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4화 (4/76)

〈 4화 〉 #4. 반지

* * *

#4. 반지

[18년_11월_23일_금요일]

[02:00]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상혁이 향한 첫 번째 과거의 직전인 새벽에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유난히도 환했던 달빛이 커튼에 가려져 어스레한 분위기의 침실.

그리고 그런 침실에 놓인 침대 위엔 고민에 잠긴 남자, 상혁이 좀처럼 잠들지 못하며 뒤척이고 있었다.

남자는 일생에 단 한 번, 서로에게 오랫동안 회자될 낭만적인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무거운 고민을 떠안고 살아간다.

분명,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청혼만큼은 남자가 해내야 하는 전유물 같은 게 되어버린 것인지.

상혁은 남자들이 처한 지금 상황이 서양식 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발생한 폐해라 생각하면서도,

막상 청혼을 승낙한 현지의 모습을 상상하면 입가는 자동으로 헤벌쭉 벌어졌기에.

그렇기에 이런 수줍은 모습을 곤히 잠든 현지에게 들킬까, 몸을 등이 굽은 새우처럼 웅크렸고,

“….”

베고 있던 베개를 가슴팍에 조용히 밀어 넣으며, 그것을 터질 듯이 세게 끌어안았다.

이렇게 사랑하면서, 청혼하지 않는 이유.

그건 멀지 않은 과거에서 이별이라는 위기를 겪었던 서로였기에.

상혁은 청혼을 잠시 미루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설이는 게 아니라, 현지가 청혼을 거절하지 못할 최적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무조건 성공하겠다는 의도는 조금 불순하게 보일 수 있어도, 그 또한 사랑에서 시작된 모습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준비된 반지는 영문도 모른 채, 서랍 속에서 몇 개월째 청혼만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푸르스름한 방에서 귓가를 제 마음처럼 붉혀대는 상혁이었지만, 이젠 슬슬 잠이 오는 듯.

점점 감기는 눈에 현지의 뒷모습을 담기며 잠들려 하는 순간이었다.

“너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을까?”

자는 줄 알았던 현지에게서 다가온 질문.

낮게 깔린 목소리는 감겨오던 두 눈을 번뜩이게 할 만큼 갑작스러웠고,

그것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상혁은 몸을 반쯤 일으키며 서둘러 대답했다.

“어? 자는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현지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에 미동조차 없는 그녀의 등은 질문의 의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너는 분명, 내가 아니어도 행복했을 거야.”

어떤 대답을 전해야 좋을까.

수줍었던 마음은 조바심 탓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상혁은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한 뒤, 현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려는 것처럼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이번에도 현지는 고개를 돌려주지 않았다.

“혹시 내가 무슨 잘못 했어?”

“그런 거 아니야.”

거기에 오히려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듯.

현지가 고개를 베개 방향으로 파묻다, 조금 더 차가워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갑자기 이상한 말 꺼내서 미안. 괜한 말 했네. 그만 자자.”

“어… 응.”

일방적으로 시작된 대화는 끝맺음마저도 일방적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 탓이었을까.

상혁은 일전에 서로가 헤어질 뻔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글을 쓰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상혁의 하루는 대부분 컴퓨터 앞에서 흘렀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던, 자신조차 확신이 서질 않아서 의심했던 시절.

불안에 젖어, 자존심이 무너져 짓밟혔더라도 꿋꿋이 벽만 보며 글을 썼고, 그런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 등단에 성공했을 때.

상혁은 자신을 기다려준 현지와 행복한 내일을 맞이해야 했지만, 둘 사이엔 오히려 위기가 찾아왔다.

그건 상혁에게서 시작된 문제였다.

상혁은 자신이 언제나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 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등단이 되기까지 몰두해 있었던 4년이라는 시간 속, 단 하나의 이야기.

그런 긴 이야기를 끝내고 찾아온 허탈감은 두 발에 족쇄처럼 묶여버렸다.

남들보다 일찍 도착한 탓이었을까.

성공이라는 업적은 이전보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변해, 제 목을 조이는 불길한 손길로 변질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어두운 감정은 상혁에게 새로운 그림자가 되어 매 순간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공황장애였다.

