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84화 (84/93)

84화. 번외 2 ; 이 시간의 주인공 (1)

2018.04.19.

바쁜 일과가 끝나가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정신없는 하루였다.

병원 근처에서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환자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수술하는 내내 눈에 힘을 주고 있었더니 눈이 뻐근했다.

재경은 휴게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해가 오렌지빛 노을을 만들어 냈다. 오랜만에 하늘을 보는 것 같다.

문득 생각이 나 휴대폰을 들어 노을 사진을 찍었다.

찰칵―

예쁜 노을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메신저를 열어 사진을 보내려고 할 때였다.

“선생님. 이제 수술 끝나신 거예요?”

언제 들어온 건지 정희가 재경의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 최정희 간호사님.”

재경은 휴대폰을 끄고 정희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정희는 올해 27살로, 작년에 재경이 일하는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밝고 명랑한 성격이라 의사와 간호사들에게도, 환자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방금 끝났어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곧 퇴근해야죠.”

“어젯밤부터 정말 바쁘셨죠? 많이 힘드시겠어요.”

“괜찮아요.”

“노을 사진 찍으셨던 거예요? 노을 예쁘다.”

“그러게요. 오랜만에 이 시간에 하늘을 보는 것 같아서.”

정희가 재경을 돌아봤다.

“노을 때문에 성재경 선생님 눈동자 색깔이 되게 예뻐요.”

“아, 그래요. 고마워요.”

재경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선생님.”

정희가 조심스럽게 재경을 불렀다.

“네?”

“저, 음. 아니, 음. 선생님, 제가 더 어린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지금이 편해요.”

재경이 딱 잘라 말했다.

정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들 편하게 말씀하시는데, 성재경 선생님만 존댓말을 쓰셔서, 조금 거리감이 느껴져요.”

“이 정도 거리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직장 사람이랑 너무 가까워져 봐야 피곤할 뿐이에요.”

“아…….”

재경의 단호한 거절에, 정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 수고했어요, 최정희 간호사님. 먼저 들어가 볼게요.”

재경은 도망치듯 휴게실을 나왔다.

잘난 얼굴 탓에 어디를 가나 여자들이 호감을 보여 왔다.

마음에 없는 여자들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건 익숙하지만 여전히 곤란했다.

친구들은 배부른 소리라고들 했지만, 재경은 조금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원치 않는 것들을 여러 개 갖는 것보다, 원하는 거 딱 하나. 그 하나를 갖는 것이 좋았다.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며,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 보내지 못한 노을 사진을 보낼까 하다가 관뒀다.

[하늘 봐 봐. 노을 예쁘다.]

그렇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

재경은 한숨을 푹 내쉰 후에,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막 집 앞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명진이었다.

[뭐하냐?]

“방금 집에 왔어. 넌 한국이야?”

[어, 그저께 돌아왔어. 심심하다. 술 마시자.]

“그럴까? 어디서 볼까?”

[혼자 있으면 너네 집으로 가고. 여자 있으면 미리 돌려보내고.]

“여자는 무슨. 술 사 와. 안주는 내가 준비할게.”

[오케이.]

명진과 만나는 건 언제나 유쾌했다.

간단한 술안주를 준비하는 동안 명진이 양손 가득 술을 들고 도착했다.

“야, 뭔 술이 이렇게 많냐?”

“마시고 죽자. 내일 출근 안 하지?”

“넌 내 스케줄을 어떻게 꿰고 있는 거야?”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명진이 웃으며 술을 내려놨다.

외국에 나가서 사왔는지, 양주도 여러 병 들어 있었다.

“와, 이거 비싼 거 아냐?”

재경이 술병 하나를 들고 물었다.

“어, 비싸더라.”

“이런 걸 지금 마셔도 돼? 나중에 기념할 일 있을 때 마셔.”

“지금이 기념할 날이지. 내가 새 생명을 얻은 지 12주년 되는 날.”

“아,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러고 보니, 12년 전 오늘. 명진은 죽게 되어 있었지만 살아남았다.

지후의 죽음을 벗어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 모든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마실 만하지?”

“매년 자축하냐?”

“생각날 때만. 오늘 너랑 술 마실까 하고 있는데 마침 그날이더라고. 이야, 이거 맛있다.”

재경이 준비한 안주를 하나 집어먹은 명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징어에 소주를 부어서 졸여 만든 안주였다.

“우리 재경이, 시집갈 준비 다 됐네. 시집은 언제 가나?”

