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3. 프롤로그(3) – 과거를 바꾸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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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롤로그(3) 과거를 바꾸는 방법
[19년_11월_29일_금요일]
[20:30]
“여기까지입니다….”
오래된 일들을 떠올린 탓이었을까.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들을 전부 전한 상혁이 지친 기색을 비치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고,
“고생하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전부 받아 적은 노신사는 그 종이 뭉치를 책상 서랍에 돌려 넣으며 말을 이었다.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꽤 선명한 장면을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음, 이제 시작이죠. 슬슬 준비해야겠군요.”
노신사는 무심하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옆에 놓인 수납장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상혁의 얼굴을 뒤로하고 꺼내 든 건, 조금 낡은 나무상자였다.
“이건…?”
상혁이 짧게 묻자, 노신사는 상자를 열어 안에 있던 물건을 꺼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무상자 안에 있던 건 모래시계였다.
다만, 그런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속이 텅 비어있었다.
“오랜만에 꺼내는군요.”
“속이 비어있네요….”
“이제 채워야겠죠. 자, 어디 보자….”
노신사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려는 것처럼 상혁의 몸 이곳저곳을 훑어봤다.
그리고 이내 원하는 물건을 발견하곤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장 가까운 과거가 좋겠죠. 그거 주시겠어요?”
노신사가 상혁의 왼손을 가리켰다.
“…네?”
상혁은 연달아 의문만 생기는 상황이 답답했지만, 그래도 노신사가 가리킨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노신사는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고개를 저어대며 말을 이었다.
“아뇨, 약지에 그거요.”
노신사가 가리켰던 건 상혁이 현지에게 청혼하기 위해 맞췄던 반지였다.
“가고 싶은 과거가 담긴 물건. 소중한 물건엔 그만큼의 시간과 추억이 담겨있기 마련이지요. 그에 따라, 과거로 갈 수 있는 시간도 정해지고요.”
“…하하.”
상혁은 허무맹랑한 소리에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실소를 뱉어댔지만,
오른손으론 그토록 아끼는 반지를 빼어냈고,
“하….”
끝끝내 노신사를 믿으려 드는 제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긴 한숨을 내뱉으며 반지를 건넸다.
반지를 건네받은 노신사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7일이네요.”
“네?”
“음,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아까부터 그렇게 말씀하셔도”
상혁의 말이 또다시 무기력하게 끊어지게 된 건, 열쇠 때와 같은 몽환적인 현상이 시작된 탓이었다.
노신사의 손 위에서 흐릿해지는 반지.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반지가 끝까지 흐려지지 않고 모래처럼 변해, 비어있던 모래시계 하단부에 흐르듯 담기는 것이었다.
상혁은 그런 현상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고,
“시작하겠습니다.”
노신사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것을 직감한 상혁이 다급히 말하려 했지만,
“네, 네? 잠, 잠시만”
상단부로 올라간 모래 알갱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였다.
“윽!”
상혁은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제 이마를 붙잡았다.
“점점 흐려질 겁니다.”
그리고 노신사의 말 따라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를 악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그럼 두 번째 시간, 잘 사용하시”
시야는 물론, 노신사의 말까지도 끝까지 붙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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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_11월_23일_금요일]
[09:30]
흐려졌던 의식이 번뜩이며 돌아온 상혁의 눈앞엔 어딘가 낯익은 천장이 나타나 있었다.
“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집 안방 천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혁은 자신에게 펼쳐진 지금이라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 노신사를 마주하고 있었고, 갑작스레 찾아온 두통에 눈을 감았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누워있는 것인지.
상혁은 제가 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침대에 누워있는 온몸에서 전해지는 감각들이 선명하게 소리쳤다.
이건 현실이라고.
볼 따위 꼬집지 않아도 분명한 현실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상혁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평소 습관대로 베개 오른편에 놓여있을 휴대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곳에 정말 휴대전화기가 놓여있다는 것에 놀랄 틈도 없었다.
그건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는 두 눈이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탓이었다.
“말도 안 돼….”
