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9)
2018.05.17.
산이 주홍빛으로 물드는 계절이 되었다.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그만큼 새파란 가을 하늘이 반가웠다.
그동안 윤영은 재경을 만나지 않았다.
친구들의 모임이 있을 때도, 윤영은 나가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재경이 못 나오는 경우를 만들기 싫었고, 만약 재경이 나온다면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상운과는 편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날 밤, 키스를 하려다가 거절당한 이후로 상운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윤영을 대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 만나면 편하게 수다를 떨 수 있는 누나, 동생 사이.
사석에서는 누나, 동생으로 부르고 반말을 사용했지만, 회사에서는 친밀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골은 잘 도착했어?]
나루에게 문자가 왔다.
[응, 피곤하다. 너는 시댁이야?]
[응. 이따 큰집으로 갈 거래. 명절 끝나고 시간 되면 보자.]
[그래, 힘내라. 유부녀여.]
[부럽다, 미혼 여성이여.]
나루의 문자를 보고 피식 웃었던 기분은, 친척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어김없이 듣는 결혼 이야기 때문이었다.
지난 6월에 윤영의 사촌 여동생이 결혼을 했다.
그 때문인지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윤영이 아직까지 미혼이라는 사실이 친척들의 심경을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윤영이 너는 아직도 애인 없니?”
“이제 슬슬 결혼해야지. 아이도 낳고 그러려면 빨리 결혼하는 게 좋아.”
“맞아. 요새 뭐, 늦게 결혼한다고들 하는데, 그것도 적당한 수준이어야지. 서른 후반에 결혼해서 애 낳으면 몸도 힘들고, 키우기도 힘들어.”
“남자 다 똑같다. 적당히 골라, 적당히.”
“너무 눈이 높은 거 아냐?”
들려오는 잔소리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윤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 결혼할 테니까 고모가 결혼 비용 좀 내줘요. 작은 아빠는 나 집 좀 사주고. 애기 낳으면 둘째 고모가 키워주는 거죠?”
윤영의 당돌한 대꾸에, 친척들은 어머어머, 애 좀 봐, 이렇게 당돌하면 남자가 기가 죽지, 따위의 말을 해댔다.
더는 앉아 있을 기분이 아니라서, 윤영은 집을 나와 차에 올랐다.
‘서울에나 가야지.’
시골길은 근처에 건물이 없어서 무척 어두웠다.
듬성듬성 서 있는 가로등 불빛으로는 짙은 어둠을 몰아내기 어려웠다.
어두운 길을 천천히 달리며 결혼을 생각했다.
결혼.
나는 그게 하고 싶은 걸까?
‘하고 싶은 거겠지.’
결혼을 두고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결혼하기 싫어.’, ‘원래 결혼 생각 없어. 혼자 사는 게 최고야.’, ‘내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라고 대답을 해왔다.
하지만 사실은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루와 지후 부부를 볼 때마다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할 때처럼 알콩달콩, 서로를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행복하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줄, 당신의 편이 되어줄, 그런 관계로.
―연애를 하듯이 살고 싶어.
언젠가 상운과 대화를 하다가 결혼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와이프에게 문자가 온 거야. 조개구이를 먹고 싶다고. 그러면 와이프 데리고 훌쩍 바다로 가서 조개구이를 먹고, 해물칼국수도 먹고 해변도 거닐고. 그런 소소한 이벤트가 있는 생활을 하고 싶어.
그런 생활은 행복할 것이다.
나루와 지후는 결혼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상운이랑 결혼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지후랑 나루처럼?’
상운과의 결혼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함께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러 술 한 잔 기울이고. 가끔은 와인을 마시러, 가끔은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대화를 나누고.
처음에는 상운으로 시작된 상상이, 어느덧 재경의 얼굴로 바뀌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윤영은 차를 세웠다.
왜 또 재경인 걸까.
왜 이런 상상에 항상 재경이 끼어드는 걸까.
재경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때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심하게 될 것이다. 재경의 눈동자가 나루를 향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게 될 것이다.
그런 의심을 품은 채로 살아가기 싫었다.
윤영은 고개를 숙이고 핸들에 이마를 댔다.
싫은데, 이런 짝사랑은 이제 정말로 싫은데, 그리움이 사무쳤다.
재경이 보고 싶었다.
* * *
시부모님은 좋았다.
시누이인 지연도 좋았다.
그러나 친척들은 때때로 좋지 않았다.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후의 고모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 너, 여자로서 기능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했잖아. 결혼한 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애가 안 들어선다는 게 말이 돼?”
“고…….”
“고못!”
지후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데, 그 전에 지연이 버럭 외쳤다.
