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번외 1 ; 새하얀 공간조차 축복
2018.04.16.
새하얀 공간이었다.
하늘도, 땅도, 벽도 없는, 그저 하얀 공간.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하얀 공간에, 나루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난 왜 여기에 있지?
이곳엔 나밖에 없는 걸까?
덜컥 두려움이 밀려와, 나루는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없었고, 방향을 안다 한들 어디를 가도 하얀 공간일 뿐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루는 달리기를 멈췄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앞에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거기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루 쪽으로 등을 보이고 있어서,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머리카락 색깔이 도저히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왼쪽에 앉은 사람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올 만큼 길었고, 은빛이었다.
그냥 은색이 아니라, 조금 움직일 때마다 여러 색깔로 영롱하게 빛나는 은색이었다.
마르고 가녀린 체구로 보아, 여자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에 앉은 사람의 머리카락은 푸르스름한 빛깔이었는데, 하늘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남색으로 보이기도 해서 무슨 색이라고 딱 잘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왼쪽에 앉은 사람보다 훨씬 크고 어깨가 넓은 것으로 보아, 남자일 것 같았다.
“처음치고는 잘했다고 생각해.”
역시 은빛 머리카락은 여자였다.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귀여운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본인 스스로 잘했다고 말하는 건 관두지?”
푸른빛 머리카락은 남자가 맞았다.
묵직하고 낮은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잘하지 않았어? 마무리는 꽤 괜찮았잖아.”
여자가 항변했다.
“실수가 많았어.”
“처음이니까.”
“그렇다면 잘한 게 아니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시간에 최 교수가 나루의 집 앞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아…….”
아는 이름이 나와, 나루는 작게 소리를 냈다.
하지만 둘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범위 설정을 제대로 못한 것 자체가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야. 힘의 범위를 제대로 조절했어야지.”
“하아. 그래, 그건 내가 반성할게.”
“당연히 반성해야지. 최 교수까지 돌아가는 바람에,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죽었어.”
“버스 사고로 죽은 사람들 말이지? 하지만 그 사람들은 한 달 후에 불이 나서 죽을 예정이었잖아.”
“아무리 한 달이라도, 그들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었을 거야.”
“고작 한 달인데, 뭘.”
“인간들의 시간은 우리와 달라. XX.”
나루는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보다는 다른 점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분명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그 이름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아듣지 못한 걸까, 아니면 들었는데 잊은 걸까?
“알겠어, 알겠어. OO. 내가 잘못했어.”
남자의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나루는 귀에 힘을 주고(귀에 힘을 주는 게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들어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 후에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티격태격했으나, 결국 그들의 이름은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실수는 윤명진을 살린 거야. 인간이 죽고 사는 문제를 그렇게 멋대로 결정해서는 안 돼.”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명진이가 나루를 구했잖아.”
“연나루도 죽었어야 했지,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넌 왜 그렇게 죽이는 걸 좋아해?”
“XX. 네가 연나루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분명히 말했어. 등가 교환이 있어야만 한다고. 시간을 돌린 이유는, 연나루가 민지후를 구하고 죽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나루의 소원은 그게 아니었는걸.”
“뭐?”
“나루가 바란 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있는 힘껏 지후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거였어. 그게 나루 소원이었지.”
“나한테는 연나루가 민지후를 구하고 싶어 한다고 했잖아.”
“뭐, 비슷한 거 맞잖아? 결국 나루는 지후를 구했지. 그리고 해피엔딩.”
“너, 날 속였군.”
남자의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 나왔다.
남자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는 나루까지도 무섭게 만들었지만, 정작 그 분노를 받아내는 여자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했다.
“속인 게 아냐. 네가 똑바로 이해하지 못한 거지.”
“말장난하지 마, XX. 너는 이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저주는 이미 시작되었는걸. 이 빌어먹을 저주보다 더한 대가가 있으려나?”
“XX.”
“기대할게. 나를 촛대에 가둔 것보다 더 괴로운 대가를.”
여자는 비아냥거리듯 말했고, 남자는 화가 난 듯 벌떡 일어났다.
순간 나루는 그가 뒤를 돌아볼까 봐서 두려웠지만,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다행히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대로 사라졌다.
여자는 여전히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나루는 미동도 하지 않는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저 여자가 날 도와준 거구나.’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내 얼굴은 봐서 좋을 게 없어.”
여자가 마치 나루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나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이름을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그러면 나는 널 죽여야 하거든.”
“제가 여기 있는 걸 알았어요?”
