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89화 (89/93)

89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6)

2018.05.07.

“접지 마, 윤영아.”

재경이 말했다.

윤영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도야.”

“어?”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야. 나, 널 사랑해.”

지금 하는 고백이 진짜 멋없다고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이 마음을 윤영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윤영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재경의 입술을 주시했다.

“널 사랑해. 그러니까 그 마음 접지 마, 윤영아.”

“말도…… 안 돼…….”

윤영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중얼거렸다.

“아니, 말이 돼. 나는…….”

“너는 나루를 사랑하잖아.”

“그래, 물론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 너는 나루를 사랑해. 너는 평생 연나루만 사랑해.”

“옛 시간의 성재경과 나는 달라. 이 시간은 내 거야. 이 시간의 감정도 내 거고. 네 꿈의 성재경과 나를 겹쳐서 보지 마.”

“재경아, 너…… 너, 날 동정하는 거니?”

생각지 못한 질문에 재경은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윤영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재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불쌍해? 전에는 지후를, 이번에는 너를 사랑하는 내가 불쌍해서 지금 이러는 거니?”

“윤영아, 내가…….”

“그러지 마. 날 불쌍하게 여길 거 없어. 짝사랑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면서 붙어 있으려고 할 필요도 없고. 나는…….”

윤영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윤영은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았다.

“필요 없어, 그런 거.”

“그런 거 아냐.”

“아니, 맞아.”

윤영이 손목을 잡고 있는 재경의 손을, 다른 쪽 손으로 떼어냈다.

“이런 걸로 동정 받고 싶지 않아. 그게 너라면 더더욱. 당분간 만나지 말자. 친구라는 이름으로도, 널 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윤영아.”

휙 돌아서서 도망치듯 달려가는 윤영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윤영이 어렵게 고백한 만큼, 재경 또한 그렇게 고백을 했다.

그 고백은 윤영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마음은커녕 ‘동정’이라는 싸구려 감정으로 전락 당했다.

그녀를 잡으러 달려갈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재경은 쓰디쓴 표정으로, 멀어지는 윤영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 * *

병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달려간 후에야, 윤영은 달리기를 멈췄다.

폐가 아플 정도로 숨을 몰아쉬며, 윤영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접지 마, 윤영아.

재경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재경은 어떤 표정, 어떤 눈빛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정말로 날 사랑해서?’

아니, 그럴 리 없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껏 그 마음을 감추고 기다렸을 리가 없었다.

나루를 사랑했던 재경을 기억한다.

재경은 저돌적이었고, 그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루를 사랑하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랬던 재경이 윤영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지금껏 그 마음을 꽁꽁 감추고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지후랑 나루가 운명처럼 서로를 사랑하듯, 재경이가 나루를 사랑하는 것도 운명이야.’

옛 시간에서 재경은 고백도 하지 못한 채, 길고 긴 짝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갔다.

재경은 자꾸 그 시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하지만, 결국 본질은 같았다.

그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재경은 나루를 보자마자 반했다.

그런 사랑이었다.

다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재경의 사랑 또한 절절하고 아름다웠다.

‘하지 말지. 그런 거짓 고백, 하지 말지.’

윤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재경에게 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당분간 마음 정리할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할 계획이었다.

고백을 하고 나서 후련한 기분으로 상운을 만나고, 재경을 향한 마음을 조금씩 정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재경이 다 망쳐 버렸다.

‘이러면 이제 못 만나잖아.’

동정을 받았다.

최악이다.

사랑하는 남자한테 사랑을 이유로 동정을 받다니.

소중한 친구한테 짝사랑을 동정 받아 고백을 끌어내다니.

‘싫다, 진짜.’

사랑도, 친구도 잃은 절망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 정말 싫다.’

* * *

명진은 자다 깨서 부스스한 상태로 현관문을 열었다.

재경을 위아래로 훑어본 명진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아침이냐?”

“응.”

“그래?”

명진이 고개를 돌려 거실에 붙어 있는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AM 2:30

새벽 2시 30분이었다.

“그래, 아침이라면 아침이겠네.”

명진이 하품을 하며 재경이 들어올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뭐라도 꺼내 마셔. 세수 좀 하고 올게.”

