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겹쳐진 시간
2018.04.09.
어둠 속을 지후는 걸었다.
그리고 정체 모를 한 남자 또한 나루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어둠을 걷는 지후와 나루와 한 남자.
옛 시간과 모든 것이 같았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누가 따라오고 있어.’
나루가 뒤를 따라오는 남자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옛 시간에서는 지후에게 해 줄 요리를 생각하느라,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언제 공격을 해오든 피할 수 있도록, 만약 그 칼끝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더라도 구할 수 있도록.
몇 번이나 머릿속을 시뮬레이션을 해왔다.
그래서.
휙―!
남자가 덮쳐오는 순간, 지후가 그 사이에 끼어들려는 그 순간.
지후를 밀어내고, 몸을 낮추고.
‘주먹으로.’
사타구니를 가격했다.
“크아아악!”
상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젠장!”
쓰러지진 않았다.
상대의 손에 들린 칼이 다시 번쩍였다.
이후의 상황은 시뮬레이션하지 못했다. 사타구니를 가격하면 당연히 쓰러질 줄 알았는데.
나루의 눈이 커졌고, 지후가 몸을 일으키려 했고, 그 전에 남자가 나루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나루는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거리가 가까워서, 칼끝이 팔을 베었다.
사악―
팔에 화상을 입은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읏!”
나루가 작게 신음하며 몸을 피하려고 하는데, 남자가 또 칼을 들어 올렸다.
‘이건 못 피하겠어.’
짧은 순간, 나루는 생각했다.
‘이 시간에서는 내가 죽는 걸까?’
은빛 칼날이 다가오는 속도가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그 끝이 나루의 목을 향했고, 선뜩한 느낌이 드는 순간.
퍼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스윽―
칼끝이 나루의 목덜미 피부를 베고 지나갔고.
털썩―
남자가 쓰러졌다.
나루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인영을 응시했다.
명진이었다.
명진은 손에 헬멧을 들고 있었다. 그 헬멧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가격한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아주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괜찮아?”
“나루야, 지후야!”
“어떻게 됐어? 나루, 괜찮은 거야?”
진공 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꼈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비틀거리는 나루를, 지후가 부축했다.
“나루야, 괜찮아?”
“나는, 나는 괜찮아.”
“피가 나는데.”
그제야 나루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구급차 부를게!”
윤영이 말했다.
나루는 명진과 재경, 윤영을 돌아봤다.
이 친구들은 언제 온 걸까?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나루는 지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루를 응시하고 있던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기름한 눈매 안에 갇힌 눈동자는 여전히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와 달랐다.
그때 지후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는데, 지금은 여전히 생생한 생명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지후는 죽지 않았다.
그를 있는 힘껏 사랑했음에도, 그가 살아남았다.
눈물이 흐르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나루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에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지후가 살아 있다.
운명의 그 순간이 지났음에도, 지후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살아 있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살아 있어.”
지후가 빙그레 웃었다.
나루는 조금 흐느꼈다.
그의 미소를 또다시 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이 기뻐서, 행복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 살아 있어.”
나루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근두근 뛰는 그의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그 말만 반복했다.
지후는 미소를 지은 채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아. 난 살아 있어. 너도 살아 있고.”
“응, 살아 있어. 나는 이제…… 아아, 나는 이제 볼 수 있는 거야. 33살의 너를, 40살의 너를.”
“그래, 볼 수 있어.”
“아아, 지후야.”
아주 많은 기억들이 나루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죽음. 오열. 시간을 돌아가서 20살의 그를 다시 보게 된 순간.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던 노력. 그 고독하고 외로웠던 시간.
그도 시간을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
그 기나긴 공포와의 싸움이 끝났다.
12년 전과 달리, 나루는 살아 있는 지후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12년 전과 달리, 재경과 윤영, 그리고 명진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구급차와 경찰차가 도착했다.
나루는 구급차에 실렸고, 지후가 따라서 병원으로 향했다.
명진과 윤영, 재경은 증언을 위해 경찰을 따라갔다.
