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88화 (88/93)

88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5)

2018.05.03.

상운은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서 윤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 맨투맨 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상운은 회사에서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상운이 정장 아닌 다른 옷을 입은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윤영을 발견한 상운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윤영은 마주 미소를 지어주며, 재경을 떠올렸다.

언제였던가, 이런 광경을 본 것 같았다.

아, 그래. 2년 전이었나?

모처럼 시간이 났다며, 재경이 영화나 보자고 했다.

지후와 나루가 결혼을 하고, 명진이 유명해진 이후로 재경과 윤영은 단둘이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나오는 길에 위층에서 못된 꼬맹이가 뱉은 침에 맞는 바람에, 재경에게 늦을 것 같다고 말한 후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마도 재경은 한참 기다렸을 것이다.

영화관 매표소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재경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주위의 여자들이 재경을 흘긋흘긋 훔쳐보고 있었다.

너무 늦어서 기분이 상했겠지, 사과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재경을 향해 걸어가는데, 마침 고개를 들던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재경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아주 오랫동안 윤영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우유 위에 톡 떨어뜨린 연분홍빛 물감처럼, 느릿하면서도 달콤하게 번지는 미소였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발견했을 때 짓는 것 같은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와, 오늘 정말 예뻐요.”

그때, 윤영에게 다가온 상운이 말했다.

윤영은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상운을 만나러 나왔다. 상운을 만나면서 재경을 생각하는 건, 상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고마워요. 과장님도 그 옷 되게 잘 어울리네요. 대학생 같아요.”

“대리님이 워낙 어려 보이시니, 저도 좀 어려 보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대리님, 그렇게 입으시니까 되게 분위기가 달라 보이네요.”

“어색한가요?”

“아뇨, 아뇨. 정말 예뻐요. 정말로.”

단호하게 말하는 상운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옷차림 때문인지, 회사 밖에서 만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운이 귀여운 동생으로 보였다.

‘그래 봐야 한 살 차이인데.’

“점심,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상운이 물었다.

“음, 오늘은 정말로 아무 거나 좋을 것 같은데.”

“원래 첫 데이트는 정해져 있죠. 파스타.”

“첫 데이트 자주 해 보셨나 봐요.”

“너무 못 해 본 사람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첫 데이트만큼은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으니까.”

“첫 데이트 숙련가이시군요.”

“네, 전설의 첫 데이트까지는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첫 데이트는 할 수 있게 모시겠습니다.”

다행히 상운과 사석에서 만나 대화를 하는 건 불편하지 않았다.

회사에서와 다르게 사석에서 만난 상운은 말도 잘하고 장난기도 있었다.

‘아니, 내가 회사에서 이 사람을 진지하게 지켜본 적이 없어서, 이런 부분을 발견 못 했었는지도 모르지.’

회사의 인기남이지만, 윤영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었다.

윤영의 시야는 항상 재경으로 가려져 있었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상운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보는 중이니,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소개팅이나 첫 데이트 때에 방문할 것 같은, 적당히 고급스러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각자 파스타를 하나씩 시키고 식사를 하면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하지만.

‘왜 자꾸.’

재경이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분명 상운인데, 재경이 겹쳐져 보였다.

닮은 점은 하나도 없는데도, 재경과 이렇게 시간을 보냈던 때가 떠올라 가슴이 지끈, 지끈, 지끈.

‘아파.’

아팠다.

그래서 화가 나고 슬펐다.

괜찮은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순간에도 재경을 떠올리게 되는 게, 바보 같고 미안했다.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아.’

재경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상대에게 못 할 짓이었다.

“과장님.”

상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윤영을 응시했다.

강아지 같은 그의 눈망울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지만, 윤영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죄송해요. 이렇게 만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네?”

상운의 눈이 커졌다.

“과장님이 저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틀렸다면 죄송하지만…….”

“틀리지 않았어요.”

상운이 윤영의 말을 끊었다.

