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4)
2018.04.30.
“저기요.”
부르는 음성에, 나루는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가녀린 체형에 여성스러운 외모를 가진 여자가 간호사복을 입고 서 있었다.
아까 들어올 때 재경의 옆에 이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봤다.
윤영이 있어야 할 자리를 노리는 것만 같아, 의식적으로 여자를 무시하고 있었다.
여자가 찌르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척했는데 이렇게 끼어들 줄은 몰랐다.
‘보통 애는 아니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루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네?”
“아, 저기…… 안녕하세요. 정희라고 합니다. 최정희요. 이 병원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어요.”
정희가 느닷없이 자기소개를 했다.
“아, 그래요.”
정희는 나루도 자기소개를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나루는 그러는 대신 정희를 빤히 응시했다.
정희가 민망한지 딴 데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나루와 눈을 맞췄다.
“재경 선생님이랑 친하신 것 같아서요.”
“아, 그래요.”
“저도…… 재경 선생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 중이거든요.”
정희가 솔직하게 말했다.
‘호오. 솔직하고 순수한 여자 콘셉트인가?’
나루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정희의 시선을 맞받았다.
“저랑 제일 친한 친구 부인이에요.”
두 여자의 기싸움에, 어쩔 수 없이 재경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아, 친구 부인이시구나.”
정희가 눈에 띄게 안도했고, 그 모습이 나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심하지 마. 얘는 윤영이 거라고.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저는…….”
“저기요.”
나루가 정희의 말을 끊었다.
“저, 지금 이 친구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건데, 자리 좀 비켜주시지 않겠어요?”
“네?”
면박을 당한 정희의 눈이 커졌다.
보통은 예의상으로라도 인사를 받아주는 법인데, 이렇게 딱 잘라서 ‘너, 꺼져.’라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정희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나루를 쳐다봤다.
“최정희 간호사님인 거 잘 알겠고, 이 병원에서 재경이랑 같이 근무 중이시라는 것도 잘 알겠습니다. 아까 인사를 받았으니까요. 저, 재경이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온 거라, 인사는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했다. 표정 없이 단조롭게 말하는 모습이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네. 아, 저기. 죄송합니다.”
정희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화가 치밀었다.
‘뭘 긴히 할 말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면서. 무슨 말을 저렇게 해? 저러면 재경 선생님만 병원에서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거 모르는 거야? 진짜 개념이 없네.’
정희가 나루의 앞에서는 못했던 말들을 되씹으면서 씩씩거리며 올라가고 있을 때, 나루가 재경에게 물었다.
“내가 널 곤란하게 했어?”
“뭐야, 일 다 벌여놓고 이제 와서?”
“하지만 저런 타입 싫어.”
“그래, 나도 싫어. 잘했어. 안 그래도 곤란하던 참인데.”
“그래,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나루와 재경은 함께 병원을 나왔다.
“뭐 먹으려고 했어?”
“햄버거. 넌 뭐 먹고 싶은 거 없고?”
“응, 난 좀 전에 먹어서.”
“너, 원래 좀 전에 먹어도 또 먹잖아. 뭐라고 했더라. 아, 그…… 여자는 위장이 여러 개라고 했던가?”
“그거야 밥 배랑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는 거지. 보통 밥을 두 번 먹진 않거든?”
“그래, 그래.”
나루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이제는 나루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어도, 그런 마음으로 봐서는 안 되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친구들의 모임을 빠졌다.
사랑을 접지 못한 것이 지후에게 미안했고, 지후의 애인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 죄스러웠다.
나루를 보면 좋으면서도 가슴이 따끔거리는, 행복하면서도 슬픈, 모순된 감정이 항상 재경의 안에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조금의 어둠도 없이 나루를 대할 수 있었다.
‘윤영이 덕분이지.’
말해주고 싶었다.
네 덕분이라고. 네가 곁에 있어서 나는 이제 괜찮다고. 아주 많이 괜찮아졌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제였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곁에 있어주는 윤영에게,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윤영아, 난 이제 괜찮아. 정말로.
그래, 다행이다.
윤영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늘 곁에 있어주는 윤영에게 미안해서, 괜찮은 척 포장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난 정말 괜찮은데.’
파란 하늘이 예쁘다는 걸,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답다는 걸, 그 광경을 윤영과 함께하고 싶어졌다는 걸, 윤영에게 알리고 싶었다.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햄버거 세트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대학 근처의 가게라서, 대학생들이 많았다.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대는 대학생들을 보니, 대학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저 때에, 나도 저렇게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었다.
“아, 이번 시험 진짜 완전 망한 것 같아.”
“나도. 아니, 교수님은 왜 그런 문제를 내는 거야? 그거 수업 시간에 나오긴 했었어?”
“몰라, 자느라 못 들었어.”
시험이 막 끝났나 보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지.”
나루도 그 대학생들을 보고 있었는지, 그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 후에는 다른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아, 미안해. 우리 때문에 대학 생활을 제대로 못 즐기게 해서.”
“아냐, 미안하라고 한 말. 평범한 애들은 겪지 못할 일을 겪었잖아. 즐거웠어, 나름대로. 남한테 말해봐야 믿어주지도 않을 일들이지만.”
애잔하게 말하는 재경을, 나루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재경은 한때 저 연갈색 눈동자를 보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녀와 눈을 맞출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재경은 생각했다.
“재경아.”
“응?”
“오늘, 윤영이 데이트한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표정을 갈무리해야 하는데, 아주 잠깐 속마음이 얼굴로 드러났던 것 같다.
재경은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지만, 나루의 눈썹 끝이 내려갔다.
“회사 사람이래. 잘생기고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인기 많은 남자래. 윤영이보다 한 살 연하고. 그 사람이 윤영이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나 봐.”
