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2)
2018.04.23.
한숨을 삼키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나루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윤영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응, 나루.”
[윤영, 뭐해?]
“아직 회사야.”
[지금 11시인데? 어제도 야근하지 않았어?]
“응, 아주 죽겠다. 다음 주쯤 되면 좀 한가해질 것 같긴 한데, 이번 주는 비상이야.”
[으아, 너무 힘들겠다. 내일 만나자고 하려고 했는데.]
“주말에 만나자. 아, 주말엔 지후랑 데이트하나?”
[아니, 너랑 만날래. 오랜만에 여자 둘이서 곱창 먹으러 가자.]
“오, 좋지. 아니면 선미나 지영이 불러도 되고.”
[응, 애들한테 연락 넣어볼게.]
“그래, 그럼 시간 정해서 연락 줘.”
[힘내, 윤영.]
나루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마 나루도 아직까지 연구실에서 일을 하는 중일 것이다. 윤영이 피곤할까 봐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나루가 좋았다.
한때는 이 친구를 미워한 적이 있었다는 게,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루는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나루에게는 그 기적이 벌어졌지만.
‘나한테는 안 벌어지겠지.’
사무실로 돌아갈 기분이 들지 않아 휴게실에 조금 더 앉아 있기로 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을까 했는데, 동전을 안 들고 나왔다.
그래서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휴게실 문이 열리고 정상운 과장이 들어왔다.
상운은 올해 32살로,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윤영보다 어린데도 직급이 높았다.
말이 별로 없고 진지한 면이 있지만,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생겨서 여직원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그동안 고백을 한 여직원이 꽤나 많다고 들었다.
윤영을 본 상운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판기로 향했다.
“저기, 과장님.”
“네?”
“동전 더 있으세요?”
“네, 있습니다.”
“저, 커피 한 잔만 뽑아주실래요? 들어가서 돈 드릴게요.”
윤영의 말에 상운이 싱긋 웃었다.
“돈 안 주셔도 돼요. 커피 한 잔 정도야.”
“에이, 그래도 그럴 수는 없죠.”
상운이 밀크 커피를 뽑아 윤영에게 건넸다.
윤영은 커피를 받아 들고 휴게실 의자에 앉았다.
상운도 커피를 뽑아와 윤영의 옆에 앉았다.
“많이 피곤하시죠? 요새 계속 야근이라서.”
침묵이 어색해서 윤영이 말문을 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과장님이 제일 늦게 퇴근한다던데. 대단하세요, 진짜.”
“대단하긴요. 돈 받은 만큼 더 일해야죠.”
“과장님은 어린데도 생각이 참 깊으신 것 같아요.”
그 말에 상운이 고개를 돌려 윤영을 빤히 응시했다.
‘아, 내가 말실수 했나? 어리다는 표현은 좀 그랬나? 나보다 직급이 높은데.’
윤영은 아차 싶었다.
“저기, 음. 어리다가 아니라 젊다!”
윤영이 얼른 말을 바꿨다.
상운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곧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휘어진 눈매가 귀여웠다.
“그게 뭐예요?”
그제야 상운이 32살이라는, 제 나이로 보였다.
“아뇨, 어리다고 해서 기분 나쁘신가 해서.”
“기분 안 나빠요. 제가 대리님보다 어린 건 사실인데요.”
“그래도 과장님이신데.”
“아하하.”
상운이 소리를 내서 웃는 건 처음 봤다.
환하게 웃는 상운은 또래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대리님, 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직급일 뿐이잖아요.”
“네, 그렇긴 하죠.”
이 회사에 입사한 지 2년이 조금 넘었지만, 상운과 제대로 대화를 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회사로 옮겼을 때가 딱 지후와 나루의 일로 걱정이 클 때였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이랑 어울린 적이 별로 없었다.
상운은 윤영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잘 웃었다.
“제가 낯가림이 심해서 말을 많이 안 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절 좀 무섭게 생각하더라고요. 얼굴도 좀 무서운 편이라 그런가?”
상운이 자기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무표정할 땐 좀 무섭긴 해요. 하지만 무표정이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제 좀 잘 웃어볼까 봐요.”
“그러세요. 과장님 웃는 얼굴, 꽤 귀여워요.”
솔직한 칭찬에 상운의 눈이 커졌다.
“귀여워요?”
“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아,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은 실례인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상운이 싱긋 웃었다.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전 그만 들어가 볼게요. 너무 오래 나와 있었네요.”
윤영이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고 일어났다.