명진이 턱으로 냉장고를 가리켜 보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맥주와 소주가 가득 차 있었다.

재경은 맥주를 하나 꺼내 들고, 바 형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뭔데?”

세수를 하고 나온 명진이 재경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명진아, 내가 그렇게 못 믿을 놈으로 보이냐?”

느닷없는 질문에 명진은 미간을 좁히고, 재경의 화려한 얼굴을 꼼꼼히 살펴봤다.

이윽고 명진이 대답했다.

“뭐,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대체 왜?”

“얼굴이 너무 화려하면 살짝 사기꾼 같은 냄새가 나거든. 네 얼굴이 좀 왕자님 같으냐.”

“그럼 왕자들은 다 사기꾼이냐?”

“호오. 본인이 왕자님처럼 생겼다는 건 인정하나 보네?”

“이제 인정할 때 됐지. 하아.”

“자기 잘생긴 거 인정하면서 깊은 한숨 쉬는 놈은 처음 본다, 야. 무슨 일인데 그래?”

“고백을 했어.”

“호오. 드디어?”

명진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 같았다.

“역시 너도 눈치채고 있었군.”

“보통은 눈치채지. 그래서?”

“안 믿더라.”

“그렇군.”

“내가 동정을 한다고 생각하던데.”

“최악이네.”

“그래, 최악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너는 나루를 짝사랑했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절절하게.”

“그래, 아주 절절했지.”

재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절절한 첫사랑이었다.

그때는 그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나루를 향한 그 애절한 마음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리라 생각했다.

옛 시간의 성재경과 이 시간의 나는 다르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여겼었다.

“옛 시간의 성재경과 나는 달라.”

“그래.”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윤영이가 있었어.”

“그래.”

“옛 시간의 성재경에게는 없던 거였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내 마음을 걱정해 주는 한 사람이, 내게는 있었어. 그래서 나는 이제 정말로 다른 사랑을 할 수 있게 됐어. 윤영이 덕분이지.”

“그래.”

“하지만 이러면 뭐하냐. 정작 본인이 믿어주질 않는데.”

“뭐, 그럴 수밖에 없지. 믿지 않는 것도 믿지 않는 거지만, 불안함이 더 클걸.”

“뭐가 불안해? 내가 한없이 가벼운 놈이라, 쉽게 마음이 바뀔까 봐?”

“아니. 비교하게 될까 봐. 네가 나루를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의 모습을, 나루와 자신의 모습을, 그런 것들을 자꾸 비교하고 질투하게 될까 봐.”

“아아.”

어떤 건지 알 것도 같았다.

“만약 너와 사귀게 되면 윤영이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거야. 네가 나루를 대할 때 질투를 할 수도 있고, 역시 성재경은 연나루를 여전히 사랑해,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 그런 의심과 불안은 사라지기 힘든 거지. 보통은.”

“보통은 그런가?”

“그래, 보통은. 그런 것도 윤영이한테는 굉장히 불안하고 걱정되는 일일 거야. 예전에 한 번 지후를 짝사랑하면서 자신을 잃은 적이 있었잖아. 또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

“너는 사랑 한 번 안 해 본 애가 여자애들 마음은 잘도 안다. 사실은 여자 아냐?”

“나 같이 생긴 여자가 세상에 있으면 좀 무서울 것 같지 않냐?”

“그건 그러네.”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아도, 가슴에 얹힌 묵직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재경은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어렵다, 사랑.”

“그래.”

“내 사랑은 할 때마다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정말.”

“그래서, 이번에도 고이 접어 다른 남자한테 넘기게?”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명진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명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재경이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윤영이를 반드시 내 여자로 만들 거야.”

명진이 휘오,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크흐. 역시 잘생긴 놈이 말하니까 영화 보는 것 같다, 야.”

* * *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잤다.

뭐가 그리 곤했는지,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래서 재경의 고백에 대해 고민해 볼 겨를도 없었다.

어젯밤 씻지도 못하고 잤는데 늦잠까지 자는 바람에 유독 분주한 아침이었다.

윤영은 화장도 제대로 못한 채로 집을 나왔다.

전철에서 시루떡처럼 뭉개져 이리저리로 흔들거리며 내릴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 밀리다시피 전철에서 내려 개찰구를 나오고 있을 때였다.

