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3)
2018.04.26.
“응, 한 번 만나보려고.”
설레어야 할 새로운 만남을 이야기하면서도, 윤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미소는 짓고 있지만, 윤영을 오래 알아온 나루는 그것이 즐거워서 짓는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울적함을 감추고 싶을 때 억지로 짓는 미소. 재경과 함께 있을 때 종종 짓는 그 미소.
윤영의 그 마음이 절절히 전해졌다.
그 기분을, 나루도 이제는 알고 있다.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지후를 짝사랑 한다 여겼던 기간이 있었다.
그때에 나루 또한 저런 미소를 지었다.
그를 사랑하지만 사랑한다 말할 수 없어 답답했던 그때에, 그렇다고 마냥 울 수만도 없던 그때에, 나루 역시 저런 미소를 지었다.
나루는 윤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숨을 삼키고 물었다.
“만나면 좋을까?”
“나쁘지 않은 사람이니까. 느낌은 괜찮은 것 같아.”
“좋다는 마음이 생길까?”
“글쎄. 그랬으면 좋겠어. 나도 이제 슬슬 한 사람한테 정착하고 싶거든. 너희들 보면 정말 부러워.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그럼…… 재경이는?”
나루가 망설이다가 던진 질문에 윤영의 눈이 커졌다.
정곡을 찔렸다는 당황스러움이 윤영의 얼굴에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곧 표정을 갈무리한 윤영이 웃었다.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였다.
“여기서 재경이가 왜 나와?”
조금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는 걸, 윤영은 알고 있을까?
나루는 입을 꾹 다물고 윤영을 응시했다.
윤영은 마치 상처 받은 고양이처럼, 그리하여 인간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첫사랑을 실패했고, 대학에 와서 지후를 짝사랑하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이제 윤영은 한때 가장 친한 친구를 짝사랑했던 남자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윤영은 사랑을 이룬 적 없어 갈기갈기 찢긴 심장이 아파, 차마 그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나루에게조차, 윤영은 말하지 못했다.
있잖아, 나루야. 나, 널 짝사랑하는 재경이를 좋아하게 됐어.
그런 말을 꺼내는 건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이제 재경이는 날 좋아하지 않는데.’
재경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섣불리 전할 수도 없었다.
한때 재경의 사랑을 오롯이 받던 입장에서 하는 말은, 윤영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설득을 해 봐야 소용없겠지.’
설득으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 무절임 맛있다.”
분위기가 묘해졌기에, 나루는 일단 말을 돌렸다.
윤영도 그게 낫겠다 싶었는지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따 볶음밥 추가할 거야?”
“그러자. 요샌 밥을 먹어야 끼니를 때운 느낌이더라고.”
“맞아, 맞아. 어릴 땐 밥 안 먹고 반찬만 먹어도 배불렀었는데.”
나루와 윤영은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채로 헤어졌다.
* * *
나루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지후는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왔어?”
지후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물었다.
“응, 뭐 읽고 있었어?”
“그냥 추리 소설.”
나루가 다가가자, 지후가 몸을 뒤로 움직여 소파 앞부분을 비워주었다.
나루는 거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지후의 팔이 자연스럽게 나루의 복부를 감쌌다.
“윤영이랑은 재미있었어?”
“재미있었다고 해야 하나?”
나루는 상체를 기울여 지후의 품에 파고들었다.
둘이 눕기에 좁은 소파지만, 거기서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는 게 좋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사람들이 아로마 향으로 심신을 달래는 것처럼, 나루는 지후의 향기를 맡을 때가 가장 편안했다.
지후가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 있었어?”
“윤영이가 데이트를 할 거래.”
“재경이랑?”
“그래,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다른 사람이랑?”
“응, 걔네 회사 과장이래.”
“흐음.”
“과장이기는 한데 윤영이보다 어리고, 일도 잘하고 사람이 괜찮은가 봐.”
“그럼 잘된 거 아냐?”
지후의 말에 나루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소파에서 내려온 나루는, 바닥에 앉아 지후를 응시했다.
“정말로 잘됐다고 생각해?”
“윤영이도 슬슬 사랑을 해야지.”
“이미 사랑을 하고 있잖아.”
“하지만 둘 다 고백할 생각도 없이 간을 보고, 눈치만 보는 사랑이지.”
“나는 재경이랑 윤영이랑 잘됐으면 좋겠어.”
