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90화 (90/93)

90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7)

2018.05.10.

“뭐, 임자 있는 여자를 만나기는 하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재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는 모습에, 동료 의사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불륜은 아니구먼?”

“불륜이면 큰일 나지. 나랑 제일 친한 친구의 와이프이기도 하고, 그 와이프가 나랑 제일 친한 친구이기도 한걸.”

“아하. 누가 그런 소문을 흘린 거지? 간호사들이 재경 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라고, 뒤에서 욕하고 난리 났어.”

“아, 그래? 뭐, 누군지는 알 것 같지만…… 됐어. 차라리 이런 소문이 도는 편이 나아.”

“왜?”

“간호사들이랑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싶으니까.”

“크흐. 역시 잘생긴 놈들은 생각하는 게 다르구먼.”

“아니, 이거랑 잘생긴 게 뭔 상관이야?”

“넘치고 넘치니까 아쉬울 거 없다는 거잖아. 우리 같이 평범한 놈들은 한 명, 한 명의 관심이 아주 귀하다고.”

“아하하하.”

재경은 힘없이 웃었다.

“이 잘생긴 얼굴, 확 잘라내고 싶다.”

“그럼 잘라서 나 줘. 그런 얼굴로 좀 살아보게.”

“좋을 거 없어.”

재경은 동료 의사를 돌아봤다.

평범한 외모이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지금은 아내의 배 속에 아이도 자라고 있었다.

그런 평범한 사랑을, 재경은 동경했다.

재경도 이제 평범하게 한 여자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연애를 하고 싶었다.

* * *

일요일 오전, 지후와 나루가 아침을 먹은 후 설거지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을 때, 지후의 휴대폰이 울렸다.

재경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 네 부인이랑 데이트 좀 해도 되냐?]

“언제?”

[오늘. 1시쯤에.]

“기다려 봐.”

지후가 나루를 돌아봤다.

“재경이가 너랑 1시에 데이트하고 싶대.”

“어디서?”

“어디서 하냐는데?”

[신촌.]

“신촌이래.”

“응, 1시에 보자고 해.”

“1시에 신촌으로 가겠대. 꽃 사들고 와라. 내 와이프는 프리지아를 좋아해.”

[적당히 좀 해.]

재경이 웃음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데이트는 왜?”

나루가 주먹을 쥐고 가위바위보 할 포즈를 취하며 물었다.

“글쎄. 나갈 준비해. 설거지는 내가 할게.”

“뭐야, 내가 외간 남자랑 데이트를 한다는데, 질투도 안 하냐?”

“가끔 외간 남자랑 데이트도 해 줘야지.”

“하지만 넌 외간 여자랑 데이트하면 안 돼.”

“윤영이랑도?”

“아니, 윤영이는 괜찮지.”

“그래, 재경이도 괜찮아.”

나루는 지후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재경에게 윤영이 회사 사람과 데이트를 한다고 전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어쩌면 그 일 때문에 보자고 한 걸지도 모르겠다.

씻고 나와서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지후가 훈수를 뒀다.

“아니, 원피스 말고 청바지. 티셔츠는 맨투맨이나 후드로 입어.”

“뭐야? 이건 데이트 차림새가 아니잖아.”

“그래도 그게 좋아.”

“재경이한테 무슨 말 들었구나?”

“응. 그렇게 입고 가.”

“뭔데 그래?”

“가보면 알아.”

“마누라가 딴 남자 만나러 간다는데 패션 코치까지 해 주는 남자는 자기밖에 없을 거야.”

나루의 말에 지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싫어?”

그렇게 묻는 지후의 얼굴을 보는 게, 나루는 여전히 좋았다.

두 팔을 벌려 지후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니, 너무 좋아.”

지후가 웃으며 나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 다녀와.”

“응, 가서 최고로 멋진 데이트를 하고 올게.”

“안 돼, 최고는 나야.”

“그 최고가 오늘 바뀌면 어쩌지? 재경이가 워낙 여자 마음을 잘 알아주잖아.”

“그럼 내가 다음에 그 최고의 자리를 탈환해야겠지.”

지후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신촌에 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합정역에서 임산부가 탔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지 앳된 얼굴의 임산부였다.

임산부와 함께 탄 남편은 연신 임산부의 배를 내려다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 남자와 지후의 얼굴이 겹쳐졌다.

‘나도 아이를 가지면 지후가 저렇게 웃겠지?’

아이가 있든 없든 지후는 항상 다정했다. 나루를 보면 언제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배 속의 아이를 향해 짓는 미소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다는 듯한, 조건이 없는 애정 어린 미소. 아빠의 미소.

지후가 짓는 아빠의 미소가 궁금했다.