“대리님.”

들려오는 음성이 착각인 줄 알았다.

윤영은 개찰구를 채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슈트를 입은 상운이 개찰구 앞쪽에 서서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생각지 못한 상운의 모습에 멍하니 서 있는데, 뒤쪽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짜증을 냈다.

“뭐야? 왜 안 나가?”

“아, 사람도 많은데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고는 개찰구를 마저 나왔다.

“미안해요, 저 땜에 괜히.”

상운이 사과를 했다.

“아뇨, 괜찮아요. 오늘 전철 타고 출근한 거예요?”

“네.”

“왜요? 집에서 버스 갈아타고 그래야 해서 대중교통 불편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그냥요. 아니, 대리님이랑 회사까지 같이 걸어가고 싶어서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해사하게 웃으며 달콤한 말을 건네는데, 설레지 않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윤영 또한 그랬다.

재경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느끼는 풋풋한 상황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기에 간혹 손등이 부딪쳤다. 짧은 접촉으로 전해지는 체온에 설레는 이유는, 어릴 때의 연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두근거렸던 어린 날의 풋사랑.

서른이 훌쩍 넘은 두 남녀인데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신기했다.

‘나도 심장이 완전히 굳어 버린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상운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추억에, 심장에 가느다란 상흔이 생겼다.

덜컹거리는 전철, 밀려들어 오는 퇴근길의 사람들, 그리고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재경의 날카로운 턱선.

윤영은 문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재경은 그런 윤영을 보호하듯 두 팔로 윤영의 양쪽을 버티고 있었다.

혹여 눈이 마주칠까 흘끔흘끔 시선을 들어 그의 턱을 확인했다. 재경은 조금 고개를 들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재경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한 한편, 전해지는 그의 향기와 열기에 아찔해졌다.

그리고.

마침 고개를 숙이던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윤영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움직이는 시야 끝에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어지는 모습이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어야 할 텐데, 아프기만 한 이유는 아마도 그와 내가 운명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지후와 나루처럼 운명으로도, 죽음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좋은 추억을 되새기는 것으로도 가슴이 에이는 것이리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말없는 윤영이 이상한지, 상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운과 함께 걷는 중이라는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역시 안 되겠다.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항상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아프고 고독한 일이다.

상운까지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과장님.”

윤영은 상운을 돌아봤다.

윤영은 몰랐지만,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때문에 상운은 윤영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안해요, 저는…….”

“싫어요.”

상운이 검지를 들어 윤영의 입가로 가져갔다.

검지 끝은 윤영의 입술에 닿기 직전 멈췄다.

그 상태로 윤영이 입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상운이 말했다.

“지금 대리님이 하려는 얘기, 좀 나중에 들을래요. 그냥 오늘은, 그리고 내일도, 다만 며칠이라도, 우리 그냥 이렇게 나란히 걸어가요.”

* * *

요 며칠 간호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예전에는 재경을 보면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해왔는데, 요새는 대부분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재경이 지나가면 뒤에서 모여 수군거리기도 했다.

딱히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고, 그 이유 역시 궁금하지 않았다.

재경은 그저 어떻게 해야 윤영이 이 마음을 믿어줄지 고민될 뿐이었다.

“재경 선생.”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동료 의사가 재경을 따라잡았다.

“어, 오늘 나오는 날이었어?”

“응급이 있어서. 이제 들어가 보려고.”

“그래, 얼른 들어가서 쉬어. 와이프가 기다리겠다.”

“기다리긴. 신나서 장모님이랑 쇼핑하러 나갔는데.”

“그래도 집에 가면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지 않아?”

재경의 질문에 동료 의사가 재경을 빤히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

“요새 많이 외로워?”

“응? 갑자기 왜?”

“간호사들 사이에 안 좋은 소문이 돌던데.”

“안 좋은 소문?”

“어,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럴 것 같긴 한데…… 재경 선생이 임자 있는 여자를 만난다고들 숙덕거리더라.”

임자 있는 여자.

그 소문의 진원지가 어딘지 알 것 같아서,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경의 주위에 임자 있는 여자라고 해 봐야 나루뿐이었고, 나루를 아는 사람은 정희가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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