“미쳤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그렇잖아. 지금 결혼한 지 몇 년이니? 거의 10년 다 되어가지 않아? 그런데도 애가 안 생기면 이상한 거지. 나이가 서른이 넘은 지 한참 지났는데, 이제 와서 애 가지면 애가 기형이 될 수도 있대.”
“아니, 진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무례해? 얘네도 생각이 있겠지. 아이 계획에 왜 고모가 끼어들어? 고모가 키워줄 것도 아니잖아!”
“낳기만 해 봐, 내가 잘해주지. 너네 엄마랑 아빠도 걱정이 클걸. 이제 손주 볼 나이가 됐는데, 아들 부부가 애가 없으니…… 이러다가 대가 끊기겠어.”
“아니, 올케가 애 낳아주려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여기서 고모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진짜 어이가 없다. 야, 민지후. 넌 왜 거기서 입 닥치고 있는 거야? 고모가 지금 네 부인한테 이상이 있다고 하잖아!”
“아니, 말하려고 했는데 누나가 먼저…….”
“너, 진짜 못 쓰겠다. 나루야, 이런 자식 버려, 그냥.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허수아비 같은 놈이랑 살아?”
“전 괜찮아요, 언니.”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하여간 이 자식은 진짜!”
퍽―
지연이 지후의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지후는 맞은 곳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누나, 아파.”
“그럼 아프라고 때렸지, 기분 좋으라고 때렸겠냐?”
“여보, 그만해.”
“엄마…….”
지연의 남편과 아이들이 지연을 말렸지만, 지연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렸다.
지연의 성격을 아는 고모는 입을 다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물 좀 마셔야겠다.”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긴 어딜 가? 사과하고 가! 나루한테 사과하라고!”
지연이 버럭버럭 외치다가, 나루를 돌아봤다.
“넌 왜 그러고 앉아 있어. 나가.”
“네?”
“집에 가라고. 이런 소리 듣고 여기 앉아 있을 거야? 고모가 사과할 때까지 우리 집에 오지도 마!”
“언니…….”
“얼른 가. 야, 민지후. 나루 데리고 처가댁에 가든, 니들 집에 가든 해!”
“알겠어.”
지후가 일어났다.
시부모님이 고모 대신 사과를 한다며, 얼른 가보라고 나루의 등을 떠밀었다.
나루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왔다.
지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미안해, 나루야. 그런 소리 듣게 해서.”
“아냐, 걱정하실 만하지.”
“그래도 고모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지. 내가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누나가 너무…….”
“응, 무서우시더라.”
나루가 작게 웃었다.
지연이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오히려 나루의 화가 가라앉았다.
집과 시댁의 거리는 멀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했다.
“우리 집에는 내일 가자. 우리 부모님도 요새 아이 얘기를 꺼내서 불편해.”
나루가 말했다.
“왜들 그렇게 아이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네. 어련히 알아서 가질 텐데.”
“그런데 그거, 나도 좀 걱정이야. 우리, 아이 갖기로 한 지 꽤 됐잖아. 그런데 아직까지 안 생기니까…….”
“흐응. 그래?”
어렵게 털어놓은 고민에, 지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넌 걱정 안 돼? 너나 나한테 이상이 있을지도 몰라.”
“안 그럴 거야. 아이를 원한다고 바로 생기는 건 아니라더라. 너랑 나랑 둘 다 건강하니까 언젠가는 생기겠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 그런데도 안 생기는 건 우리한테 문제가 있는 거겠지.”
“너무 초조하게 생각할 거 없어.”
“어떻게 초조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너는 걱정도 안 돼?”
“별로. 아이 없이 둘만 살아도 상관없어, 난.”
“네가 먼저 아이 얘기 꺼냈잖아. 아이 갖고 싶다며?”
“그렇긴 한데, 그게 필수는 아니니까. 난 너만 있어도 돼.”
다른 때라면 그 말이 참으로 감미롭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루는 걱정을 하고 있었고, 지후가 그 걱정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게 화가 났다.
미간을 좁히고 노려보는 나루의 모습에, 지후가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병원에 가서 검사 받아보자.”
“너, 미워.”
“왜?”
“몰라, 난 지금 좀 토라진 것 같아. 재경이랑 놀아날래.”
“나루야.”
“나갈 거야.”
나루는 휙 돌아서서 집을 나갔다.
지후는 닫힌 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걱정이 될 일인가?’
아이를 갖고 싶었다.
나루를 닮은 아이가 있으면 사랑스럽고 귀엽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이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는데.’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불행하지는 않다.
나루도 그럴 줄 알았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재경이한테 연락을 넣어둬야겠군.’