“커피 감사해요. 다음에 과장님 동전 없을 때, 제가 커피 한 잔 쏠게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휴게실을 나가는 윤영의 뒷모습에서, 상운은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참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김윤영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입사 첫날, 윤영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환한 미소와 달콤한 목소리가 상운의 심장에 콱 틀어박혔다.
작은 키에 마른 몸, 동그란 눈과 볼살이 있는 얼굴은 무척이나 어려 보였지만, 행동은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선을 지킬 줄 알고, 자기가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해냈다. 사원들과도 곧잘 어울렸고, 회식 자리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인지 윤영은 늘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년까지는.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작년 어느 날을 기점으로, 윤영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분명 이 세상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사원들 중에도 윤영에게 호감을 품은 남자들이 몇 명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영은 철벽 아닌 철벽을 쳤고, 그 철벽을 조금이라도 넘어본 사람이 아직까지는 없었다.
상운은 손을 펼쳐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지금껏 원하는 것은 항상 손에 넣어왔다.
‘하지만.’
윤영은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야 업무가 끝났다.
다른 사원들은 거의 퇴근을 했고, 상운과 윤영, 그리고 다른 남자 대리 한 명만 남아 있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윤영이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네, 들어가세요.”
대리가 말했다.
“아, 저도 일이 끝났네요. 가보겠습니다.”
상운이 일어났다.
사원들이 비슷하게 일이 끝나서 퇴근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기에, 대리도, 윤영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윤영은 상운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윤영은 1층을, 상운은 지하 2층을 눌렀다.
“윤영 대리님은 뭐 타고 가세요?”
“음, 글쎄요. 택시를 타야겠죠? 과장님은 차 가지고 오셨죠?”
“네, 데려다드릴까요?”
상운의 질문에 윤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운에게 이런 제안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왜요?”
그래서 묻고 말았다.
“네?”
“아니, 저…… 왜 데려다주세요?”
“밤길 위험하니까요.”
“아, 그렇구나. 과장님은 되게 친절하신 분이군요. 의외예요.”
“제가 그렇게 불친절해 보입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옳은 평가라고, 상운은 생각했다.
이유 없는 친절은 베풀지 않는 성격이고, 지금 베푸는 친절은 이유 없는 친절이 아니었다.
당신한테 관심이 있으니까요.
그 말을 꿀꺽 삼키며, 상운은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 때문에 늦게 퇴근하시는 건데, 사고라도 일어나면 뒤숭숭해요.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거절하진 않을게요.”
윤영이 1층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취소했다.
지하 2층에 도착해, 상운의 차에 탈 때까지 침묵이 흘렀다.
휴대폰 내비를 켜며, 상운이 물었다.
“댁이 어디세요?”
“음, 합정역 근처에 세워주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상운은 더 자세한 집주소를 묻지 않고 시동을 켰다.
상운의 차는 외제는 아니지만, 꽤 고가의 승용차였다.
소리 없이 달리는 승차감이 좋았다.
최근 계속 피곤했던 터라 자꾸 눈이 감겼다.
“도착할 때까지 20분 정도 걸리니까, 좀 주무세요.”
상운이 말했다.
“에이, 조수석에 앉아서 자는 예의를 배우진 않았어요.”
“제 조수석에서는 괜찮아요.”
“안 될걸요. 제 친구 한 명이 자기 운전할 때 조수석에서 자면 아주 경기를 일으키거든요.”
“아, 친한 친구인가 봐요?”
“네, 친하죠.”
윤영은 명진을 떠올렸다.
저번에 같이 여행갈 때 조수석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20분 정도 잠이 들었는데, 그걸 가지고 여행 일정 내내 잔소리를 해댄 적이 있었다.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겼는데, 참으로 집요하고 말 많은 친구다.
윤영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본 상운은, 지금 윤영이 생각하는 사람이 ‘남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긴.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애인이 없을 리가 없지. 내가 너무 김칫국을 마셨던 건가?’
그러나 확인은 해 보고 싶어서, 넌지시 물었다.
“주말에는 데이트하세요?”
“데이트. 네, 하죠.”
윤영은 나루를 만나기로 한 걸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 애인이 있으셨구나.”
“아뇨, 애인은 없어요.”
“데이트라고…….”
“친구예요.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아아.”
“정말 예쁜 친구예요. 머리도 좋고.”
즐거운 듯 이야기하는 윤영의 모습에, 상운은 안도했다.
‘남자가 아니었군.’
“예쁜 사람은 예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나 봐요.”
상운이 말했다.
“네?”
