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 길을 걷다
2018.04.05.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루의 모습에, 재경은 잠시 멈칫했다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나루의 앞으로 왔다.
“예쁘다.”
나루가 미소를 지었다.
“응, 고마워.”
나루와 재경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말은 없지만, 그 짧은 눈빛 교환으로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윤영은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어서, 잠자코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질투조차 나지 않았다.
나루만을 향한 재경의 마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니까.
성재경은 앞으로도 쭉 연나루만을 사랑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사진이나 찍고 나가야겠다.”
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후, 재경이 말했다.
“그래, 거기 서 봐.”
윤영이 카메라를 들며 말하자, 재경이 윤영의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아 들었다.
“미루야. 사진 좀 찍어줄래?”
재경이 마침 신부 대기실로 들어오던 미루에게 카메라를 내밀며 부탁했다.
“응, 형.”
미루가 카메라를 받아 들었고, 재경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멍하니 서 있는 윤영의 손목을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세웠다.
“찍습니다.”
카메라를 눈에 댄 미루가 말하는 순간, 재경이 윤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울렸다.
윤영은 당황했다.
재경이 어깨에 팔을 두르는 순간 지은 그 표정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을 것이다.
망했다.
윤영은 미루에게 카메라를 받아 사진을 지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재경이 먼저 카메라를 가져가 사진을 확인했다.
“잘 나왔다. 이거 지우지 말고 꼭 보내줘.”
“어? 아, 응.”
윤영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그럼 이따 보자.”
재경이 나간 후, 윤영은 나루와 미루가 대화하는 동안 사진을 확인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나루와 재경, 그리고 재경에게 안기듯 서서 살짝 입술을 벌린 윤영.
‘이게 뭐야?’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이게 뭐가 잘 나왔다는 거야?’
울고 싶어졌다.
놀림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윤영의 어깨 너머로 사진을 확인한 미루가 말했다.
“오, 윤영 누나. 예쁘게 나왔다.”
윤영은 황급히 카메라를 아래로 내리며 생각했다.
‘이게 뭐가 예뻐?’
* * *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명진과 재경, 윤영은 나란히 앉아서 결혼식을 지켜봤다.
지후의 고등학교 친구의 사회로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윤영은 재경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재경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을까? 마음이 너무 아프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의 결혼식을 보는 게 힘들지는 않을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재경의 얼굴만 봐서는, 그가 어떤 생각,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결혼식이 끝났고, 신랑과 신부가 팔짱을 끼고 걸어 나갔다.
사람들은 일어나서 손뼉을 치며 지후와 나루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고, 재경 또한 그랬다.
문득 재경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작은 목소리라 명진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윤영이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재경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어서 입술 모양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아.”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갈색 눈동자가 윤영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재경은 윤영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고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영의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 * *
나루와 지후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인 생활을 끝내고, 부부가 되었다.
* * *
결혼을 했다고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없어서인지,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나루와 지후는 여전히 연인 때처럼 알콩달콩하게 지냈다.
때때로 여행을 가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나루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옛 시간에서처럼 KOB에 연구원으로 취직했고, 지후는 해외 출장이 잦은 외국계 기업에서 대리로 승진했다.
재경은 국가고시에 합격해 수련의가 되었고, 윤영은 첫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명진은 꽤 유명한 포토그래퍼가 되어서 종종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그런 명진을 볼 때마다 나루는 감회가 새로웠다.
옛 시간에서는 모두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던 명진이, 이 시간에서는 동기들을 만날 때마다,
“명진이 요새 잘나가더라.”
“TV에도 나오면 연예인들도 많이 알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친하게 좀 지내둘걸.”
회자되는 이름이 되었다.
나루와 지후가 30살이 되었을 땐 결국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옛 시간에서 나루가 살았던 집을, 지후의 누나인 지연이 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그 집을 사려고 해.”
“그 집이라니?”
