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8)
2018.05.14.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래전 실연을 당했을 때도 그렇게 잊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재미있다는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성재경.
그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지후를 짝사랑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오히려 이제 와서야 ‘그게 사랑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의 감정은 희미하게만 남아 있었다.
‘집착이었을 거야. 나는 그냥 지후에게 호감이 생겼었고, 나루가 미웠어. 그래서 그 감정이 점점 커지고 왜곡돼서 질투와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걸지도 몰라.’
짝사랑했던 과거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재경을 짝사랑하는 지금 너무도 다른 기분이기에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재경이를 혼자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접지 마, 윤영아.
재경의 고백이 떠올랐다.
잊고 싶은데, 자꾸만 떠올라 심장이 쿵쿵 아프도록 뛰었다.
그 고백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로 믿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재경이가 날 사랑할 리 없지.’
나루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도 변치 않은 운명 같은 그 사랑을, 홀로 가슴에 품은 그 애절한 사랑을 윤영은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이 내게로 향할 리 없다.
내가 그런 사랑을 받을 만큼 운 좋은 여자일 리 없다.
‘나, 진짜 자신감이 하나도 없구나. 밖에선 그렇게 당당한 척하고 다니면서.’
나루나 지후, 명진은 이런 성격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넌 진짜 자신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애야.’라는 말을 들었더라면,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다.
지적을 듣지 않은 지금도 울고 싶은 기분이니까.
재경의 고백을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실없는 여자처럼 그 고백을 믿고, 그의 사랑을 받고, 나도 사랑을 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가능할까?
사귀면서도 함께 나루를 만날 텐데, 내가 걱정하거나 질투하게 되지는 않을까? 옛날에 지후 때에 그랬던 것처럼 나루를 미워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때의 모습으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참 쉽게 사귀고 헤어지는데, 나는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쓴웃음을 애써 지우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옆에 놔뒀던 휴대폰이 울렸다.
재경에게 온 문자였다.
[윤영아, 우리 잠깐 만날래?]
그저 문자만 본 것뿐인데, 평범한 활자에 그의 얼굴이 담긴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윤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을 껐다.
당분간, 이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는 재경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 * *
문자를 보내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윤영의 답이 오지 않았다.
나루와 커피를 마시는 내내 휴대폰을 확인하던 재경이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망했어! 윤영이한테 답이 안 와! 난 차인 거야!”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재경을, 나루는 빤히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진짜 멍청해 보이는구나.”
* * *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동안 재경은 몇 번이나 윤영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재경은 생각했다.
근무가 일찍 끝나는 날에, 재경은 윤영의 회사로 찾아갔다.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윤영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뭐든 진행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윤영이 보고 싶기도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윤영을 못 본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왔다.
윤영은 알까?
해외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싶었고, 재작년 그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오롯이 그녀 한 명 때문에 그걸 포기했다는 걸.
그녀가 재경의 곁에 있어주고 싶어 하는 만큼, 재경 또한 그녀의 곁에 있어주고 싶어서 먼 길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기면, 항상 거절을 해왔다는 걸.
‘물론 내가 멋대로 한 일이지만, 그래도 좀 알아주지.’
윤영의 회사가 있는 건물에는 창마다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야근이 많은 회사였고, 어쩌면 오늘도 야근을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재경은 몇 시간이 됐든,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 * *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네.’
이런 날에는 자연스럽게 재경에게 연락을 했다.
나 지금 퇴근. 뭐해?
답은 빨리 올 때도, 늦게 올 때도 있었다.
퇴근 축하. 일하는 중이야. 오늘은 좀 바쁘네.
잠깐 시간 날 것 같은데 볼래?
나도 곧 끝나. 이따 만날까?
재경은 늘 바빴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만나왔었다.
이렇게 한참 동안 만나지도 않고 연락도 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재경이 보고 싶었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왜 생기는 걸까?
그의 손짓, 눈빛, 미소, 몇 번 더 본다고 대단히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가질 수 없음에 가슴만 지끈지끈 아픈데.
어째서 이리도 보고 싶은 걸까?
윤영은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는데, 상운이 뒤를 따라 나왔다.
“같이 가요, 대리님.”
“일 끝났어요?”
“아까 끝났죠. 대리님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 와인 한잔할래요?”
“아, 그럴까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지난 일주일 간, 상운과는 거의 매일 저녁 함께 퇴근했고 저녁을 먹었다.
상운과의 시간은 어색하지 않았고, 상운은 매너가 좋았다.
너무 진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장난이 과하지도 않아서 대화하기가 편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재경에 대한 생각을 제외하면, 상운과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이런 남자와 사귄다면, 참 즐겁고 행복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운과 며칠 간 퇴근 후 데이트를 즐기는 동안, 그와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마음의 거리도, 물리적 거리도.
회사 건물에서 나올 때, 상운과 윤영은 팔을 거의 붙인 채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재경은 멀리에서 지켜봤다.
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낯선 남자와 함께 나오는 여자가 윤영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팔과 팔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있는 걸 보니 꽤나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영은 아무 남자한테나 스킨십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윤영이 팔 한쪽을 내어주다니.
‘잘되고 있는 걸까?’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이럴 때 윤영의 앞에 등장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경은 도저히 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그녀를 억지로 떼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엑스트라였다.
나루를 사랑했던 그 순간부터.
‘나는 엑스트라였지. 혹은 주연급 조연 정도?’
재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악역일지도 모르겠군.’