“알지, 나는 다 알아.”
“그럼 아까 그 남자분도…….”
“아니, 걔는 몰라. 걔는 나보다 약하거든.”
여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원래 널 이곳으로 데리고 오면 안 되는데, 그냥 불렀어. 정이 들어 버려서.”
“아…… 저기, 감사해요. 제 소원을 들어주신 거죠?”
“응, 맞아.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줬어. 뭐, 네가 지후를 있는 힘껏 사랑하지 않게 되진 않았지만. 이쪽이 더 좋지?”
“네, 정말로.”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실수가 몇 개 있었어. 최 교수를 함께 돌려보낸 것도 그렇고, 명진이를 살린 것도 그렇고.”
“하지만 명진이는……”
“그래, 그 애가 널 구했지. 하지만 사실은 너를 구해서는 안 됐어. 아까 OO의 말이 옳아. 등가 교환이 조건이거든. 지후가 사는 대신, 너는 죽는다. 원래는 그랬어야 했어. 그런 법이니까.”
“그런 법이군요.”
“하지만 실수는 내가 정이 많다는 거야. 나는 정이 많아서, 펑펑 우는 너에게, 그런 널 도우려는 명진이에게 정이 들어 버렸어. 도저히 죽게 놔둘 수가 없더라.”
“…….”
“사실은 그 애가 죽는 날이 되는 순간까지 망설였어. 어째야 하나. 하지만 결국 그 애를 살릴 수밖에 없었지. 그 애가 좋아져서. 사랑스러워져서.”
“그렇군요.”
“응, 그랬어.”
“윤영이가 꿈을 꾼 것도 당신이 한 일인가요?”
“그래, 맞아. 그 애는 너에게 소중한 존재잖아. 너의 옛 시간과 이 시간이 겹치는 시점에, 너의 곁에 있던 사람들을 온전히 데리고 가게 해 주고 싶었어.”
여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나루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감사한 마음이 터무니없이 부풀어 올라,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감사해요, 정말로. 정말 감사해요.”
“응, 그거면 됐어. 이 고독한 공간에 갇혀 있어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쁘구나.”
“갇혀 있는 건가요?”
“응. 나는 지금 벌을 받는 중이야.”
“왜…… 왜요?”
“글쎄. 왜일까. 인간인 네가 그런 것을 알아서 좋을 것은 없어.”
그래서 나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여자가 일어났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너는 내가 돌려준 12년을 아주 잘 사용했어. 그러니 앞으로 남은 시간도 잘 사용하도록 해. 그리고 언젠가 네 아이들이 자라거든, 말해줘. 어느 가게에서 파는 은촛대에는 저주에 걸린 작은 요정이 살고 있다고. 그 요정은 조금 고독하지만, 아끼는 인간이 미소를 지으면 행복해진다고. 그리하여 그 새하얀 공간조차, 요정에게는 축복이라고.”
* * *
번쩍―
나루는 눈을 떴다.
가슴 위가 묵직해서 보니, 지후의 팔이 얹어져 있었다.
어젯밤 와인을 마시고 사랑을 나눈 후, 그대로 잠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나루는 꼬물꼬물 지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후가 잠결에도 나루를 보듬어 안아 주었다.
‘꿈을 꾼 것 같은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새하얀 공간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 여자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마지막에 한 동화 같은 이야기는 기억이 났다.
―언젠가 네 아이들이 자라거든, 말해줘. 어느 가게에서 파는 은촛대에는 저주에 걸린 작은 요정이 살고 있다고. 그 요정은 조금 고독하지만, 아끼는 인간이 미소를 지으면 행복해진다고. 그리하여 그 새하얀 공간조차, 요정에게는 축복이라고.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이런 동화 같은 대화를 나눈 걸까?
‘은촛대.’
어제 윤영이 촛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설마 그 은촛대가 소원을 들어주는 은촛대라든가 해서, 우리를 돌려보내 준 건 아니겠지?
다들 말도 안 된다고, 그런 일이 어디 있겠냐고 웃었다.
하지만 나루는 그 순간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을 돌아가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은촛대가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느냐고.
그런 일이 있어서 꾼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참 기분 좋은 꿈이었어. 조금…… 쓸쓸하긴 했지만.’
* * *
XX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앞으로 벌어질 나루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출산과 육아, 말다툼과 일상, 친구의 결혼, 동생의 결혼, 부모님의 병간호…….
나루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평범한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살아간다.
흘러가는 많은 사건들 가운데 한 지점에서 멈췄다.