“옛 시간에서 네가 살았던 집.”
“아……! 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누나가 전세로 사는 집의 계약이 끝나는데,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 받으려고 하나 봐. 그래서 집을 구하는데…… 그 집이 싸게 나왔대. 지금 누나 전세금으로 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싼 집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지후와 나루는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운명은, 그 집을 둘의 인생에 끼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자.”
나루가 말했다.
“우리가 사야 할 것 같아.”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나가 계약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게 낫겠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지후가 주식으로 꽤 많은 돈을 벌어서, 돈은 충분했다.
곧바로 부동산을 찾아가 집을 계약했다.
지연은 지후에게 크게 화를 냈지만, 원래 살던 집을 싸게 전세로 주겠다는 지후의 제안에 화를 풀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사를 했다.
“꿈에서 본 거랑 똑같아.”
집들이를 하던 날, 윤영이 놀랍다는 듯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장식품들도 똑같고. 없는 것들도 몇 개 있지만.”
윤영이 지후가 해외에 나갈 때마다 사온 장식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기억력 진짜 좋다.”
재경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게 꿈에서 본 게 현실보다 생생하거든. 이 집, 좀 불길하다. 조심해, 나루야.”
“응, 그러려고.”
이제 운명의 그날까지 2년이 남았다.
그날이 되기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가리라는 경고.
단 하나 희망이 있다면 명진의 존재였다.
명진은 살아남았다.
“걱정 마라.”
집들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배웅을 나온 지후와 나루에게 명진이 말했다.
“옛 시간에서랑은 달라. 이 집에 내가 왔잖아. 그때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내가.”
명진이 자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분명 다를 거야.”
달랐으면 좋겠다고, 나루는 간절히 소망했다.
* * *
평화로운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운명의 그 날이 되었을 때, 지후는 회사 일로 해외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옛 시간에서도 그랬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지후를 위해 요리라도 할 생각에 집을 나섰고, 걸었고, 완만한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에 그 일이 벌어졌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후도 그 길을 걸어 나루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나루를 볼 생각에 걸음을 서두르던 지후는, 익숙한 그림자 하나와 그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위험하다, 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루를 향한 협박과 경고들이 떠올라, 위험하다는 생각에 지후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루의 뒤를 따라오던 사람이 나루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지후의 육체가 나루와 상대방 사이에 놓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배를 쿡 찌르고 들어왔고, 찔린 부위가 화상을 입은 듯 뜨겁게 느껴졌고, 어마어마한 통증이 이어졌다.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상대는 도망쳤고, 나루는 울었고, 지후는 생명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루의 걱정뿐이었다.
저놈이 또다시 돌아오면 안 될 텐데.
나루가 위험해지면 안 될 텐데.
나는 이제 나루를 도와줄 힘이 없는데.
그래서 말했다.
“쉿.”
나루가 잘 버텨주었으면 해서, 살아남았으면 해서, 내가 없이도 울지 않고 살아갔으면 해서.
온 마음을 다해, 마지막 힘을 짜내서 말했다.
“쉿.”
그리고 나루는 울다가, 울다가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
‘이 시간.’
나루는 나갈 준비를 끝내고 거울 앞에 섰다.
옛 시간과 이 시간이 비로소 겹쳐질 시기가 되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시간을 돌아왔고 다시 이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2년이었다.
겪었던 적이 있는, 혹은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고, 똑같은,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기억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옛 시간에서 재경을 짝사랑하다가 선미와 싸우고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던 지영은, 이 시간에서 선미와 여전히 잘 지내고 남자 친구는 지영의 남편이 되었다.
쌍둥이를 낳았고, 지금은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간혹 만나면,
“나 그때 잠깐 재경이한테 흔들렸었던 거 알아? 만약 그때 지금 남편이랑 헤어졌더라면 진짜 후회했을 거야. 재경이가 나랑 사귈 리도 없었고.”
