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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93화 (완결) (93/93)

93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10)

2018.05.21.

그리워서, 사무쳐서, 윤영은 서울로 오자마자 재경의 집으로 향했다.

일방적으로 피한 지 오래됐지만, 연락 한 통에 재경이 나와 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재경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마음을 정하고 싶었다.

이 남자를 신뢰할 수 있을지, 이 남자와 함께하면서 나루를 질투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오피스텔 계단에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서로를 응시하는 나루와 재경.

물론 나루가 재경에게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그 다정한 눈빛은 소중한 친구를 향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경도 그럴까?

재경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나루와는 다른 빛이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돌아섰고, 그래서 도망쳤다.

하지만.

“거기 서!”

나루의 거친 외침에서까지 도망칠 수는 없었다.

“거기 서, 김윤영!”

“따라오지 마!”

“따라갈 거야! 그러다가 나는 넘어지겠지! 다칠 거고! 아플 거고! 울 거야!”

우뚝―

윤영은 달리기를 멈췄다.

나루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나루가 다가왔다.

“왜 도망쳐?”

“너랑 재경이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나랑 지후 사이에 끼어들지 말아야지.”

“그래, 그럼 재경이가 널 보는 걸 방해할 수 없어서.”

나루는 입을 꾹 다물고 윤영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내기 어려워, 윤영은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시골이었잖아.”

“짜증나서 올라왔어.”

“그럼 나랑 같이 자자. 나도 짜증나서 집 나왔거든.”

“너는 왜?”

“그냥 이런저런 일들이 좀 있었어. 우리 오랜만에 비싼 호텔에 가서 데이트나 할래?”

20대 때, 둘은 가끔 고급 호텔에서 1박을 하며 놀기도 했었다.

“그러자.”

저 멀리, 재경이 오피스텔 입구에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재경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그러려면 지금 짓고 있는 이 표정도 보여 줘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경아, 나 윤영이랑 호텔에 갈 거야.”

나루가 재경을 돌아보고 외쳤다.

재경이 알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나루는 윤영과 함께 호텔로 향하며, 지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윤영이랑 호텔 가서 자고 들어갈게.]

* * *

휴대폰을 쥐고 있던 지후는, 나루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답을 보냈다.

[그래.]

그러고 나서 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내가 나루랑 호텔 갔을까 봐?]

재경이 전화를 받자마자 웃음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거 아냐. 나루 기분은 좀 어때?”

[생각처럼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신경 좀 써줘. 아이가 안 생기는 거, 여자가 더 스트레스 받는 일이니까.]

“그래.”

[너는 괜찮다고 할지 몰라도 나루 마음은 그렇지 않을 거야. 너도 나루가 원하는 걸 못 해주게 되면 계속 신경 쓰일 거 아냐.]

“하지만 나는 나루만 있으면 돼.”

[그래, 그래. 하지만 나루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

“그렇게 여자 마음을 잘 알면서 윤영이한테는 왜 그러냐?”

[야, 화살을 나한테 돌리지 말아 줄래? 이건 답이 없는 문제라고.]

“답이 없긴 왜 없어? 윤영이는 확신이 필요한 거야. 네 마음에 대한 확신. 걔가 피한다고 너도 피하면 어떻게 하냐?”

[그럼 나보고 어쩌란 거야?]

“이 남자 나 없이 못 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매달려. 동정심에서라도 받아주겠지.”

* * *

호텔에 가는 길에 명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전을 부치고 싶지 않다고,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다고 하기에, 명진도 호텔에 오라고 했다.

어찌나 빨리 도망을 쳤는지, 명진이 먼저 호텔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 왜들 이렇게 늦게 와? 얼른 들어가자, 얼른. 눕고 싶어!”

명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체크인을 하고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명진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쟤는 진짜.”

나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명진이 사온 맥주와 소주를 테이블 위에 꺼내 놨다.

“넌 안 마실 거야?”

“여자들만의 시간이잖아. 난 그냥 이 호텔의 가구 정도로 생각해 줘.”

“가구는 쓸모라도 있지.”

윤영이 혀를 찼지만, 명진은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뭐가 문제야?”

나루가 맥주를 건네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윤영은 이제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고민들을 늘어놓았다.

“네 걱정이 뭔지는 알겠어.”

이야기를 다 들은 나루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재경이도 마찬가지 상황이 아닐까?”

“응?”

“너도 지후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잖아.”

“아…….”

그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구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명진이 끼어들었다.

“넌 입 다물고 있어, 윤명진.”