나루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날씬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왜 아이가 안 생기지? 오늘 재경이 만나면 한 번 물어볼까?’

* * *

신촌역에 내려서 재경에게 전화를 했더니, 예전에 자취를 했던 빌라 앞에서 만나자는 답이 돌아왔다.

나루는 이제 슬슬 재경이 뭘 하려는 건지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 아이가 안 생기는 일에 대해 물어보기는 글렀다. 그냥 느긋하게 데이트를 즐겨야겠다.

후드티셔츠의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걷는 나루는, 영락없는 대학생으로 보였다.

자취를 했던 빌라가 있는 골목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옛 시간에서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이 골목을 걸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지금, 나루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또 한 번 느끼고 있었다.

추억 속의 길을 걷는 것은 아련하면서도 즐겁고 조금은 애잔한 색채를 자아낸다.

연두색과 분홍색, 파스텔 톤의 색채가 가득했던 나날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빌라 앞에, 재경이 있었다.

재경 또한 그때처럼 면바지에 청 남방을 입고 있었다. 왁스를 바르지 않은 연갈색 곱슬머리가, 재경을 유독 어려 보이게 했다.

나루를 본 재경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루.”

“재경.”

나루가 후드티셔츠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도도도 달려가 재경의 앞에 섰다.

“야, 너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대학생 같다.”

“응, 너도.”

“점심은 먹었어?”

“지후랑 간단하게 아침을 먹긴 했는데, 슬슬 점심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오랜만에 한성 식당이나 갈까?”

“아, 좋지. 거기 김치찌개 먹고 싶어.”

“나도. 가끔 생각나. 김치찌개랑 돈가스.”

“맞아, 그 조합이 딱인데.”

하지만 한성 식당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개인 커피숍이 입점해 있었다.

실망감에 가슴이 허했다.

10년이 넘게 지났으니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당연히 그 자리에 있을 줄로만 알았다.

시간은 항상 그러했다.

흐름에 스친 많은 것들을 변하게 만든다.

물론 변치 않는 것 또한 분명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나루는 그때부터 쭉 옆에 있어준 재경을 돌아봤다.

“아쉽다.”

“그러게. 그냥 딴 거 먹으러 가자. 스시 어때?”

“스테이크 썰고 싶은데.”

“돈가스에서 왜 스테이크로 업그레이드 된 거야?”

재경은 투덜거리면서도 휴대폰으로 스테이크 맛집을 검색했다.

그래, 이런 거.

이런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니, 좀 변했나? 그땐 소소한 대화가 아니라, 다들 묵직한 대화만 했었지. 지후가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학교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와 학교로 향했다.

주말인데도 학교에는 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떨어져서 나무마다 푸른 잎이 돋아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벚꽃 잎을 밟으며, 전에 다녔던 길을 돌아다녔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학교 한 바퀴, 또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학교 한 바퀴.

새로 생긴 건물이 많아서, 가끔은 다른 학교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노천극장은 그대로였다.

나루와 재경은 노천극장에 멈춰, 무대 쪽을 내려다봤다.

“예전에 여기서 공연하면 정말 떠들썩했었는데.”

“지금도 떠들썩할걸. 거기에 우리가 없다 뿐이지.”

“재미있었어.”

“응. 재미있었어.”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동안 나루는 멀리 이어진 노천극장의 좌석을 보며,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 시간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이곳에 홀로 앉아 고독을 견디고 있는데 지후가 옆에 와서 앉은 적이 있었다.

자리를 떠나 뒤를 돌아봤을 때, 나루가 앉아 있던 자리, 지후의 옆자리에만 눈이 쌓여 있지 않았다.

그때의 광경이 생생했다.

그 광경은 죽을 때까지 기억될 것 같았다.

“13년 전, 이 교정에 있을 때에 나는 매일 생각했어.”

문득 재경이 입을 열었다.

나루는 재경을 돌아봤지만, 재경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서 있는 그의 옆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연나루랑 사귀고 싶다.”

“…….”

“매일, 매일. 그 생각만 했지. 연나루가 좋아. 연나루랑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간혹 멀리에서라도 네가 보이면 심장이 뛰었어. 아니, 네가 없어도 너를 생각하면 두근거렸지.”

“…….”

“12년 전에도 나는 여기에서 생각했어. 연나루 옆에 있는 남자가 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옛 시간에서 연나루를 지키고 죽은 남자가 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연나루를 안아볼 수 있다면. 당연한 듯 저 손을 잡고 걷는 사람이 나였다면.”

“…….”

“1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며 이 교정을 거닐었지. 그래서 이 대학이 싫었어. 여기에 오면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의 연인을 그리워하고 짝사랑하는, 미련한 내 추억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기분이 들었거든.”