그런 이야기를 가볍게 주고받았다.
옛 시간에서 지영은 실제로 그랬다.
선미와 싸워서 얼굴도 안 보게 된 사이가 된 것도 후회하고, 다정다감했던 전 남자 친구를 잊지도 못했다.
선미는 대학 시절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지금은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 교수는 여전히 식물인간 상태였다.
병원 측에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최 교수의 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최 교수를 간호했다.
만만치 않은 유지비는 나루와 지후가 일정 부분 감당하고 있었다.
최 교수의 부인은 처음에 거절했지만, 저축한 돈을 다 사용하고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나루와 지후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루를 향한 증오는 사라진 후였다.
―그래, 네가 뭘 잘못했겠니. 우리 애 아빠가 그만큼 널 살리고 싶어 했던 건데. 우리 애 아빠가 살린 목숨인데. 미워해선 안 되겠지.
윤영은 역시 돈이면 다 되는 거였다며 고깝게 생각했지만, 나루는 그렇지 않았다.
옛 시간에서 최 교수의 부인이 나루에게 보여 주었던 애정을, 나루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간은 분명 옛 시간과 다르지만, 그래도 나루가 걸었던 시간이었고 경험했던 일이었다.
아주 없었던 일로, 존재하지 않았던 마음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돈은 부족하지 않았다.
지후는 ‘주식을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조금 수준이 아니었다.
어느 기업이 성장할 줄 알기에, 지후는 적당한 때에 투자를 하고 적당한 때에 빠져나오기를 반복해 상당한 돈을 모았다.
―어차피 이것도 우리가 32살이 될 때까지야. 그 후엔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 시기가 다가왔다.
출장을 가기 전, 지후는 주식을 다 팔아 치우고 이제는 알지 못할 미래에 대비했다.
―만약에.
떠나기 전, 지후는 현관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나루는 그의 말을 끊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긴 키스를 한 후,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 만약에는 없어. 너랑 나는 앞으로도 쭉 행복할 거니까.
지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래, 알겠어. 돌아와서 봐.
―응, 잘 다녀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는 미래를 가정하는 말 따위는.
그의 유언, 그의 마지막 말, 듣기 싫었다.
마지막은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것조차 불길한 끝맺음을 예견하는 것 같아서, 나루는 듣지 않은 채 그를 보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나루는 거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옛 시간의 32살 연나루와 이 시간의 32살 연나루는 다르다.
‘꾸준히 노력했잖아. 호신술도 열심히 배웠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때와는 다를 거야.’
사실은 몇 달 전부터 지후가 있어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또다시 그 슬픔을 반복하게 될까 봐.
그가 죽었을 때 느꼈던 아픔과 슬픔을, 나루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서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그때의 아픔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기억만 떠올리면, 나루는 호흡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만큼 괴로웠다.
‘당사자인 지후는 더 무섭겠지.’
지후도 잠을 못 잔다는 걸, 나루는 알고 있었다.
최근 몇 달, 둘은 불면증을 서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는 채로 밤을 지새웠다.
‘자, 이제 나가자.’
잘된다면 나루와 지후는 둘 다 살아남는다.
전과 같다면 지후는 죽는다.
전과 다르다면 나루가 죽는다.
결과는 셋 중 하나였다.
현관문을 여는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총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는 건, 상상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었다.
‘명진이는 잘 버텼잖아.’
물론 담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겨냈다.
‘나도 할 수 있어.’
나루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며 집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밤공기가 나루를 에워쌌다.
어둠 뒤에 죽음이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몸이 떨렸다.
나루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죽음이 히쭉 웃는 것만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오늘 집 밖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지후, 그리고 친구들과 한참 의견을 나눴었다.
그때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명진 때에도, 명진은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나갈 상황이 생겼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느니, 차라리 그때와 같은 행동을 해서 충분히 대비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나루는 걸었다.
죽음이 히죽 웃으며 기다리는 그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