“대리님 생각이 맞아요. 저, 대리님한테 관심 있어요.”

“아…….”

“처음 입사하셨을 때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첫눈에 반했다고들 하죠. 저, 대리님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그렇게 오래……요?”

“네, 그렇게 오래요. 아무래도 제가 이 회사를 더 오래 다녔고, 직급도 높다 보니 섣불리 접근하면 대리님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 친해질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요. 오늘이 저한테는 그 기회고요.”

“아…….”

상운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윤영은 더 난처해졌다.

“말 끊어서 죄송해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어요?”

상운이 물었다.

윤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과장님, 저는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을 해 온 남자가 있어요.”

“그렇군요.”

“놀라지 않으시네요.”

“네, 대리님처럼 매력적인 여자가 아직까지 혼자라는 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과장님은 참, 여자 기분 좋게 하는 말을 잘하시네요.”

“솔직하게 표현을 하는 것뿐이에요.”

“그럼 저도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 지금 과장님 만나면서 계속 그 남자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사람을 참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장님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멋대로 좋아하는 거니까 미안할 거 없어요. 저는 지금 이렇게 제가 짝사랑하는 여자와 단둘이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더 미안해지니까.”

상운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정말로 기적적인 일이에요. 보통은 엇갈리는 게 사랑이죠.”

상운의 말이 윤영의 가슴에 콱 박혔다.

정말로 그랬다.

사랑의 끝은 대부분 다른 곳을 향한다. 사랑과 사랑의 끝이 마주치는 것은 기적이었다.

“저는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막 대리님에게 관심을 표현했고, 첫 데이트를 하고 있죠. 지금은 엇갈린 상태로 시작을 하더라도, 이렇게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의 끝이 같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정말?”

“확률은 항상 반반이죠. 그저 상처 받는 게 무서워서, 상처 주는 게 미안해서 시작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봐요.”

“과장님은 정말 자신감이 넘치네요.”

윤영의 말에 상운이 쓴 미소를 지었다.

“도망치다가 사랑을 놓치고 싶진 않거든요. 대리님이 좋아요.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대리님이랑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어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은 대리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괜찮아요. 제가 잊게 해 줄게요.”

“전 지금도 계속 그 사람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걸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가끔 저랑 만나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해요. 가끔은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가고, 가끔은 힘든 일을 나누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대리님 마음에 제가 들어가지 않을까요?”

상운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제안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럴까?

언젠가 이 남자가 재경을 밀어내고 내 가슴에 들어오게 될까?

그리하여 사랑의 끝이 같은 곳을 향하는, 그런 기적적인 일이 내게도 벌어질까?

만약 그렇다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아픈 짝사랑을 그만두고, 지후와 나루처럼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알겠어요. 과장님의 제안, 고맙게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언제든 과장님이 그만두고 싶을 때는 말씀하세요.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 * *

상운과 예정대로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조금 울었다.

상운과 함께하는 내내 떠오른 재경이, 윤영의 가슴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설레야 하는 첫 데이트를 하면서도 재경만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비참했다.

이런 건 이제 정말로 그만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며 가슴이 무너지는 나날을 버티는 건, 이제 관두고 싶다.

“하아.”

윤영은 소리가 나도록 한숨을 내쉬며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거울에 비친 윤영은 무척이나 우울해 보였다.

‘나, 이렇게 어두운 애였나?’

그렇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잘 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때는.

‘그래, 이런 건 이제 관둬야겠어. 언제까지고 이 마음을 질질 끌고 갈 수는 없어.’

괜한 자존심에 이 마음 꽁꽁 감춰, 혼자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건 이제 그만.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지후의 죽음이라는 큰 과제를 해결한 후, 친구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나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는 걸어가야지. 내 시간을.’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윤영은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이 시간이면 재경은 아직 병원에 있을 것이다.

그의 스케줄을 꿰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래 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아, 나루는 알아주려나? 하긴. 지후랑 명진이도 내 마음을 눈치챘을 거야. 그리고 아마…… 재경이도.’