* * *
씩씩거리며 찾아온 나루를, 재경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루 좀 잘 챙겨줘.]
30분쯤 전에 지후에게서 연락을 받은 터였다.
“드디어 부부 싸움?”
재경이 물었다.
“난 이제부터 너랑 놀아날 거야.”
“그래, 놀자. 뭐 하고 놀아날래?”
“몰라.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그럼 일단 여기 앉자.”
재경이 오피스텔 입구의 계단을 가리켰다.
나루는 순순히 앉았고, 재경도 그 옆에 앉았다.
“명절인데 어디 안 가?”
“응, 우리 집은 원래 어디 안 가잖아. 넌 시댁 갔다 왔어?”
“그래, 갔었지! 그런데 지후 고모가…….”
“애 가지고 한 소리 했어?”
“어떻게 알았어? 지후한테 들었어?”
“아니, 그냥. 뻔하잖아. 친척들 모이면 듣는 오지랖들. 난 가끔 친척들 만나면 꼭 듣거든. 결혼 얘기.”
“너도 스트레스겠다.”
재경이 피식 웃었다.
“글쎄.”
결혼 얘기를 듣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스트레스는 윤영을 볼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 몸에 이상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아이를 못 갖는 몸이면 어쩌지?”
“그럴 리가.”
“만약 그러면? 지후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어.”
“지후는 널 갖고 싶어 했어. 아이가 있으면 좋지만, 아이가 없다고 지후가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하지만…… 지후가 원한다면 다 주고 싶어. 그리고 나도 지후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고.”
“그래.”
“지후 주니어가 쫑쫑 달려와서 엄마, 라고 부르면 정말 사랑스러울 거야.”
“그래, 진짜 사랑스럽겠다.”
“병원을 가서 검사 받아보는 게 좋겠지?”
“응. 불안하면 일단 한 번 받아봐. 그런데 나는 너랑 지후한테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원래 스트레스 받으면 아이가 더 안 생기는 경우도 있어. 그 정도쯤은 너도 알잖아.”
“알지, 아는데. 이게 내 일이 되니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없어.”
“그래, 원래 자기 일일 때는 어려운 법이지.”
어렵다.
다른 사람이 닿지 않는 짝사랑을 하고 있다면,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여자가 하나뿐이냐.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을 수 있어. 마음을 열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만나봐.
하지만 그것이 내 일이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을 꺼내서 보여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심코 흘린 말에, 나루가 재경을 돌아봤다.
“윤영이한테?”
“응, 윤영이한테.”
“아직도 서로 연락 안 해?”
“응.”
“그럼 마음을 꺼내서 보여 줘, 윤영이한테.”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을까? 메스로 가슴을 갈라서…….”
“아니,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고.”
“그럼 어떻게 해?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윤영이가 믿어주질 않잖아.”
“정말로 할 만큼 했어?”
“…….”
“모든 걸 다 해 본 거야?”
“걔네 집 앞에 가서 몇 날, 며칠이고 기다릴까?”
“그래도 되고.”
“뭐든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윤영이가 불편해지는 건 싫어.”
“불편해지면 좀 어떻담. 나도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지후가 그렇게 피하는데도 얼마나 들러붙었는데.”
“하긴, 그랬지.”
“만약 지후도 이 시간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면, 내가 진짜 불편하고 귀찮고 싫었을 거야.”
“그건 글쎄. 너랑 지후는 운명이었잖아.”
“너랑 윤영이도 운명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옛 시간에서는…….”
“옛 시간 얘기하지 말라고 한 건 너였어. 그리고 옛 시간, 나는 32살까지만 지냈어. 그 이후에 너랑 윤영이가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일이야. 혹시 알아?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윤영이한테 말한 다음에, 윤영이가 이 시간에서처럼 네 곁에 있어줬을지. 그리고 지금처럼 네 마음이 서서히 윤영이한테 흘러갔을지.”
“그럴까? 그렇다면 그때도 윤영이는 내 마음을 믿지 않고, 나를 피하지 않았을까?”
“하아. 너나 지후나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이럴 땐 정말 명진이가 필요해. 명진이는 항상 긍정적인데.”
그 시각, 명진은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전을 부치는(“싫다고! 전 먹기 싫다고! 이런 거 하지 말자고!”) 중이었다.
나루는 재경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재경아, 너는 참 잘생겼어. 그런데도 여자 한 번 사귀지 않고 쭉 윤영이만 봐왔잖아. 윤영이도 그걸 알아줄…….”
거기까지 말한 나루가 입을 다물었다.
재경의 옆쪽으로 이어진 길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윤영이었다.
윤영이 우두커니 서서, 다정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나루와 재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루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윤영은 휙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