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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82화 (82/93)

82화. 그대를 사랑하리라

2018.04.12.

버스에는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루와 지후는 나란히 앉았다.

“애들은 뭐래? 올 수 있대?”

“응, 재경이도 시간이 된다더라.”

“잘됐다. 그럼 이제 마트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야겠네.”

“응, 그러자.”

지후까지 죽음에서 벗어난 후, 다들 이런저런 일들로 바빠서 제대로 얼굴을 보고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명진이 해외 촬영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기에, 겸사겸사 만남을 제안했다.

나루는 지후의 손을 잡고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버스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너랑 같이 버스 타는 거 되게 오랜만이야.”

“그러네. 최근엔 계속 차로 이동했으니까.”

“버스 데이트도 신선하고 좋다. 앞으로 종종 이러자.”

“그래.”

“신발 구겨 신지 말고.”

지후가 웃으며 운동화를 똑바로 신었다.

마트 앞에서 내려 장을 봤다.

지후가 카트를 끌었고, 나루는 아주 자연스럽게 카트에 한 손을 슬쩍 올려놨다.

특별한 것을 해 주겠다며, 지후가 이것저것 집어넣었다.

“대체 뭘 할 셈이야? 너무 많은데?”

“다섯 명이 모이는 거니까 요리 3개는 해야지.”

“그냥 삼겹살만 구워먹을 생각이었는데.”

“기념할 만한 날이잖아. 너랑 할 얘기도 있고.”

“지금 하면 안 돼?”

“응, 나중에.”

지후가 말을 아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지만, 우선은 계산을 하고 마트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갔더니, 집 앞에 명진이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루와 지후를 발견한 명진이 벌떡 일어났다.

“야, 니들은 사람 초대해 놓고 알콩달콩 영원한 데이트질이냐?”

“약속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하, 민지후. 너, 진짜 뭘 모른다.”

“내가 뭘 모르는데?”

“나는 오늘 약속 시간보다 빨리 등장해서, 너희를 놀라게 해 줄 계획이었다고!”

“아, 그러셔. 대단한 계획인데 망쳐서 미안하다.”

지후가 명진을 밀어내고 문을 열었다.

“부족해. 좀 더 미안해하라고.”

명진이 집요하게 사과를 요구하며 따라 들어왔다.

“엄청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까, 요리나 좀 도와.”

“초대한 손님한테 요리를 시키는 건 어느 나라 문화냐?”

명진은 투덜거리면서도 지후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윤영과 재경도 도착했다.

문을 열었더니 둘이 함께 있기에, 나루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둘이 같이 왔어?”

“어? 아니, 그냥 이 앞에서 만났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윤영의 모습에, 나루는 웃음을 삼키며 돌아섰다.

‘바보. 다 티나.’

윤영은 철저하게 감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재경을 향한 윤영의 마음은, 벌써 오래전에 눈치챘다.

윤영이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기에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와, 맛있는 냄새.”

재경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진짜 파티인가 보네. 오, 명진. 앞치마 잘 어울린다. 지후랑 잘 어울리는 커플 같아.”

명진이 입은 앞치마는, 나루와 지후가 커플로 산 앞치마 중 나루의 것이었다. 분홍 앞치마가 명진에게 썩 잘 어울렸다.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마라. 얘랑 엮이기 싫으니까.”

명진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항의했다.

“왜? 내가 어때서?”

“어떻긴. 세상에서 제일 부정적인 놈이잖아. 죽음은 피할 수 없다고, 없다고. 너는 죽을 거라고, 죽을 거라고. 나도 죽을 거라고, 죽을 거라고. 어휴.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다니까.”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지, 지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든 상황이, 나루는 유쾌하기만 했다.

그럴 때도 있었다.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을 때.

외로움에 매일 밤 눈물을 흘렸을 때.

이제는 그런 때에서 벗어났다.

친구들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고, 지후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그리고 명진도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시간으로 돌아온 이후의 12년은, 바로 지금을 위한 시간이었다.

요리가 준비되었고, 배불리 먹었다.

술도 마시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이제 ‘죽음은’, ‘운명은’, ‘만약’은 주제로 오르지 않았다.

이러니까, 저러니까 하는 가정도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평범한 친구들의 모임에서 나누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근황이나 일의 분량, 저축에 대한 것들.

더는 특별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들.

누가 들어도 수상쩍게 생각하지 않을 주제들.

“그러고 보니, 진짜 똑같다.”