고요한 침실에 현실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상혁에게 오늘은 19년 11월 29일 금요일. 현지의 첫 번째 기일인 날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18년 11월 23일 금요일. 이날은 상혁이 현지에게 청혼했던 날이자, 그녀와 헤어지게 된 날.
정확히 1년 전 그날인 것이었다.
“설마….”
[달○락○그락…]
그런 예감과 동시에 들려오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진 소리.
상혁은 그런 소리를 믿을 수 없었지만, 두 발은 황급히 침실을 나섰다.
[달그락달그락…]
거실로 나오자 더욱더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 그 소리는 아침을 맞이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리도 다급히 뛰쳐나온 상혁이었지만, 소리가 들려오는 주방으로 향하는 두 발은 무척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눈을 뜨면 보였던 것들이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상혁은 커튼을 치고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현지를 볼 수 있길 바란 것이었다.
그랬던 거실 커튼은 완전히 젖혀져 있었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이 상혁이 바라보려는 곳을 환하게 밝혀줬다.
“일어났어?”
목을 반쯤 가리는 단발머리가 상혁을 바라보기 위해 흔들거렸고,
평소엔 검은 그 머리카락에 햇살이 담겨, 유난히 밝게 빛나 보였다.
“현지야…?”
“응?”
오른쪽 눈 아래 나 있는 작은 점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간 건, 현지가 고개를 갸웃거린 탓이었다.
“김현지 맞아…?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뭐야… 잠 덜 깼으면 조금 더 누워있어. 밥 다 차리면 깨워줄게.”
“이게 무슨….”
지극히 평범한 아침을 맞이한 현지와 유난히 혼란스러운 아침을 맞이한 상혁.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길 한참.
“아!”
현지가 상혁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어느 정도 짐작된다는 듯, 식사 준비를 멈추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거 때문에 그래?”
그리고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새 반지를 들어 보이곤,
“헤헤.”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상혁의 품에 안겨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반지는 어디서 나타났을까? 새벽에 무슨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11월에 산타 할아버지는 조금 이르지 않나?”
현지는 여느 때처럼 장난스럽게 조잘거렸지만, 상혁은 그런 여느 때를 실감하기가 어려웠다.
하다못해 제 품에 안긴 현지에게서 전해지는 감각마저도 실감하기가 힘들었다.
현지에게선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체취가 풍겨오고 있었지만,
그녀를 잃고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이 그런 그리운 감각을 낯설게 하는 것이었다.
“….”
모든 것이 꿈만 같았기에, 무뎌진 현실감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상혁은 현지가 자신을 안은 것보다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꺅! 뭐야, 왜 이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애틋한 사랑이 전해졌지만, 현지에겐 그런 애틋함이 낯설기만 할 뿐이었기에.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야. 혹시 어디 아파? 아니면 악몽이라도 꿨어…?”
현지는 상혁이 아픈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그에게 붙잡힌 허리를 뒤로 살짝 내빼, 서로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뭐야, 뭐야! 어젯밤부터 이상하잖아!”
그리곤 상혁의 낯선 분위기를 의심하는 척,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뒷걸음질쳤고,
식탁에 잠시 내려뒀던 국자를 집고 휘휘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이상혁으로 변한 다른 사람 아니야? 아침부터 너무 이상하잖아!”
현지의 모습은 장난기 넘치고,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일 뿐이었지만,
“….”
정작 상혁에겐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마주한 현실이 원래의 것과 조금씩 달라, 이질감이 느껴진 것이었다.
“잠시만….”
조금씩 뒤바뀌기 시작하는 과거에 어지럼을 느낀 상혁이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진정할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울렁이는 속을 견딜 수 없는 탓이었다.
상혁은 욕실 문을 잠그고 세면대 앞에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리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상혁이 이토록 괴로운 모습을 보이는 건,
손과 얼굴이 얼어붙는 것 같은 물의 냉기도, 좀처럼 멈춰주지 않는 날카로운 두통도, 터질 것 같이 쿵쾅거리는 심장의 떨림 탓도 아닌,
조금 전에 끌어안았던 현지에게서 느껴진 그리움이라는 감각.
그 감각을 낯설어하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하….”
