 한정되는 정의일 뿐이야.”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구나….”
“응. 원하고 바라는 만큼만 보일 테고, 또 그 정도만 담길 테니까. 게다가 뭐가 중요하겠어. 자기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해.”
“흠….”
평범했던 고민이 조금 복잡하게 풀어진 것 같지만, 그런 진지한 답변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그렇구나.”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런 모습을 확인한 상혁이 살짝 웃어 보이며 대화를 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 전부 떠나서, 우리가 갔던 전시회가 문제 아닐까?”
“응?”
“세상 어떤 연인이 도자기 전시회를 보러 가겠어… 그리고 그런 코스를 짜는 남자친구가 세상에 있기는 하겠어?”
“그것도 그렇네… 근데 그건 너무 자기비하적인 발언 아니야?”
“네?”
“나는 내 남자친구의 데이트코스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고!”
“저… 우리는 어쩌다 들어간 거잖아.”
상혁에겐 두 번째일 대화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상혁의 머릿속엔 현지의 가족에 관한 무수한 의문이 줄지어 서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가족에 관한 대화의 서두가 열린 지금이 쌓여왔던 의문을 해결하기 적기라 판단한 것일까.
“자기야.”
상혁이 조금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현지를 불렀다.
“응?”
“그, 어머님이랑 아버님”
“아, 맞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 아니,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현지가 상혁의 많을 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수상하게 보일 정도로 경직된 모습으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야! 잠시만,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그리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상혁은 그런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현지가 가족에 관한 질문을 의도적으로 피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기억조차 무뎌졌던 습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다.
그건 상혁도 마찬가지였고, 연애 초기에 현지에게 그런 질문을 하곤 했었다.
다만, 그럴 때마다 현지는 지금처럼 자리를 피하거나, 대화 주제를 억척스럽게 돌리려 했었다.
그런 탓에 상혁은 현지에게 말 못 할 가정사라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질문을 자제해왔다.
무뎌졌던 기억, 저도 모르게 지키기 시작한 습관일 뿐이었다.
기억은 그런 식으로 결론 나는 것 같았지만,
“잠시만….”
어딘가 이상했다.
상혁은 앞뒤가 맞지 않는 묘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기억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오늘은 가족 외식! 저녁은 혼자 먹어!’
‘다음 주에 가족 여행가니까, 나 없다고 슬퍼하지 말 것!’
“윽…!”
그런 기억을 떠올리자 시작된 날카로운 두통.
그리고 그런 순간, 현지가 자리로 돌아왔다.
“갑자기 미안….”
“…아니야. 괜찮아, 무슨 일 있어?”
“깜빡하고 있었는데, 회사에 보낼 문서가 있었거든. 늦어서 죄송하다고 전화했어. 얼른 메일 좀 보낼게!”
“중요한 문서면 집에 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이거로 해결 가능! 내게 쓰기로 저장해뒀거든.”
“…천천히 해.”
정말 메일을 보내고 있는지, 밖에 나갔을 때 회사에 전화한 건 맞는지.
상혁의 눈엔 현지의 행동이 가족에 관한 질문을 피하고자 벌이는 연기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메일 보내는 것에 집중하느라, 옷소매에 케이크가 묻는 것도 모를 정도로 덜렁이는 현지의 모습.
그 모습엔 현지답다는 자연스러움이 묻어있었기에.
“…자기야 옷에 크림 묻는다.”
“어? 에! 어떡해!”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었던 상혁이 당장의 의심은 거두고, 현지에게 휴지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카운터에서 물티슈라도 받아올까?”
“아니야, 아니야. 안 닦이면 나중에 세탁소 맡겨야지 뭐… 그리고 메일 보냈어!”
“고생했어.”
“맞다, 우리 저녁 먹고 돌아가?”
“응. 여덟 시 예약인데, 취소할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영화 미리 예매할까 해서.”
“아까 예매해놨어, 완벽한 타인.”
“어? 완벽한 타인? 아니, 예매해놨다고? 언제? 어떻게? 나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 자기도?”
“응. 자기가 좋아할 것 같더라고.”
완벽한 타인은 두 사람이 원래의 과거에서 보지 못한 영화였다.
좌석이 전부 매진인 탓에 적당히 다른 영화를 관람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 했던 오늘의 데이트 중, 상혁이 유일하게 바꾼 게 바로 영화였다.
“어제 개봉해서 모를 줄 알았는데… 오구오구, 잘했어!”
그건 제가 정말 과거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과도 같은 것이었고,
“운이 좋았네.”
비로소 상혁의 과거도 새롭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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