나루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지후가 소파에 똑바로 앉아,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상체를 기울였다.
“나도 그래. 나도 그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정말로 그랬다.
지후는 재경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옛 시간, 재경은 지후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나루에게 반했다.
그러나 지후가 나루를 사랑하기에, 가슴에 품은 마음을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고 짝사랑을 했다.
지후는 죽는 순간까지도, 재경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이 시간에도 재경은 짝사랑을 했다.
나루를 향한 마음, 이 시간에서는 그나마 고백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사랑을 한동안 접지 못해 힘들어했다는 것을, 그럼에도 지후와 나루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는 것을, 지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사랑은 잘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윤영은 재경이 나루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마치 운명처럼 나루를 향한 그 사랑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재경이 ‘이제 널 사랑하게 됐어.’라고 말한들, 쉬이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영은 반복된 사랑의 실패로, 자신감이 많이 하락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그 두 사람이 용기를 낼까?”
나루가 중얼거렸다.
지후는 시간이 갈수록 사랑스러운 자신의 부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입술을 비쭉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학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매일 같이 살다 보면 질릴 법도 한데, 봐도 봐도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보냐?”
“귀여워서.”
“이 시점에서 왜 그렇게 날 귀여워하는 건데? 나 지금 고민하고 있거든?”
“성인 남녀가 하는 사랑이잖아. 우리가 개입해서 좋을 건 없어. 그 둘이 알아서 할 문제야.”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 등을 떠밀어 줘야 할 때도 있는 거잖아. 사자가 자식을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리듯이.”
“아니, 낭떠러지에서까지 미는 건 좀.”
“지금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야. 윤영이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고, 재경이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불안하고 답답해. 저러다가 윤영이가 정말로 그 과장이라는 사람이랑 잘되면 어떻게 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겠지. 윤영이도 이제 사랑 받는 삶을 살아야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을 받는 게 좋은 거야. 윤영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재경이고, 고백도 못 한 그 사랑이 사랑 좀 받는다고 사라질 리가 없어. 윤영이는 평생 후회할걸. 재경이도 그렇고.”
“그래, 그래.”
“그렇게 어린애 어르듯이 말하지 마.”
“그럼 어쩌게? 정말로 등 떠밀게?”
“생각해 봐, 지후야. 우리가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도 32살까지 살다 온 성인이었어. 하지만 결국 누군가 우리의 등을 떠밀어 줄 때까지 말도 못 한 채 끙끙 앓기만 했잖아.”
“그래, 그랬지.”
“손과 손을 붙잡고 억지로 쥐여 줄 수는 없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 주고 싶어. 그 애들도 그래왔으니까.”
“그래,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럼 도와줄 거야?”
“응, 알잖아. 나는 항상 네 편인 거.”
지후가 일어나 나루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내가 씻겨줄게.”
“뭐야, 그 핑계로 사리사욕 채우려는 거 아냐?”
나루가 밉지 않게 지후를 흘겨봤다.
지후는 웃으며 나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알잖아. 나, 욕심 많은 남자인 거.”
나루가 까르르 웃으며 지후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지후는 조심스럽게 나루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냈다.
항상 보이는 몸인데도, 이렇게 옷이 벗겨지는 과정은 늘 부끄러웠다.
나루가 몸을 틀자, 지후가 웃으며 그녀의 날씬한 배에 입을 맞췄다.
“매일 보여 주면서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럼 부끄럽지, 당연히. 난 아직 수줍은 소녀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나도 그런데.”
“너도 그렇긴.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면서.”
“응, 난 늘 널 사랑한다는 생각뿐이야.”
“말이나 못하면.”
함께 씻고 침실로 향했다.
은은하게 조명을 밝힌 침대에서, 둘은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뜨거운 숨결이 섞이고 체온이 부딪치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항상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뜨거운 행위가 끝난 후, 지후가 나루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는 순간이 좋았다.
나루는 땀에 젖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해, 나루야.”
그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나도.”
행복했다.
하지만 나루의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검은 얼룩이 하나 남아 있었다.
‘어째서 아이가 안 생기는 거지?’
* * *
일요일 아침, 윤영은 씻고 나와서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뭘 입어야 할지 아직도 결정을 못 했다.
‘너무 꾸미고 나가면 좀 그렇겠지? 그냥 청바지에 남방이나 입자.’