“아니, 왜? 그렇잖아. 상황은 재경이도 똑같아. 너는 지후를, 재경이는 나루를. 그래, 짝사랑한 적이 있지. 하지만 넌 어때? 이제 지후를 사랑할 일 없다는 거 확신하지? 그렇다면 재경이도 마찬가지인 거 아냐? 나루를 사랑할 일 없다는 걸 확신하니까 너한테 고백했을 거라고.”

명진이 청산유수처럼 말했다.

“그래도 옛 시간에서는…….”

“옛 시간의 기억은 좀 버려라, 버려. 그 일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걷고 있어. 네가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너는 평생 이러고 살아가야 할 거야!”

명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윤영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해. 때로는 질투를 하기도 하고, 의심을 하기도 하고. 그건 당연한 거야.”

“나루, 너도 그래?”

“당연하지. 가끔은 기분이 상할 때도 있고, 서운할 때도 있고. 그럴 때마다 대화를 하고 풀어 나가. 사랑하니까, 영원히 안 볼 게 아니니까. 그거 알아, 윤영아? 옛 시간에서 재경이는 해외 봉사를 나갔었어. 한국에 잘 돌아오지 않았지.”

“응, 널 잊고 싶으니까.”

“날 잊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재경이는 원래 그걸 위해 의사가 되려고 한 거였어. 그렇다면 이 시간에서 재경이가 해외 봉사를 나가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거야…….”

윤영은 말문이 막혔다.

“너 때문이잖아, 멍청아.”

명진이 대신 대답했다.

“네 옆에 붙어 있으려고, 널 더 보고 싶어서. 그래서 걔가 안 나가는 거야. 모르겠냐?”

“…….”

“걔, 바쁜 놈이야. 그런데 어떻게든 시간 조정해서 널 만날 시간을 만들려고 했어. 알아? 걔, 잠잘 시간도 쪼개면서 널 만난 거야.”

“알아, 그런 거.”

“그게 널 동정해서겠냐? 자길 짝사랑하는 네가 불쌍해서, 그 정도까지 하겠냐? 너는 어떤데? 널 짝사랑하는 놈이 불쌍해서 그런 짓까지 해 줘?”

대답할 말이 없었다.

“불안한 건 당연해.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면 뭐가 되는데? 덜 불안해? 덜 아파? 덜 불행해?”

그렇지 않았다.

더 불안하고, 더 아프고, 더 불행했다.

“만나면서 생기는 불안은 서로 얘기해서 풀면 돼. 그러면 언젠가는 그 불안조차 사라지겠지. 대체 왜 해 보지도 않고 피하려는 거야? 진짜 답답하네.”

자기 일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명진을, 나루가 빤히 응시했다.

“너야말로 그런 이유로 사랑도 안 하면서, 참 말이 많다?”

“관두셔. 나는 이게 편해서 사랑 안 하는 거니까. 하지만 이미 사랑이 시작됐다면, 망설이지 않고 부딪쳐 보이는 게 예의 아니냐?”

“대체 누구에 대한?”

“사랑에 빠진 마음에 대한.”

* * *

명절 연휴, 나루, 명진과의 대화는 윤영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윤영은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을, 그리고 재경을 되새겨 보았다.

나루의 말이 옳았다.

윤영도 짝사랑을 했고, 재경도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윤영이 아무리 지후에 대한 마음을 거뒀다고 해도, 그건 재경이 알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럼에도 재경은 용기를 냈고.

‘나는 그런 재경이를 밀어냈지.’

바보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바보 같은 짓은 빠르게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낭비했다.

두려워서, 무서워서, 흘려보낸 시간이 아쉬웠다.

윤영은 먼저 상운을 따로 만나 이야기했다.

“상운아. 우리 이런 관계는 여기까지만 하자.”

“우리, 어떤 관계인데?”

“네가 날 짝사랑하고, 나는 그걸 이용하는 관계.”

“좀 더 이용해도 돼.”

“아니,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어. 내가 설령 평생 짝사랑을 하더라도, 네 마음을 이용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누나.”

“나는 이제 마음을 정했어. 그래서 너한테 참 고맙고 미안해. 너는 나한테 많은 위로가 되었고, 너와 함께한 시간도 즐거웠어.”

부드럽게 말하는 윤영의 모습에, 상운은 여기서 끝이라는 걸 깨달았다.

윤영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보니, 더 이상 매달려 보아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삼아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지만.

‘여기까지인가 보네.’

“누나 동생 사이도 안 돼?”

“응, 안 돼. 당분간은, 우린 사적으로 연락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알겠어. 나도 즐거웠어.”