재경이 나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 난 이제 이곳에 와도 네 생각이 나지 않아. 그 대신 다른 사람과의 추억이 떠올라.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제는 소중해진 추억. 한때는 잊었지만, 다시금 기억나는 추억.”

“응.”

나루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13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나루야. 나는 널 아주 많이 사랑했어.”

“응, 알아. 그래서 참 고마워.”

재경이 웃었다.

“응, 다행이야. 싫은 기억이 아니라 고마워해 줘서 정말 다행이야.”

“응.”

“이제는 널 봐도 설레지 않고, 널 봐도 욕심이 나지 않아. 그래서 더 이상 나란 놈이 싫지 않아. 그때의 그 지독했던 짝사랑은, 그저 내 인생을 스쳐간 하나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어. 널 사랑한 걸 후회하지도 않고, 부끄럽지도 않아. 내가 그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준 너에게도, 지후에게도 참 고마워.”

정말로 그랬다.

만약 지후나 나루가 재경의 앞에서 눈치를 봤더라면, 미안해했더라면, 오히려 이 마음이 더 부끄러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후와 나루는 재경이 있으나 없으나 스스럼없이 서로를 향한 애정을 표현했다.

이제야 와서 깨닫는다.

그것이 둘에게도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리라는 걸. 그럼에도 그리 행동한 것은, 언젠가 재경이 그 일로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하려던 의도였다는 걸.

만약 지후와 나루가 서로를 사랑하는데 재경의 눈치를 보았더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무척이나 미안해졌을 것이다.

나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지후와 나루를 볼 낯이 없었을 것이다.

재경이 노천극장의 관람석에 앉기에, 나루도 그 옆에 앉았다.

“내 인생에 사랑은 딱 한 번일 줄 알았어. 너랑 지후가 그랬듯이,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응, 아니지.”

“그래. 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버렸어. 처음에는 조용히 쓰린 마음을 달래주기만 했었는데, 어느덧 구석구석 빈틈없이 그 사람이 채워졌어. 그래서 이제는 이곳에 와도 그 사람만 생각난다.”

“아무 상관없다더니.”

나루가 비쭉거리며 한 말에, 재경이 웃었다.

“수줍잖아. 이제 와서 나, 윤영이를 사랑해, 라고 말하기는.”

“뭐가 수줍어? 볼 거 다 본 사이에.”

“오해할 말 하지 마. 내 육체는 아직 내 거니까.”

“변태 같은 소리 좀 하지 말아 줄래?”

“네가 먼저 했잖아.”

“네가 내 말을 곡해한 거라고. 나는 우아하게 말했어. 볼 거 다 본 사이라고.”

“그러니까 뭘 봤는데?”

“네가 취해서 진상 부리는 거!”

“진상은 너지. 너 저번에 취해서 지후 자빠뜨리고…….”

“아, 싫어. 안 들을래. 안 들을 거야.”

자기가 불리해지자, 나루가 얼른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재경이 잠시 웃었다.

“나루야, 나. 참 절절한 사랑을 했어. 그래서 이번 사랑은 그렇게 절절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응, 나도 이번엔 네 사랑이 반짝반짝 빛났으면 좋겠어. 윤영이의 사랑도 그렇고.”

“어떻게 해야 여자들이 설렐까?”

재경의 질문에, 나루는 기가 막혔다.

우울한 순간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재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루는 고개를 저었다.

“넌 그냥 숨만 쉬어도 여자를 설레게 하는 얼굴이잖아.”

“하지만 모든 여자가 내 얼굴을 보고 설레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윤영이는 나한테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상대야.”

“그래, 어렵겠지. 윤영이가 나랑 친하기도 하지만, 고집도 한 고집하거든.”

“맞아. 그 고집 센 면이 진짜 매력적이야.”

“홀딱 빠졌네.”

“응, 홀딱 빠졌지.”

나루는 재경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항상 이런 순간이 오기를 바랐고, 정말로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게 신기했다.

“네가 나를 짝사랑했던 게 너희 둘 사이에 장애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걸 너무 의식하고 있으면 오히려 더 큰 장애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냥 그 사실은 잊는 게 어때?”

“잊을 수 있을까?”

“적어도 너만이라도. 너라도 그 장애물을 치워 버리고, 평범하게 해 봐. 이제 막 만난 새로운 여자와 설레는 사랑을 시작한 남자처럼, 호감을 표시하고 데이트를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손을 잡고…… 그렇게 평범하게, 천천히 진행시켜 봐.”

“윤영이가 거기에 낚일까?”

“글쎄. 하지만 그 어떤 장애물이 사이에 있어도, 아무리 안 된다고 세뇌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다가오는 걸 밀어낼 수는 없더라. 사랑은 그렇게 터무니없이 강하고 중독성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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