* * *
가볍게 저녁을 먹고 와인을 한 잔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유독 감미로운 눈빛과 음성을 들으며, 윤영은 어쩌면 오늘 상운이 또다시 고백을 해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윤영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상운은 요 며칠 늘 그랬듯 윤영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네, 즐거웠어요.”
평소라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상운이, 가만히 윤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운의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윤영만을 향하고 있었다.
지후가 나루를 볼 때 짓는 표정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눈빛을, 상운이 하고 있었다.
순간 윤영은 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더는 아프지 않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상운이 허리를 굽혀 윤영에게 입을 맞추려고 할 때, 밀어내지 않았다.
숨결과 숨결이 부딪치고, 아직은 조금 낯선 그의 향기가 윤영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순간이었다.
재경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 건.
재경의 향기에 익숙해진 윤영의 후각이, 낯선 남자의 향기에 당황하는 것만 같았다.
후각의 당황은, 다리의 거부로 이어졌다.
윤영의 다리는 의도와 다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고, 그것으로 거부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했다.
상운이 다시 허리를 폈다.
약간은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민망하기도 한 것 같은 상운의 얼굴을 보며, 윤영은 말했다.
“미안해요, 과장님.”
상운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다정한 미소였다.
“뭐가요?”
“전에 말한 대로, 나는 짝사랑을 하고 있어요. 잊으려고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혹시나 싶어 다른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고, 연애를 하기도 했죠. 하지만 늘 같은 이유로 헤어졌어요.”
“…….”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항상. 내가 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상대가 이별을 고했어요.”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냐?
―같이 있어도 외로워.
―사랑 받는 기분이 아냐.
―힘들다.
윤영의 상대들은 항상 그런 말을 했다.
윤영이 재경을 사랑하듯, 그들도 윤영을 사랑했다.
윤영이 상처를 받듯 그들 또한 외로 향하는 사랑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과장님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게다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과장님과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아요.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고, 안 좋게 헤어지고 싶지도 않아요. 미안해요.”
상운의 눈썹 끝이 내려갔다.
“나는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요. 내 사랑은 이미 시작됐어요. 대리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듯, 나도 대리님을 그렇게 좋아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처음부터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냥 곁에 이렇게 있는 것도 안 될까요?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을게요. 키스도 하지 않을게요. 그냥 좋은 관계로, 이렇게 가끔 저녁을 먹고 데이트를 하고, 그럴 수는 없을까요?”
상운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아플 거예요, 그거. 외로울 거고요. 내가 해 봐서 아는데, 그거 정말 못 할 짓이에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은 그저 대리님을 놓치기 싫다는 생각뿐이에요. 아픈 것도, 외로운 것도 내가 감당할게요.”
“내가 원망스러워질걸요.”
“대리님은 지금 짝사랑하는 그분을 원망하세요?”
내가 재경을 원망한 적이 있을까?
아니, 한 번도 없었다.
윤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운은 그녀의 대답을 짐작한 듯 말했다.
“내가 사랑하기에 비롯된 일이에요. 대리님 탓이 아니죠. 원망하지 않아요. 절대로.”
* * *
운명의 상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사람마다 있으면 좋겠다.
운명의 상대의 머리 위에 하트든, 별이든 반짝거리는 표시가 있으면 좋겠다.
표시가 없으면 마음을 주는 일이 없도록, 표시가 없으면 호감을 보이는 일조차 없도록. 그리하여 운명의 상대끼리 서로를 만났을 때에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며, 윤영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 누구도 아프지 않을 텐데.
사랑에 상처를 받고, 사랑에 상처를 주는, 그런 일은 없을 텐데.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침대 위의 휴대폰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윤영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재경에게 온 메시지였다.
[윤영아. 나 지금 너네 아파트 앞이야. 우리, 잠깐 좀 보자. 기다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영은 휴대폰의 메시지를 노려보다가 창문을 돌아봤다.
윤영의 집은 5층이었다.
불이 켜져 있는 걸, 재경은 확인했을 것이다.
윤영은 망설이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재경이 보지 못하도록 창문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훤칠한 키와 연갈색 머리카락.
재경이었다.
재경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재경은 아파트 화단 앞에 우두커니 서서 건물 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두근 뛰었다.
왜 찾아온 거지?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나가야 하나?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또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하려는 걸까?
싫었다.
재경의 마음은 나루의 것이었다.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그랬다.
나루의 대용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싫은 걸까?
나루의 대신이 되어서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야. 싫어, 그런 건.’
오롯이 김윤영이라는 여자로서 사랑을 받고 싶었다.
나루가 지후에게 받는,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었다.
‘재경이는 나루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어.’
몇 년 전, 재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의 그날이 되면, 지후도 나루도 죽지 않을 거야.
재경은 곧은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그 장소에 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애들을 구하겠어. 운명이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내가 죽을 거야. 그러면 지후도, 나루도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지.
재경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었다.
지후가 나루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듯, 재경 또한 그랬다.
그런 사랑이 변할 리 없고, 그런 사랑이 나를 향할 리 없다.
재경의 마음은 나루의 것이었다. 나루가 아무리 거부해도, 그 사실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윤영은 창가에 등을 기댄 채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휴대폰을 이마에 대고, 윤영은 눈을 감았다.
‘이러지 마, 재경아. 이러면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옆에 있을 수 없게 되잖아. 내가 너와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망을 품게 되잖아.’
그날 윤영은 밤을 지새웠지만, 재경을 만나러 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재경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윤영과 재경의 고리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