화장실을 갔다 오던 윤영이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가?”

“꿈에서 본 거랑 이 집이랑.”

“당연히 똑같지. 원래 이 집에 살았으니까.”

“아니, 나루야. 그런 거 말고. 이런 세세한 것들 말이야. 지후가 사온 이런 장식품들 종류랑 위치까지 완전 똑같아.”

“응, 같은 걸 사오려고 노력했거든. 최대한 겹치게 만들려고.”

지후가 대답했다.

“그런데 하나가 없어.”

윤영의 말에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없는 게 있나?”

“응, 딱 하나 없어.”

“그게 뭔데?”

명진이 흥미를 보였다.

“은촛대.”

“은촛대?”

“아, 그거.”

나루도 기억이 났다.

지후가 결혼한 후에 켜놓자고 했던, 은근슬쩍 프러포즈를 해왔던, 그 은촛대.

“그러고 보니, 진짜 없네.”

그게 없었다.

“내 꿈에서, 지후가 죽고 나서 네가 그 앞에서 우는 걸 봤거든. 그래서 되게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없네. 그건 왜 안 사온 거야?”

윤영이 지후에게 물었다.

“그게…….”

지후가 미간을 좁혔다.

“사려고 했어. 저번에 스페인에 갔을 때, 골목에 있던 가게에서 산 거였거든. 정확히 그 골목에 들어갔는데, 그 가게가 없더라.”

왜일까.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은촛대가 무어라도 된다는 듯이.

서늘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쳐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설마…… 설마 그 은촛대가 소원을 들어주는 은촛대라든가 해서, 우리를 돌려보내 준 건 아니겠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명진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아하하하. 맞아, 맞아.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소원을 들어주는 은촛대라니. 요새 애들 동화에도 안 나오겠다.”

“그러게 말이야.”

“아, 그냥 만약을 말한 거라고.”

나루가 투덜거렸다.

다시 주제가 바뀌었고,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차가 끊길 시간이 되었다.

“나, 가야겠다.”

윤영이 말했다.

“자고 가.”

나루의 말에 윤영이 웃었다.

“신혼부부 집에서 잘 만큼 매너가 없지는 않거든요.”

“신혼부부라니. 결혼한 지 벌써 몇 년이 됐는데.”

“애 없으면 신혼부부지. 차 끊기기 전에 갈래. 얼마 전에 가방 사서 돈 아껴야 돼.”

재경이 윤영을 따라 일어났다.

“내가 태워다줄게.”

“됐어. 우리 집 반대 방향이잖아.”

“나, 운전하는 거 좋아해. 드라이브하는 셈 치지, 뭐.”

“나는 신혼부부 집에서 잘 수 있을 만큼 매너가 없지만, 내일 일이 있어서 가야겠다.”

명진도 일어났다.

친구들을 배웅하고, 지후와 함께 뒷정리를 했다.

지후가 세제로 그릇을 닦으면, 나루는 물로 그릇을 헹궜다. 지후가 상을 닦는 동안, 나루는 바닥을 쓸고 닦았다.

청소를 다 끝낸 후, 지후가 찬장에서 와인과 잔을 들고 왔다.

“이제 우리 시간이네.”

좁은 베란다를 예쁘게 꾸며놓고, 거기에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를 두 개 놔뒀다.

둘은 거기에 앉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이 기분 좋은 날씨였다.

“있잖아. 윤영이랑 재경이랑 요새 분위기 좋은 것 같지 않아?”

말없이 와인을 마시다가, 나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그런 것 같더라.”

“재경이는 언제 고백할 생각일까? 그 두 사람, 꽤 오래 끌고 있는 것 같은데.”

“재경이도 고민이 많겠지.”

“하긴. 그러겠다.”

고민이 많을 것이다.

재경의 마음이 현재 어디로 향해 있는지는, 지후와 나루의 눈에 명백히 보였다. 눈치 빠른 명진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늘 당사자에게는 그렇게 쉽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재경이 고백한다면, 윤영이 과연 믿어줄까?

생각해 볼 것도 없는 문제였다.

윤영은 믿지 못할 것이다.

이 시간에서 재경이 나루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윤영은 알고 있었다.

옛 시간에서 재경이 나루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또한, 윤영은 알고 있었다.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재경은 나루를 사랑했기에, 그 사랑이 변함없으리라 믿기에, 윤영은 쉬이 믿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뭐, 그건 결국 둘의 문제니까. 그 두 사람이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우리는 조용히 지켜봐야지.”