팔의 상처는 깊었지만 목의 상처는 피부만 살짝 베었을 뿐이라, 나루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입원할 필요도 없다고 했지만, 지후가 우겨서 하루는 입원하기로 했다.
지후는 침대 옆에 붙어 앉아, 나루의 손을 꽉 잡았다.
손으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에 가슴이 벅찼다.
지후가 살아 있다.
옛 시간에서의 이 순간을, 나루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지후는 더 이상 나루의 곁에 없었다.
“꿈같아.”
나루가 말했다.
지후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정말 꿈같아. 네가 살아서 내 손을 잡고 있다니.”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응. 앞으로도 이 손 놓지 말아줘.”
“당연하지.”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이 몰려왔지만, 나루는 자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이 모든 일이 꿈이었고, 또다시 혼자인 외로운 공간에 앉아 있을까 봐 무서웠다.
지후가 죽었던 날, 혼자서 돌아간 그 집의 서늘한 공기가 다시금 덮쳐올까 봐 두려웠다.
“명진이가 날 구했어.”
“그래. 명진이가 널 구했지.”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명진이가 날 구했어.”
“응.”
“명진이가 그때 죽었더라면, 나도 죽었을 거야.”
위험한 순간이었다.
목덜미에 느껴졌던 서늘한 감촉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응, 아마도.”
지후가 나루의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자. 잘 자야 빨리 낫지.”
“무서워. 눈을 뜨면 네가 없을까 봐.”
“무서워할 거 없어. 이제는 항상 네 옆에 있을 거니까.”
“만약 이게 꿈이면 어쩌지? 눈을 떴는데, 난 다시 혼자가 되어 있으면 어쩌지?”
“그러지 않을 거야.”
지후가 나루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건 꿈이 아니고, 나는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앞으로 네가 어디로 눈을 돌리든, 거기엔 내가 있을 거야.”
“분신술이라도 익혔어?”
나루의 말에 지후가 후, 하고 웃었다.
바람이 부는 듯한 미소가 여전해서 안심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정말 내 옆에 있을 거야?”
“응.”
“아무 데도 가지 마.”
“응, 화장실도 안 갈게.”
“너무 마려우면?”
“그래도 참을게.”
“못 참겠으면?”
“조금씩 싸서 말리지, 뭐.”
“더러워.”
“그래서 싫어?”
“아니, 제일 좋아.”
그런 바보 같은 대화를 하며, 나루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지후는 여전히 나루의 손을 잡고 있었다.
* * *
최 교수가 깨어난 건, 나루와 지후가 죽음에서 벗어났던 그 순간이었다.
최 교수가 깨어나고 나서 보름쯤 지났을 때, 나루는 최 교수를 만나러 그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지후가 함께 가고 싶다고 했지만, 나루는 혼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거절했다.
지후는 안심이 안 된다고 따라왔고, 병원 앞에서 나루를 기다리기로 했다.
서늘한 병원 복도를 걸어가며, 나루는 많은 생각을 했다.
병실 앞에서 최 교수의 부인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최 교수는 수척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였던 최 교수는 비쩍 말라,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교수님.”
나루의 부름에, 최 교수가 눈을 떴다.
나루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나루야.”
“정말 다행이에요.”
최 교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지후는?”
“살아남았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네, 정말 다행이죠.”
나루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구랑은 관계없는 사람이었어요. 교수님도 아셨던 거죠, 그걸?”
나루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사실 나루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세상에 화가 나고 울분에 차, 아무나 죽일 생각으로 서성이다가, 나루가 눈에 띄어 뒤를 따라왔을 뿐이었다.
경찰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루는 최 교수가 떨어지면서 하려고 했던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지후를 죽인 건!
연구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어.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 관계없는 사람이었지.”
최 교수가 말했다.
“옛 시간에서…… 너는 우느라 정신이 없어 몰랐겠지만, 그 사람이 잡혔어.”
“잡혔군요.”
“그래. 그날 뉴스에도 나왔지. 아마 지후 가족들에게는 소식이 전해졌을 거야.”
“하지만 저는 지후의 연인일 뿐, 아내가 아니었죠. 그래서 저한테는 소식이 안 왔던 거고. 만약 그 날 TV를 틀었다면, 지후가 죽은 게 내 연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겠네요.”