“시집은 무슨. 애인도 없는데.”

재경은 피식 웃으며 접시를 테이블로 옮겼다.

“아직도 나루 못 잊었냐?”

명진이 좋은 이유는,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안쓰럽다는 듯,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지 않아서 좋았다.

“못 잊은 것처럼 보이냐?”

“아니, 누가 봐도 잊은 것처럼 보여. 내 예상엔 한…… 4년 됐다고 본다.”

깜짝 놀랐다.

“너, 진짜 감 좋다.”

“끝내주지.”

명진이 우쭐해했다.

“너는 윤영이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돼.”

명진의 말에 재경은 흠칫했다.

“어? 아, 어. 그렇지. 고마워하고 있어.”

진심이었다.

윤영에게는 항상 고마웠다.

옛 시간 성재경의 마음을 보고 온 윤영은, 이 시간 재경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었다.

나루를 향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서글픈 날이면, 언제나 윤영에게 연락이 왔다.

과하지 않게 재경을 위로해 주는 윤영이 고마웠고, 어느 날부터인가 귀여웠고, 또 어느 날부터인가는 사랑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나루가 아니라 윤영이 되었다.

충격적인 첫사랑을 했다.

보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반해 버린 사랑을 했다.

때문에 사랑은 항상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가랑비에 젖듯 촉촉하게 적셔 들어와 어느새 온몸을 지배하는 사랑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지후와 함께 웃는 나루를 보아도 아프지 않은 이유는, 오롯이 윤영 덕분이었다.

“재경아.”

명진이 재경을 빤히 응시했다.

명진과 함께 있으면 항상 유쾌하지만, 이렇게 쳐다볼 때는 난처해진다.

“너도 이제 슬슬 연애해야 하지 않냐?”

“뭐, 슬슬 그럴 때가 됐지.”

재경이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우리도 이제 33살이야. 요새 결혼 적령기가 늦춰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쯤엔 보통 결혼할 생각들을 하잖아. 게다가 여자는 또 남자랑 다를 거고.”

“그야 그렇지.”

“윤영이, 33살이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하아.”

재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어떻게 알긴. 네가 예전에 나루를 보던 눈빛으로 윤영이를 보고 있는데, 보통은 알지.”

“보통은 알려나?”

“어.”

“윤영이도 알려나?”

“모를걸. 원래 본인 일이 되면 잘 모르잖아. 하지만 나루랑 지후는 알걸.”

“그런 것 같더라. 가끔씩 나루가 날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더라고. 예전보다 편하게 연락을 하기도 하고.”

“응, 나루는 바보지만 의외의 부분에서 눈치가 빠를 때도 있으니까.”

“맞아, 정말 의외의 부분에서 눈치가 빠르지.”

“말 돌리지 말고. 너도 알잖아. 윤영이 마음.”

“……응, 알아.”

알고 있었다.

윤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나루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한 그 순간에도, 윤영의 마음을 눈치챘었다.

그때는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기에 모르는 척했고, 지금은.

“그런데 쉽지 않아, 명진아.”

쉽지가 않았다.

“그래, 쉽지 않겠지.”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모든 걸 다 아는 거냐? 말해 봐, 너지? 나루랑 지후를 이 시간으로 돌려보낸 거.”

재경의 말에 명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유쾌한 웃음소리가, 재경은 좋았다.

“야, 나한테 그렇게 신급의 힘이 있지는 않아. 그냥 통찰력이 뛰어난 정도라고 해 줘.”

“하, 그래.”

“게다가 쉽지 않은 게 당연하잖아. 윤영이는 네가 나루를 사랑하는 과정을 전부 지켜봤으니까.”

“응.”

그게 문제였다.

윤영은 재경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옛 시간의 재경도, 이 시간의 재경도 알기에, 나루를 사랑했던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기에, 쉽지 않았다.

“내가 윤영이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보통은 잘 모르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알기 쉬우면, 누가 짝사랑을 하겠냐.”

“그러게. 나, 사실 윤영이 진짜 싫어했었는데.”

“응, 나도.”

재경과 명진이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윤영은 지후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나루를 질투했다.

나루를 끔찍이도 싫어하던 윤영이 지금은 나루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윤영이한테 그때 얘기를 하면 윤영이가 막 성질내거든? 그거 진짜 귀엽다?”

명진이 말했다.

“윤영이 괴롭히지 마.”

“근데 정말 귀여워. 너도 한번 해 봐.”