현관을 나설 수도 없었고, 하다못해 서재와 거실을 구분 짓는 낮디낮은 문지방마저 넘어설 수 없었다.

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려왔던,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현지의 모습이 느껴지는데도.

자신을 옭아매는 그림자에 막혀, 현지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가 그런 상혁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시간,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상혁의 집에 찾아왔다.

그리고 얇은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상혁에게 자신의 하루를 전했다.

30분 내지의 시간은 점점 늘어져 갔고, 점점 벌어지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빛이 상혁의 주변을 밝혀줬다.

이겨내야 했다.

상혁은 현지가 다가올수록 제 뒤로 늘어지는 그림자가 신경 쓰였을 테지만,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게 동거였다.

동거는 서로의 시간을 되찾기 위한, 관계를 지켜내기 위한 좋은 방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결국, 방편은 방편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상혁의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둘에겐 습관적인 잠자리라는 악습만 반복될 뿐이었다.

그런 시간이, 상혁에겐 빠르고 현지에겐 느렸던 시간이 1년 정도 지났을 때.

쌓는 것이 어렵고, 무너지는 것이 한순간이라던 신뢰가 무너졌다.

물론, 현지에겐 한순간이 아니었다.

매 순간 무너지던 것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뢰가 끝끝내 무너지고 말았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건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뿐이었다.

그렇게 이번에는 둘의 관계가 벌어졌고, 점차 이별이라는 절차를 밟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이건 연인들의 흔하디흔한 이별 과정이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

다만, 이 이야기는 현지가 서로의 관계를 포기한 순간에 끝났어야 했지만, 그러질 못하고 말았다.

상혁에겐 이별이 방아쇠가 된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나서야, 자신의 문제를 마주할 수 있었고,

그런 상혁이 결국, 제게서 한 가지를 지워냈다.

그건 바로 글이었다.

글만 포기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터라 믿었기에.

상혁은 제 인생에서 전부였을 문예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밝은 빛이 되어주었던 현지를 붙잡으려 했다.

난생처음으로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편지를 쓰고,

회사에 1차 합격 문자를 받고 문자를 보내고,

2차 면접 날엔 현지의 집 앞에서 몇 마디 다짐을 건네며 떠나고.

그리고 그런 시간이 늘어져 어쩌다 마시게 된 커피 한 잔.

현지는 상혁에게 여지를 주려 했던 것도, 헤어지자는 말을 통해 이렇게 변할 상혁의 모습을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저를 붙잡겠다며, 문예까지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 힘겹게 돌렸던 마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쉽게 화해한 것 같지만, 회복하는 시간은 조금 오래 걸렸던 두 사람의 관계.

상혁이 결혼을 결심한 것도 약 8개월 전인 이 무렵이었다.

현지 없이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제 모습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상혁은 최근 제 모습까지도 전부 돌아봤지만, 이전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 사건 뒤로는 현지와 무의미한 잠자리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런 탓에 현지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건 사랑하는 여자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남자가 되어줘야 한다는 것.

상혁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운 것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애타게 기다렸던 최적의 순간이 아닐 테지만, 상혁은 침대 옆 서랍에서 조용히 반지를 꺼냈고,

이불 속에 숨겨진 현지의 왼손을 찾아, 그녀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헐거운 반지를 빼내고 새 반지를 끼우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맞추는 거라 걱정했는데, 조금 크네… 그래도 일단,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음….”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청혼에 사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해야 할 말이 있어. 그, 내일 자기 쉬니까 데이트 가자.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우리 처음 데이트했던 명동도 가고, 평범하게 영화도 한 편 보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도 먹자.”

그건 정말 평범한 하루가 될 테지만, 그런 평범한 일상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세울 수 있었던 계획.

“그쯤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둡겠지…? 그럼 그때 괜찮은 가로등 아래서 말할게.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상혁이 남몰래 그려온 내일의 모습을 전했지만,

“….”

현지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그런 어두운 분위기로도 제 마음을 막을 수 없다는 듯.

상혁은 현지의 등에 이마를 기대며, 몇 번을 전해도 끝나지 않을 따스한 사랑을 속삭였다.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너란 사람 덕분에 늘 행복해. 좋은 꿈 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