“그래.”
나루는 쓰게 웃었다.
“뭐가 됐든 지후는 절 구하려다가 죽은 거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았지.”
“네, 맞아요. 저는 이제 지후의 33살을, 40살을, 50살을 볼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위험은…….”
“사라졌어요, 교수님.”
나루가 부드럽게 말했다.
최 교수가 무슨 말이냐는 듯 나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교수님, 일주일 전에 결론이 났어요. 제 연구, 잘못되어 있었더라고요.”
“뭐?”
“제가 발견한 그거, 불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유전자였어요. 그래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유전자. 저는 잘못된 연구를 했고, 그것 때문에 죽을 뻔했던 거죠.”
“아…….”
최 교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허무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온갖 협박을 다 받고, 시간을 돌아오기도 했는데, 결국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마치 신기루처럼, 아름답지만 존재하지 않는 거였죠.”
“그런가…….”
최 교수가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 결과를 발표하자마자 위협도, 경고도, 협박도 뚝 끊겼어요. 절 스카우트하려던 사람들도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사라졌고요. 저는 다시 평범한 연구원 연나루가 된 거예요. 죽어도, 살아도 아무도 관심 없는 평범한 연나루.”
나루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불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교수님, 이제 절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루야.”
최 교수가 눈을 뜨고 나루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가득한 회한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나루는 빙그레 웃었다.
“교수님을 용서할게요. 저를 죽이려고 하셨지만, 결국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왜 구했을까.
왜 최 교수는 나를 구했을까.
이유를 알고 싶어서 끊임없이 답을 찾아 헤맸다.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었던 답을, 방금 전 지후의 안부를 묻는 최 교수의 표정을 보며 알게 되었다.
최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지후의 죽음을 기억하고, 안부를 물을 만큼 지후를 걱정했다.
최 교수와 지후는 대학 시절 강의 몇 개를 들었다는 것 빼고는, 다른 관계가 없었다.
최 교수에게 지후는 그저 나루의 연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최 교수가 걱정한 건, 아마도 나루의 슬픔을 염려해서이리라.
지후가 죽은 후, 나루가 얼마나 괴로워할지 알기에, 그것이 염려되어 지후의 안부를 물어본 것이리라.
그래서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내 슬픔을 걱정해 주는 최 교수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은 제게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에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교수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품은 채 살아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저와 지후와 교수님은 한 번 시간을 돌아왔고, 이제 다시 시간이 겹쳐졌어요. 그러니까 없었던 일로 해요. 교수님과 저 사이의 일은, 그저 옛 시간에 있었던 일들로만 해요.”
최 교수의 눈이 붉어졌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가로 흘러내렸다.
“제가 이 병실을 나가는 순간, 저는 이 시간에서 있었던 교수님과의 일을 모두 잊을게요. 교수님도 그러세요.”
“고맙다, 고맙다, 나루야.”
“저도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루는 일어나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 * *
나루는 병원 문을 나서다가 잠깐 멈췄다.
문 밖으로 지후의 모습이 보였다.
지후는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인데도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지후가 살아남은 이때에, 최 교수는 나루에게 남은 마지막 숙제였다.
병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불안했다. 최 교수를 용서할 수 없을까 봐서.
최 교수가 나루를 구하기는 했어도, 죽이려는 시도를 한 건 사라지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조차 없었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루는 지후를 향해 달려갔다.
나루가 오는 걸 본 지후가 빙그레 웃으며 일어나, 폭 안기는 나루를 마주 안아 주었다.
두근. 두근.
그에게 안길 때마다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여전히 새롭고 경이로웠다.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이 경이로움이 조금씩 무뎌지겠지만, 잊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한 번 죽었고, 한 번 살아남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얘기 잘 하고 왔어?”
“응. 개운해.”
“그래, 잘됐다.”
지후가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좋아.”
“그래? 그럼 벗겨질 때까지 쓰다듬어 줄게.”
“넌 꼭 그렇게 한 마디를 더 붙이더라.”
지후가 웃었다.
나루는 지후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