“대리님도 예쁘시잖아요.”
“아…….”
생각지도 못한 담백한 칭찬에, 윤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감사해요. 예쁘다는 말은 진짜 오랜만에 듣네요.”
“그래요? 엄청 예쁘신데.”
“아하하하.”
윤영은 어색하게 웃고 차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영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제는 상운이 데려다주는 것이 이유 없는 친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나한테 관심이 있었구나.’
괜찮은 남자이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상운도 윤영이 눈치챘다는 걸 깨달았는지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차는 달렸고, 합정역 앞에 도착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윤영이 감사 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다음에 제가 차 사면 한 번 데려다드릴게요.”
반쯤은 농담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단한 일을 해 드린 것도 아닌데.”
상운도 차에서 따라 내렸다.
차를 사이에 두고, 상운과 윤영은 서로를 마주봤다.
“늦은 시간인데 고생하셨잖아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럼 정말 고맙지, 제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어요?”
윤영의 말에 상운이 씩 웃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꽤 장난꾸러기처럼 보인다.
“그럼 윤영 대리님. 일요일에 보답해 주세요.”
“네?”
“저랑도 데이트해 주세요.”
* * *
“선미랑 지영이는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갔어. 어젯밤에 출발했다더라.”
약속 장소에는 나루가 먼저 나와 있었다.
나루는 시간이 갈수록 더 예뻐졌다.
지후의 죽음이라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털어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환하게 웃는 나루의 모습에 윤영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너랑 지후도 같이 가지 그랬어?”
“지후는 그런 자리 불편해하거든. 나도 일 때문에 갈 시간이 없기도 하고.”
“요새 많이 바빠?”
“응,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해서 좀 그러네. 너는 바쁜 거 끝났어?”
“그런 것 같아. 다음 주부터는 정시 퇴근하겠지. 모둠으로 시킬까?”
“대 자 시키자. 너무 배고파.”
모둠 곱창 대 자를 시켰다.
불판이 놓이고 밑반찬이 차려졌다.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나루는 밥도 없이 밑반찬을 집어 먹었다.
“점심 안 먹었어?”
“응, 대청소 좀 했거든. 봄맞이 대청소.”
“집이 넓어서 청소하는 것도 일이겠다.”
“지후가 시간 날 때마다 하기는 하는데, 한 번씩 대청소는 해 줘야겠더라. 안 보이는 곳이 얼마나 더럽던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나루를 보니, 이제 정말로 주부가 다 되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운명과 죽음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때가 꿈결처럼 희미해졌다.
그때는 만나기만 하면 죽음과 운명에 대한 주제가 빠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 사이에는 항상 평범한 일상적인 주제만 오고 갔다.
곱창과 대창, 염통, 막창이 골고루 섞인 모둠이 나왔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자글자글 익어가는 동안, 나루는 젓가락을 들고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33살인데도 주름살 하나 없는 나루는, 후드 셔츠를 입으면 대학생으로도 보일 것 같았다.
이러니까 지후에게, 그리고 재경에게 사랑을 받는 거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우니까. 가슴이 간질간질해질 만큼 귀여우니까.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에야, 나루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요새 어떻게 지내? 회사 일만 한 거야?”
나루가 윤영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응, 그렇지, 뭐.”
“재미있는 일 좀 없고?”
“재미있는 일이라.”
상운이 떠올랐다.
“사실은 나,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
“오, 누구한테?”
“정상운이라고, 우리 회사 과장이야.”
느닷없이 등장한 낯선 이름에, 나루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상운이라니. 당연히 성재경이라는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과장? 그럼 나이가 좀 많지 않아?”
나루는 우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니, 나보다 한 살 어려. 회사 생활을 일찍 시작한 데다가 업무를 잘해서, 승진을 빨리 했나 봐.”
“흐음. 잘생겼어?”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 키고 크고 얼굴도 단정하게 생겼거든.”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남자는 별로야. 마음고생 시킬걸.”
“아하하하. 아니, 데이트 신청을 받은 거지, 사귀는 건 아니야.”
윤영이 남의 속도 모르고 웃었다.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재경을 향한 윤영의 마음을 오래전에 눈치채고 있었다. 윤영을 향한 재경의 마음 또한, 꽤 오래전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둘 다 그 마음을 꽁꽁 감추고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성인 남녀 둘이서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어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쯤 되고 나니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표정이 왜 그래?”
뾰로통한 나루의 얼굴을 보고 윤영이 물었다.
나루는 표정을 풀지 않고 윤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랑 데이트하기로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