윤영은 옷장을 열고 청바지와 흰색 남방을 꺼냈다.
워낙 얼굴이 작고 귀염상이라서 청바지에 흰색 남방만 입었을 뿐인데도 잘 어울렸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시간도 때울 겸 화장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화장을 하다 보니, 평소보다 공들인 화장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 갈 때는 비비크림에 립스틱 정도만 바르기 때문에, 눈까지 색조 화장을 한 윤영은 사뭇 달라 보였다.
화장까지 끝내고 다시 전신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청바지에 흰 셔츠도 나쁘지 않았지만, 원피스를 입으면 좀 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나도 언제까지나 짝사랑만 할 수는 없지.’
윤영은 옷장을 열고 A라인 청색 원피스를 꺼냈다.
사랑을 하고 싶었다.
친구의 연인이나, 친구를 짝사랑하는 남자를 몰래 사랑하며 가슴앓이 하는 사랑은 이제 싫었다.
잠이 들 때마다 저릿한 가슴을 부여잡아야 하는, 때로 끝없는 고독감에 시달리게 하는 짝사랑은 이제 관두고 싶었다.
나루와 지후처럼,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죽는 순간까지도 서로만을 생각하는, 그런 사랑을 소망했다.
원피스로 갈아입은 윤영은 거울을 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기 위해 나가려는 자신의 모습이, 적진으로 향하는 장수처럼 보여서 조금 서글펐다.
* * *
재경은 조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곧바로 환자를 봐야 하기에, 점심 먹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햄버거나 먹을까? 그러고 보니 햄버거 먹은 지도 꽤 됐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정희가 재경을 불렀다.
“재경 선생님.”
정희의 목소리에 한숨이 먼저 나왔다.
정희는 머리가 나쁜 여자가 아니었다. 재경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기 싫어한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알면서도 접근하는 여자는 귀찮다.
그런 여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서, 이 남자가 자신을 거부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대시를 해온다.
간혹 아무 사이가 아닌데도 사귀는 것처럼 구는 여자도 있었다.
모르는 척할 수는 없어서 걸음을 멈춘 재경을, 정희가 따라잡았다.
오늘은 올림머리를 한 정희가, 생글생글 웃으며 재경을 올려다봤다.
“이제 식사하러 가시는 거예요?”
“네, 환자를 보다 보니 이 시간이 됐네요.”
“으아, 너무 배고프시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놔줘, 라고 생각하며 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배가 고프네요.”
“뭐 드실 거예요? 혼자 가세요?”
“네, 혼자요. 햄버거를 먹을까 해요.”
“아, 햄버거! 저도 햄버거 좋아하는데.”
눈을 빛내며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니, 같이 가자는 제안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드시러 가세요.”
재경의 대답에 정희는 실망스러운 듯했지만, 미소를 거두지는 않았다.
“선생님, 10분만 기다려 주시면 저도 일 급한 거 끝나는데 같이 가실래요?”
“아뇨, 전…….”
“재경아.”
그때,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적절할 때에 끼어든 그 음성이, 적어도 재경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나루야.”
재경은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재경이 웃는 모습에, 정희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재경이 웃는 건 자주 봤지만,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지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나루?’
대체 누굴까? 재경에게 이런 미소를 짓게 만드는 사람은.
정희는 질투와 짜증이 확 오르는 기분으로 나루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얗다.’였다.
하얀 피부가 눈부신 사람이었다.
딱히 미소를 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상큼한 느낌이 들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큰 눈과 오뚝한 코가 인형 같았고, 입술이 무척이나 붉어서 단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뒤로 대충 묶어 머리카락 몇 올이 길고 흰 목덜미 근처에 하늘거렸다.
재경을 이름으로 부른 걸로 봐서는 재경과 또래일 텐데도, 외모만 봐서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그런 한편 성숙함이 숨어 있기도 했다.
정희는 첫눈에 나루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진 여자라는 걸 알아봤다.
“여긴 어쩐 일이야?”
재경이 다정하게 물었다.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도 처음이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
모두가 원하는 남자가 상냥하게 대해주는데도, 나루의 태도는 뚱했다.
“아, 그래? 점심은?”
“먹었어, 대충. 너는?”
“나는 지금 먹으러 가는 길이야.”
“아, 그럼 같이 가. 먹는 거 지켜봐 줄게.”
“그거 무섭네.”
재경이 작게 웃었다.
정희는 자신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다.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