“난 그런 짓 안 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재경은 성질내는 윤영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나저나 너야말로 연애 안 하냐? 주변에 괜찮은 여자들 많잖아.”

“난 안 해, 사랑.”

명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왜?”

“나루 때문에.”

“어? 너, 설마…… 너도 나루 좋아했었어?”

“아니. 그런 쪽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트라우마?”

“나루랑 지후가 서로를 사랑해서 시간을 돌아왔지. 그저 서로를 구할 생각뿐이라서, 자기 마음 무너지는 건 아랑곳하지도 않았고.”

그때가 떠오르는지 명진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나루가 지후에게 말 못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어. 나루는 정말…… 많이 힘들어했거든. 같이 있으면 나까지 울고 싶어질 때가 많았어.”

“그래.”

“안 하고 싶어, 난. 그런 거.”

“하지만 지금 나루랑 지후는 행복하잖아.”

“그래, 그렇지. 정말 행복해 보이고 그래서 기분 좋아. 하지만 사랑을 하게 되어 겪을 수도 있는 그 끔찍한 순간을 봐서 그런지, 난 별로 안 하고 싶다. 그럴 생각이 드는 여자도 못 만났고.”

“그러다가 나보다 먼저 결혼하는 거 아냐?”

“됐어. 난 이대로가 좋아.”

명진이 재경의 잔을 채웠다.

“내 걱정 마시고 네 걱정이나 해. 이러고 있다가 다른 놈이 윤영이 채가면 어쩔래?”

“그러게. 나도 그래서 불안해.”

“윤영이 괜찮은 애야. 의리도 있고, 생각도 깊고.”

“나도 알아. 알아서 더 어려워. 윤영이는…… 과연 믿어줄까? 내가 고백하면 내 마음을?”

명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명진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윤영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깊이 사랑했던 재경이, 이제 와서 널 사랑해라고 말한들,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윤영이 재경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안 믿겠지.”

명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설령 믿더라도 계속 생각나겠지. 네가 나루를 사랑했던 순간의 일들이.”

“그래. 그래서야. 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어.”

재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사랑은 왜 항상 이런 걸까?’

* * *

최근 연일 야근이었다.

윤영은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잠시 쉴 생각으로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뒷목이 뻐근했다.

“아, 요새 데이트할 시간도 없고. 진짜 남친한테 미안해 죽겠어.”

“으으. 나도.”

“그러고 보니 언니는 언제 결혼해? 사귄 지 꽤 되지 않았어?”

“응, 벌써 3년 됐지. 서른 넘기 전에 결혼하고 싶은데. 예쁠 때 웨딩드레스 입고 싶어.”

“남친이 프러포즈 안 해?”

“가끔 결혼 얘기를 하기는 하는데 본격적인 건 아냐. 얘가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언니한테 잘해주잖아.”

“요샌 그렇지도 않아. 슬슬 권태기인가?”

뒤에서 여직원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20대 중후반인데도 결혼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하긴. 나루랑 지후도 20대에 결혼했지.’

옛 시간에서는 아니지만 이 시간에서는 20대 중반에 결혼을 했고, 아직까지도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33살이 되었다.

30살이 되었을 때만 해도, 아니, 작년까지만 해도 나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들은 서른이 넘으면 초조해지고 우울해진다는데, 그런 걸로 감정이 휘둘리기엔 더 크게 신경 쓰이는 사건이 있었다.

지후의 죽음.

32살, 지후는 죽기로 되어 있었다.

32살을 잘 넘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느라, 나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후와 나루가 죽음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게 된 지금, 윤영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벌써 33살인데, 나는 애인도 없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아무도 안 만난 건 아니었다.

윤영은 인기가 많았고, 가끔 괜찮은 남자들이 대시를 해오면 좋은 마음으로 만나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매일 보고 싶지도, 목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의무적인 연락과 만남의 반복일 뿐이었다.

―넌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윤영의 상대들은 항상 같은 말을 했다.

―혹시 못 이룬 사랑이라도 있는 거야?

그때는 웃어넘겼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게 됐다.

못 이룬 사랑이 있게 되었으니까.

시간이 흐르면 접힐 줄 알았던 마음은 점점 부풀기만 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진 마음은 그 색채 또한 진해졌다.

재경을 사랑하는 마음을 도무지 접을 수가 없었다.

짝사랑만 벌써 몇 년째일까?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라 집착으로 보일 거야. 병이야, 병.’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대학 때는 지후를, 그 이후에는 재경을 미련하게 짝사랑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내 사랑은 왜 항상 이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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