나루가 장황하게 늘어놨다.
다행히 이어지는 말에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거 잘됐네.”
“정말?”
“응, 잘됐잖아. 윤영이도 이제 슬슬 연애해야지.”
“정말?”
“응, 정말.”
나루가 미간에 힘을 주고 재경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칠 수 있다는 말은 취소다.
나루가 이렇게 쳐다볼 때면, 재경은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나루의 맑은 눈동자는 때때로 재경의 머릿속을 휘젓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나루 특유의 재능인지, 아니면 나루가 재경보다 12년을 더 살아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이렇게 쳐다볼 때면 재경은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재경은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느릿하게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말했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왜일까.
나루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나, 윤영이를 사랑해. 나, 이제 그 애를 사랑하게 됐어. 나는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너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왜 말할 수 없는 걸까.
어쩌면 너무 가벼운 남자로 보일 것만 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알겠어, 그럼. 윤영이한테 잘 해보라고 응원해 줄게.”
나루가 입술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또다시 심장이 철렁했다.
뭐, 그렇게까지야. 응원까지 해 줄 필요는 없잖아.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너무 속보이는 말이었다.
“그리고 있잖아, 재경아. 나 고민이 하나 있는데.”
“응, 뭔데?”
“음. 그게…… 음.”
그 시점에서 재경이 한 번 더 “무슨 일이야?”라고 물어줬더라면, 나루는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재경은 윤영이 데이트를 한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루의 어두운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한참 망설이던 나루는 생각을 바꿨다.
“아냐, 아무것도.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나루는 가게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를 타자마자 나루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늘 재경을 만나러 온 목적은, 윤영의 데이트 사실을 알리는 것도 있었지만 고민 상담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민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지후는 이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나루는 걱정스러웠다.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아이를 갖기에 좋은 몸 상태는 아닐 것이다.
밤샘을 밥 먹듯이 하고, 연구를 할 때는 끼니를 거르는 적도 많으니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불안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재경에게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남자인 재경에게 이런 걸 자세히 물어보기가 힘들었다.
‘그냥 산부인과를 한번 가 봐야 하나?’
* * *
―오늘, 윤영이 데이트한대.
―잘생기고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인기 많은 남자래.
나루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환자가 앞에 있는데도, 나루가 계속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인기 많은 남자는 피곤할 뿐이야. 여자를 지치게 만든다고. 좋은 남자가 아냐.’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자신도 그런 남자의 범주에 들어 있음을.
‘게다가 난 윤영이랑 가장 친한 친구를 짝사랑하기까지 했었지. 최악이네.’
어느 것을 갖다 붙여도 ‘친구를 짝사랑했던 남자’는 최악의 위치에 속한다.
어쩌면 친구의 전 애인이나 전 남편보다 더 아래쪽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영이는 인기가 많지.’
재경의 마음에 윤영이 들어온 후에도, 윤영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남자들이 꽤 많았다. 윤영이 종종 데이트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도 이제 33살이니까.’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있다.
통상적으로 여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결혼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주변에서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닦달을 하기도 한다.
윤영도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있을 것이다.
서른 살을 막 넘겼을 때, 윤영이,
“하, 친척들이 결혼 안 하냐고들 난리야. 지금 그럴 정신이 없는데.”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랬다.
서른 살 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작년까지 그들은 ‘지후의 죽음’이라는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결혼 같은 걸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윤영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많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장 큰 과제가 사라졌다.
이제 윤영에게 들려오는 ‘결혼’이라는 이야기는, 전과 다르게 스트레스가 될 것이고, 불안이 될지도 몰랐다.
가장 친한 친구인 나루는 결혼을 했고, 선미와 지영도 그랬다.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는 모습을 보며, 윤영도 이제는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지독한 사랑은 관두고, 평온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길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와는 다르다.
‘안정적인 직장에 능력이 있고 외모까지 괜찮은 남자라면, 결혼 상대로 좋겠지.’
쓴웃음이 나왔다.
왜 나는 서른이 넘은 이 시점에도, 20대 초반과 달라진 것이 없을까.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데, 나는 왜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을까.
“선생님, 표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까 나루에게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정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경의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정희가 재경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물었다.
“아니요. 아니, 있네요.”
재경은 정희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일로 마음이 안 좋아서요.”
정희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짝사랑……이요? 재경 선생님이요? 여자를 짝사랑한다고요?”
“네, 저도 짝사랑쯤은 합니다.”
“아니, 대체 왜요? 재경 선생님은 엄청 잘생기셨잖아요.”
“여자들이 전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서로 좋아해도 장애물이 있는 경우도 있고요.”
‘친구를 짝사랑했던 남자’라는 장애물.
하지만 정희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거의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휙 돌아섰다.
정희가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재경은 그저 윤영 생각뿐이었다.
‘윤영이, 지금쯤 그 남자랑 데이트를 하고 있을까?’
* * *
‘그 여자겠지?’
정희는 간호사실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래, 그 여자일 거야.’
서로 좋아해도 장애물이 있는 경우.
생각나는 건, ‘불륜’밖에 없었다.
친구의 부인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그 여자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어. 그 여자가 재경 선생님 대하는 것도 심상치 않았고. 아무리 친해도 남편 친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잖아. 그 여자가 나한테 한 것도 분명 자기 남자를 건드리는 것 같으니까 질투해서 한 짓이 분명해.’
그렇게 답이 나오자, 그동안 재경을 좋아했던 마음이 분노로 바뀌었다.
감히 나 같은 여자를 거부하고 불륜을 저지르다니.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어. 따위의 그릇된 정의감이 정희의 가슴을 지배했다.
그릇된 정의감은 그릇된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정희는 간호사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 간호사들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 성재경 선생님, 불륜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