그럼에도 재경이 아무 말 하지 않는 건, 난처해서겠지.

내 마음에 재경이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나루가 있으니까.

내가 재경 때문에 다른 남자를 받아줄 수 없는 것처럼, 재경도 나루 때문에 다른 여자를 받아줄 여유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을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모르는 척하는 건 이제 그만둬야 돼. 계속 이 상태면 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거야.’

택시가 달리는 동안, 윤영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내 시간도 움직이게 해야 할 때가 왔다.

* * *

당직이라 병원에 남아 있던 재경은 책상 앞에 앉아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늘 낮, 나루에게 윤영의 데이트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쭉 해오던 고민이었다.

‘고백을 어떻게 해야 윤영이가 내 마음을 믿어줄까?’

이대로 윤영을 놓칠 수는 없었다.

이제 이 마음을 밝힐 때가 왔다.

하지만 과연 고백을 한다고 해서 윤영이 믿어줄지가 의문이었다.

윤영은 재경이 아직도 나루를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드르르르르―

책상에 놔둔 휴대폰이 울렸다.

무심코 휴대폰으로 시선을 던진 재경은 액정에 뜬 [윤영]이란 이름을 보고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어, 윤영아.”

[병원이지?]

“응, 너는?”

[난 병원 앞이야.]

“아, 그래? 기다려. 지금 갈게.”

[응.]

전화를 끊지 않고 귀에 댄 채로, 재경은 벌떡 일어나 당직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끊겼나 싶어 확인을 했지만,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어쩌지? 윤영이가 이 시간에 왜 온 거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오만가지 생각에, 윤영과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단 생각이 들었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입구를 향해 달렸다.

윤영은 정문 쪽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어스레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오도카니 서 있는 윤영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너를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어.

이 심장 박동을 네게 들려주고 싶어. 확인 시켜주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며 윤영에게 다가갔다.

“윤영아.”

윤영이 재경을 돌아보며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윤영이 말했다.

“아냐, 미안하긴. 어디 가서 좀 앉을까?”

“아니. 그냥 여기서 얘기하자.”

“아, 그럴래?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응. 있어.”

윤영이 고개를 들어 재경과 눈을 맞췄다.

재경은 지후가 나루에게 그러듯, 윤영의 볼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고개를 바짝 들고 나를 보는 그녀의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걸로 이 마음이 전해진다면, 몇 날 며칠이라도 그렇게 그녀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윤영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영원 같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재경의 불안함이 점점 커졌다.

‘그 남자랑 잘된 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데, 윤영이 먼저 말했다.

“재경아, 나 오늘 데이트했어.”

“아, 그래?”

전혀 몰랐다는 듯 대답했다.

“응, 우리 회사 과장님이랑.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

“아…….”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더라. 내가 좋대. 앞으로 우리의 끝이 같을 수 있게 함께 시간을 보내 보자더라.”

“아, 그래.”

‘그 자식은 뭘 하는 놈이기에 말을 저렇게 잘해? 말 잘하는 남자는 뻔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재경은 물었다.

“그래서…… 네 마음은 어떤데?”

윤영은 다시 입을 다물고 재경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우는 걸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윤영이 입을 열었다.

“재경아. 나는 사실…… 나는 사실 너를 좋아했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고백을 받았다.

이럴 때 멋진 대응을 해야 하는데, 재경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재경의 모습을 보며 윤영은 쓰게 웃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 처음에는 분명 아니었어. 하지만 어느 순간 너를 향한 감정이 사랑이 됐어. 사랑해. 그래, 재경아. 나, 널 사랑해.”

세상에 이렇게 슬픈 표정으로 사랑한다 말하는 여자가 또 있을까?

윤영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말했다.

“사랑해. 그런데 이 사랑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 나는 여전히 과거에 묶인 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그래서 이제 그만 접으려고. 널 향한 이 마음, 이제 접으려고.”

그제야 재경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접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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