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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79화 (79/93)

79화. 분홍빛 축복

2018.04.02.

“요새 진짜 바쁜가 보더라고. 의대는 공부할 게 진짜 많은가 봐.”

나루가 아쉽다는 듯 말하자, 윤영이 대답했다.

나루는 그런 윤영을 빤히 응시하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구나.”

“뭐야, 연나루. 왜 그렇게 웃어?”

“응? 내가 뭘?”

“뭔가 의미심장하게 웃었잖아.”

“의미심장하게 웃긴. 그런 거 아냐.”

윤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루를 응시하다가 백을 들었다.

“아무튼 늦었으니까 다들 일어나자. 지후랑 나루. 결혼 진짜 축하하고 결혼 준비하는 거, 나한테 일일이 보고하도록 해. 아주 세세하게.”

“어이구, 무서워라.”

지후가 중얼거렸지만 윤영은 무시했다.

커피숍 밖으로 나와 지후와 나루는 택시를 타고 먼저 떠났고, 명진은 차를 지하에 세워뒀다고 했다.

“데려다줄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명진이 물었다.

“아냐, 괜찮아. 운전 조심해서 해.”

“네, 네. 조심히 들어가라. 집에 가면 연락하고.”

“넌 의외로 세심하더라?”

“그 얘기, 예전에 나루한테도 들었는데.”

명진이 씩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닫히는 문 사이로, 명진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에, 윤영은 건물 밖으로 나와 대학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걷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지만, 윤영은 산책하는 걸 좋아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대학교 정문에 도착했고, 윤영은 자연스럽게 의과대로 향했다.

의과대 앞 벤치에 앉은 윤영은 재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건물 앞이야.]

재경이 문자를 언제 확인할지 알 수 없기에, 윤영은 백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벤치 옆 가로등의 불빛으로 책을 읽으며 재경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옆에 앉는 느낌이 들어, 책에서 눈을 떼었다.

재경이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보는 재경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빛이 만들어 낸 굴곡이 깊어, 화려하기만 한 얼굴이 농후하고 진지하게 변했다.

그런 재경의 옆모습을 보는 것이, 최근의 즐거움이었다. 나루에게도 말하지 못한 즐거움.

아까 나루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매일 이유를 붙여 재경에게 연락하고 있다는 걸 들킨 것만 같아서.

“안 피곤해?”

재경이 다리를 꼰 자세로 윤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응, 괜찮아. 나보단 네가 더 피곤해 보이네.”

“나야, 뭐.”

재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대로 잠을 못 자는지, 재경의 눈가가 그늘져 있었다.

“오늘 재미있었어?”

“재미있었지. 늘 그렇듯이.”

“진짜 가고 싶었는데. 으아, 나도 놀러가고 싶다아!”

재경이 고개를 들며 외쳤다.

바람이 재경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윤영은 황홀한 눈으로 지켜봤다.

그랬다.

별거 아닌 그 장면이 황홀하게 느껴질 만큼, 윤영은 재경을 좋아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답을 말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아니야.’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아니었다.

그때는 지후를 좋아했으니까.

재경의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멋져도, 시선이 안 갈 만큼 지후를 좋아했으니까.

‘두 번째도 아냐.’

나루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지후에 대한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재경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옛 시간에서의 재경을 보았기에, 나루를 사랑한다고 힘겹게 고백하던 재경을 알았기에, 안쓰럽고 안타까워 더 챙겨주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다.

재경도 자주 연락하는 윤영의 마음을 그렇게 받아들인 듯, 바쁜 와중에도 윤영과는 통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았다.

거의 매일 연락을 하고, 하루 일과를 주고받는 동안, 어느새 재경을 향한 마음이 서글픈 인디핑크로 변해 버렸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재경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 감정을 말할 수는 없어.’

재경은 나루를 사랑한다.

옛 시간에서 그랬듯, 나루가 지후와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한결같이 나루를 사랑할 것이다.

재경이 윤영을 상대해 주는 이유는 딱 하나.

윤영이 재경을 안타까워하기에, 윤영이 재경을 위로하려 하기에.

만약 윤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재경은 다른 여자들에게 그렇듯 냉정하게 잘라낼 것이 분명했다.

옛 시간에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재경이 여자들에게 철벽을 친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의 재경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여자들을 설레게 하지도 않고, 적당히 받아줘서 희망을 품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윤영은, 이 감정을 그저 가슴에 품고 있기로 했다.