상혁은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말끔했다.
그 모습이 지금은 1년 전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진정해야 했다.
상혁은 그러기 위해선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며 1년 전 오늘, 현지와 보냈던 아침을 떠올렸고,
“된장국… 계란프라이랑 토마토주스였지….”
그녀가 차려준 아침 식사를 입으로 되새겼다.
이런 사소한 것마저 기억하고 있는 건 오늘이라는 과거를 정말 많이 후회하며 살아온 탓이었다.
“후….”
상혁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욕실을 나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현지를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선 된장국과 계란프라이, 상혁을 금연시키기 위한 토마토주스가 만들어지고 있었고,
여기까지 확인한 상혁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올해가 몇 년도지…?”
상혁은 제가 이런 장르의 소설을 썼다면, 절대 적지 않았을 것 같은 진부한 대사를 뱉었지만,
“18년이잖아….”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날은…?”
막상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땐, 떠오르는 대사가 이런 말뿐이라는 것을 절감하며 질문을 이었다.
“누가 어디서 고백했는데?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어, 어? 음… 15년 1월 17일 토요일! 내가 너희 부대 앞에서! 그리고 처음 만난 곳은 대학교 대강당 건물 앞!”
“그러면….”
“질문 떨어진 모양인데, 저기요…? 이런 건 내가 물어보는 게 맞지 않아?”
“내 생일은… 하… 아니야….”
더 이상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듯. 상혁이 맥빠진 얼굴이 되어 현지를 바라봤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기억하는 얼굴이 분명했다.
하다못해 현지가 서 있는 거실의 풍경마저 상혁의 기억과 그대로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모든 게 1년 전 그날과 똑같이 재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일 차례를 마주한 상혁의 귓가로,
‘바꿀 수 있어요.’
노신사가 했던 말이 스치듯 들려왔다.
“아…?”
‘가장 가까운 과거가 좋겠죠.’
‘7일입니다.’
“잠, 잠시만… 설, 설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모든 것을 이해한 순간.
상혁이 7일이라는 시간을 부여받고, 이곳에서 현지의 죽음을 막아낸다면.
그렇다면 현재로 돌아갔을 때, 현지가 되살아나 있을 것이라는 영화 같은 이야기.
그리고 그런 희망을 머금은 상혁의 목젖까지 차오른 말은 그간 자신에게 수없이 되묻던 말.
‘왜 자살했어? 도대체 왜…?’
“어젯밤도 그렇고… 역시 이상한데….”
물론, 당연히 뱉을 수 없는 말들일 뿐이었다.
“….”
상혁은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는 손으로 이마를 식히며 감정을 추슬렀고,
현지는 그런 상혁의 마음도 모른 채 냉장고 옆에 몸을 숨기곤, 고개만 살짝 내밀며 말했다.
“너 이상혁 아니지!”
“…이상혁 맞아.”
이제야 갈피를 잡은 상혁이 맞은편 식탁으로 향해 의자에 앉아, 납골당 입구에서 연습했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미안, 잠이 덜 깼나 봐. 아침부터 멍하네.”
“어? 이상혁 맞는데…?”
그리고 현지도 그런 익숙한 모습에 의심이 풀린 듯,
“바보야! 아침부터 왜 그러는 거야!”
상혁의 앞으로 다가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미안, 엄청 무서운 꿈을 꾼 것 같네.”
“꿈?”
“별거 아니야. 그… 우리 밥 먹고 바로 나갈까?”
“싱겁긴… 근데 이렇게 일찍? 나야 좋은데… 저녁에 피곤해하기 없기다?”
“응, 응.”
현지는 자신의 앞치마 끝자락을 붙잡고 말하는 상혁을 내려 보다, 다시 한번 지난밤을 떠올렸다.
오늘 저녁에 청혼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뒤 잠들었던 상혁이 지금은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지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행복한 기분만 들었기에.
“큭큭. 그럼 얼른 밥 차리게 이것 좀 놔줄래?”
그렇게 말하며 상혁의 머리를 끌어안고, 서로의 사랑을 더욱더 깊게 만끽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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