하늘색 지붕이 예쁜 집이 있었다.
2층짜리 펜션이었다.
펜션 앞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고, 거기에 나루와 나루 친구들의 아이들이 수영복을 입고 놀고 있었다.
나루의 아이들은 쌍둥이였다.
지후와 나루가 원한대로 남자아이 한 명, 여자아이 한 명. 지후와 나루를 반씩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나루야, 소시지 많이 먹을 거?”
펜션 마당에서 바비큐를 준비하며, 재경이 나루에게 물었다.
지후는 나루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주는 중이었다.
“소시지는 적당히. 고기를 많이 먹을래. 요새 애들이 인스턴트 음식만 먹으려고 해서 죽겠어, 정말.”
나루의 대답에, 재경이 “오케이. 소시지 조금.”하고는 고기를 가지러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바턴 터치를 하듯 윤영이 냄비를 들고 나왔다. 된장찌개가 아직도 보골보골 끓고 있는 냄비였다.
“된장이 너무 맛없어서 찌개 맛도 별로인 것 같아.”
“아, 나 된장찌개 좋아하는데! 고기의 생명은 된장찌개라고!”
명진의 외침에 윤영이 눈을 부릅떴다.
“야, 그렇게 생명 타령하고 싶으면, 거기서 놀지 말고 와서 도와, 좀!”
명진은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애들끼리 물놀이를 하게 놔둘 순 없잖아.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놀고 자빠졌네. 거기는 빠지려고 노력을 해도 빠지기가 쉽지 않을 깊이거든?”
아동용 수영장의 물은 성인의 허벅지까지밖에 안 왔다.
“윤영아, 너 애들 앞에서 예쁘고 고운 말 좀 사용해라. 애들이 배우겠다.”
명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이,
“자빠진다!”
“놀고 자빠져!”
“자빠졌어! 자빠졌어!”
라고 외쳤다.
윤영은 콧등을 찡그렸다가,
“그런 말 쓰지 마!”
라고 외치고는 식탁으로 향했다.
“다 됐다. 이 정도면 거의 말랐지?”
나루의 뒤에 서 있던 지후가 수건을 걷어가며 물었다.
“응, 대충 마른 것 같아. 드라이도 좀 하고 싶은데.”
“여기 드라이 성능이 별로야. 그리고 이 상태로도 충분히 예뻐.”
“그럼 뽀뽀.”
나루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말했다.
지후가 허리를 굽혀 나루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했다.
“아, 뭐야. 애들 앞에서. 애정 행각 좀 적당히 해.”
명진이 투덜거렸다.
“적당히 해, 적당히 해!”
“맞아, 적당히 해!”
아이들이 명진을 따라 외쳤다.
나루는 혀를 쯧쯧 찼다.
“대체 쟤는 애들 마음을 어떻게 저렇게 사로잡은 거지?”
“원래 애들은 애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잖아.”
지후가 말했다.
나루는 의자에서 일어나 수영장으로 다가갔다.
명진이 물을 뿌리려 했지만, 나루는 미간을 좁히고 검지로 펜션을 가리켰다.
“윤명진, 그만 놀고 가서 애들 밥 준비하는 것 좀 도와.”
“아, 너도 안 하면서. 치사하다.”
“치사하다! 치사하다!”
아이들이 따라 외쳤다.
“너희들, 삼촌 말 그만 따라해.”
“그치만…….”
“그치만이 아니야. 너희들도 얼른 나와. 씻고 저녁 먹어야지.”
나루가 두 팔을 벌리자, 아이들이 첨벙첨벙 물에서 나와 나루에게 안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들은 나루를 제일 좋아했다.
“우린 가서 고기 굽자.”
“나도 씻고 와야 한다고.”
“넌 나중에 해.”
지후가 명진을 끌고 바비큐장으로 향했다.
나루는 아이들을 챙겨 펜션 건물로 들어갔다.
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아이들을 씻겨주는 동안, 아이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나루는 아이들의 몸에서 물기를 닦아주며 말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은촛대가 하나 있어. 아주 예쁘고 우아한 은촛대야. 그 은촛대는 어느 가게에서 살 수 있는데 그 은촛대에는…….”
XX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참으로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뼈를 에는 듯한 추위가 XX를 덮쳐왔다.
아마도 이것이 살리지 말아야 할 인간을 살린 대가인가 보다.
아마도 한동안, 어쩌면 아주 오래, 인간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이 추위 속에서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XX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참으로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광경이기에.
<번외 1 ; 새하얀 공간조차 축복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