상운과의 관계는 그렇게 담백하게 끝이 났다.

그날 밤 상운이 홀로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린 것은, 윤영이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몇 년 후, 상운은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되지만, 그것 또한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윤영은 재경을 찾아갔다.

그가 일하는 병원 앞에서, 일하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참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두 시간, 흐르던 시간이 어느새 5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퇴근을 하는 재경이 병원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윤영은 조용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땅을 보며 걷던 재경은 아래에 보이는 운동화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서서히 고개를 든 재경은, 앞에 서 있는 윤영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윤영아?”

“사랑을 하고 있어.”

“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어. 짝사랑을 해 왔어. 그만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그래서 난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어.”

“아…….”

재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백을 해 줘서 고마워. 그걸 거절해서 미안해. 나는 무섭고 걱정이 됐거든.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너도 그러리라는 걸. 그런데도 내게 손을 내밀었으리라는 걸.”

“…….”

“여전히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사실 나는 계속 상상을 했어. 너랑 연애를 하고, 데이트를 하고, 그러다가 결혼을 하는 상상. 항상 그런 생각을…….”

“나도.”

재경이 윤영의 말을 끊었다.

재경은 두 손으로 윤영의 양쪽 볼을 감싸고 눈을 맞췄다.

“나도 그래. 나도 항상 상상했어. 너와 손을 잡고 걷는 상상. 그러면 아마 이 세상에 너와 나, 단둘만 남은 기분이 들겠지. 그래도 좋으니까. 이 세상에 둘만 있어도 좋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우리 둘은 셋이 되고, 어쩌면 넷이 되겠지.”

“널 닮은 아이?”

“아니, 널 닮은 아이.”

재경이 웃었고, 윤영도 웃었다.

윤영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재경의 손가락을 적셨다.

“매일, 매일 이야기를 하자. 대화를 아주 많이 하는 거야. 가끔은 걱정될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솔직하게 얘기하고, 들어주자, 서로.”

“응.”

“우리는 굉장히 행복해질 거야. 왜냐하면…….”

재경이 고개를 숙여, 윤영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널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니까.”

“나도야.”

“그래, 그럼 우리 서로.”

“응, 서로.”

먼 길을 돌아 걷던 사랑이 겹쳐졌다.

그 길을 외로이 걷는 동안 만들어지고 다져진 사랑은, 그랬기에 겹쳐지는 순간이 더욱 아름다웠다.

그 새벽, 병원 앞에서 또 하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그 시간의 주인공은 재경과 윤영이었다.

* * *

“네?”

나루의 눈이 커졌다.

나루와 지후는 손을 잡고 있었는데, 둘 모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산부인과 의사가 웃었다.

“그러니까, 이미 임신을 하셨다고요.”

“아…….”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나루의 입술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연휴가 끝나자마자 검사를 해 보기 위해 병원에 온 터였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며칠 걸릴 줄 알았는데, 곧바로 이런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증상이…….”

“간혹 임신을 하고 나서도 생리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요.”

“그건 그런데…….”

“평소보다 양이 적었을 거예요.”

“네, 그건 그런데…….”

“축하드려요. 앞으로 식사 조심하시고, 정기적으로 와서 검사받으세요.”

나루와 지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병원을 나왔다.

아직은 현실감이 없어서, 둘 다 멍한 표정으로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멍하게 차에 도착했고, 멍하게 차에 탔다.

탁―

차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루가 지후를 돌아봤다. 지후도 나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제야 둘은 현실로 돌아왔다.

“지후야, 나 임신했어.”

“응, 그래.”

지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부모가 되는 거야.”

“응, 그래.”

지후가 두 팔로 나루를 끌어안았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둘의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나루와 지후는, 이 시간,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주인공이 되었다.

* * *

명진은 오토바이를 멈췄다.

빵빵―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뭐야?’

비스듬히 허리를 기울이고 앞쪽을 확인했다.

한 여자가 도로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차들이 멈춰서 경적을 울려대는 것이다.

‘왜 저러지?’

잠깐 여자가 안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인도를 향해 돌아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팔에는 축 늘어진 강아지가 안겨 있었다.

사람들이 흘긋흘긋 쳐다보고, 차창을 내린 운전자들이 욕설을 쏟아냈지만 여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안고 걸어갔다.

명진은 저도 모르게 오토바이를 타고 그녀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옆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저기요.”

여자가 명진을 돌아봤다.

“탈래요? 동물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이 시간, 또 다른 주인공이 탄생하고 있었다.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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