나루의 말에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유독 맑은 밤하늘에 별이 반짝거렸다.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동안은 이런저런 고민과 사건에 시달려, 하늘을 볼 여유도 없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밤하늘을 감상했다.

문득 나루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할 얘기가 뭐야?”

“아, 그거.”

지후가 잔을 내려놓고 나루의 손을 잡았다.

그는 엄지로 나루의 손등을 살살 문지르며, 나루의 손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지?’

슬슬 불안해지려는 찰나, 지후가 고개를 들고 나루와 시선을 맞췄다.

“나루야, 우리. 슬슬 아이를 갖는 거 어때?”

“아…….”

긴장하고 있던 차에 예상치 못한 말을 듣는 바람에.

“아하하하하하!”

나루는 웃음을 터뜨렸다.

뭘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나 했는데, 아이 문제였다니.

역시 내 남자는 참으로 귀엽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낮에 지후가 어린아이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게 떠올랐다.

‘그럴 나이구나, 벌써.’

옛 시간에서는 결혼을 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기에, 아이 생각까지는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서는 부부가 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루도 슬슬 지후를 닮은 아이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나를 반씩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응, 그러자. 우리 아이.”

나루의 대답에 지후의 표정이 밝아졌다.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은 별로야?”

“아들도 좋지. 하지만 널 닮은 딸이면, 정말 예쁠 거야.”

“응, 정말 예쁘긴 할 거야.”

나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후가 웃었다.

“그래, 맞아.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겠지.”

“그리고 제일 행복한 아이일 거고.”

“잘 어울리는 옷도 입혀 주고, 좋은 곳도 많이 데려가 주자. 많은 걸 보여 주고, 느끼게 해 주자.”

“응. 우리가 갔던 곳, 우리의 아이와도 같이 다니자.”

임신을 하고 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배 속에 품고 있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를 만날 시간이 기다려질 것이고, 하루하루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럼 오늘 당장 만들어 볼까?”

지후가 눈을 빛내며 묻는 바람에, 나루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뭐가 그렇게 급하고 무드가 없어?”

“무드, 있었잖아.”

지후가 와인을 가리켰다.

“거참, 되게 무드 있네.”

“그럼. 난 늘 분위기를 중요시하지.”

지후가 웃으며 나루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입술이 나루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회청빛 하늘은 별빛으로 반짝이고,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고 상쾌했다.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은 단단하고, 목 뒤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은 뜨거웠다.

무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루는 생각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키스와 달콤하게 넘어오는 타액이, 나루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윽고 입술을 떼어낸 그가 나루를 번쩍 안아 들었다.

“무드, 좋지?”

“응, 신혼여행 온 것 같다.”

나루의 대답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나루를 조심스레 눕힌 지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앞에 둔 사람처럼 나루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애정을 가득 담고 응시해 주는 것이 좋았다.

나루는 그의 뺨을 어루만졌고, 지후는 나루의 이마와 눈썹, 눈가에 입을 맞추며, 나루의 옷을 천천히 벗겼다.

그의 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나루는 몸을 흠칫, 흠칫 떨었다.

그것이 즐거운 듯, 지후는 나루의 예민한 부위를 계속 자극했다.

뜨거운 입술이 낙인을 찍듯, 나루의 목덜미와 쇄골, 가슴에 내려앉았다.

나루는 두 손으로 그의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달콤하고도 뜨거운 전율 속에서, 나루는 지후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앞으로도 항상 이렇게 살을 맞대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아무나 경험하지 못할,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슬플 때도, 외로울 때도, 고독하고 괴로울 때도, 무서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도, 지후가 함께였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흔히들 사랑은 시한부처럼 끝날 때가 있다고들 말한다. 사랑이 끝나면 정으로 살아간다고, 그리들 말한다.

하지만 나루는 알고 있다.

이 사랑에 끝나지 않는 때도 있다는 것을.

아무리 오랜 세월을 함께해도, 그 모양이 조금 바뀔 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시간을 돌아 어렵게 구한 사랑이다.

시간을 돌아 힘들게 지킨 사랑이다.

한때는 사랑하지 않으려고도 하고, 한때는 지독히 아프기도 했으나, 결국은 내가 손에 넣은 사랑이다.

그러니 이제.

그대를 사랑하리라.

있는 힘껏, 온힘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리라.

그리하여 어느 날 나의 시간이 끝나는 그 순간에도, 그대만을 사랑하리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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