지후를 사랑했던 마음도 시간이 흐르자 추억으로 남은 것처럼, 재경을 향한 마음 또한 그러하리라 믿으면서.

‘두 번째니까 쉬울 거야.’

이제는 어리지 않으니까,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보다는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잘 흘려보낼 수 있겠지.’

윤영은 미소를 지으며 재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만 더 참아. 언젠가는 너도 쉴 날이 오겠지.”

“언젠가라니…… 대체 언제?”

“글쎄. 먼 훗날?”

“죽을 때쯤?”

눈꼬리를 내리고 묻는 재경의 모습에, 윤영이 아하하 웃었다.

“웃지 마. 얄미운 녀석.”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의대 때려 치우고 나처럼 회사에 취직하든가.”

“회사 일은 쉽냐, 뭐. 그리고 난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진학한 거니까.”

“내년엔 군대 가?”

“응, 의무병으로 가게 될 거야.”

“힘들겠네.”

“다들 가는 군대인데, 뭐. 나루랑 지후는? 부모님 허락 받았대?”

재경이 먼저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응, 받았대. 지후는 주식으로 돈 좀 벌었다더라.”

“호오, 그래? 그런 좋은 건수가 있으면 나도 좀 알려 줄 것이지.”

“됐어, 주식은 안 하는 게 나아.”

“하긴. 그런 거 할 돈도 없다, 나는.”

재경이 한숨을 푹 쉬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껴 쓰면 그럭저럭 버틸 만해.”

“아니, 그거 말고. 나루랑 지후, 결혼.”

“아.”

재경이 빙그레 웃었다.

“글쎄. 안 괜찮으면 결혼식장에 난입해서, 이 결혼 반대한다, 소란이나 피워볼까?”

“그래, 한번 해 봐. 나루가 널 선택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이 분명했기에, 윤영도 농담으로 대응했다.

재경이 웃었고, 그 웃음소리가 예상보다 슬프게 들리지 않아서 안도했다.

재경이 얼른 나루를 향한 마음을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옛 시간에는 못해낸 그 일을 이 시간에서는 해냈으면 좋겠다고, 윤영은 생각했다.

재경이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옛 시간에서처럼 쓸쓸한 미소를 짓는 재경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의 재경은, 언젠가 좋은 여자를 만나 지후 못지않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것이 내가 아니더라도, 축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많이 컸네.’

윤영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일어났다.

“네가 괜찮으면 됐어. 그만 들어가 봐.”

“벌써 가게?”

재경이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들며 물었다.

윤영은 재경의 앞에 서서 검지로 재경의 이마를 쿡 눌렀다.

“버림받은 개 같은 표정 짓지 마. 마음 약해지니까.”

“개 같다니. 강아지 정도로 해 주면 안 되냐?”

“넌 다 컸잖아.”

재경이 읏챠, 하며 일어났다.

“가자. 역까지는 데려다줄게.”

“괜찮아. 애도 아니고.”

“여자잖아.”

재경의 말에 심장이 두근, 뛰었다.

친구를 향한 배려의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때때로 이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바보 같았다.

뛰지 마라, 심장아. 네가 뛰는 소리를 재경이한테 들키면 안 돼.

윤영은 재경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 * *

나루의 집 근처에 있는 펍은 어둡고 조용한 편이었다.

감미로운 재즈 선율에,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적당히 섞여 분위기가 좋았다.

평소에는 바에 앉아 마시지만, 오늘은 특별히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칵테일 두 잔과 마른안주를 시키고, 나루와 지후는 소곤소곤 미래의 계획을 세웠다.

늘 지나가는 말처럼 결혼 후에는 이러자, 저러자 많이 이야기했지만, 공식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없었다.

내년 봄까지는 6개월이 조금 넘게 남았다.

“집은 어디로 할까? 나, 옛 시간에서 살았던 집은 피하고 싶어.”

옛 시간에 살았던 집.

지후와의 추억이 잔뜩 있을 텐데도, 그 집을 떠올리면 지후의 죽음에 슬퍼하며 절규하던 일만 생각났다.

최근 몇 년 간, 행복하고 평범한 나날이 이어졌지만, 그렇다고 아주 마음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나루는 여전히 긴장하고 경계했고, 내 몸을, 그리고 지후를 지키기 위한 호신술도 계속 배우는 중이었다.

친구들은 막상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호신술은 써보지도 못할 거라고 했지만, 나루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럼 대학원 근처로 잡을까?”

지후의 제안에 나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네 회사 근처로 잡자. 네가 출퇴근하기 편하게.”

“KOB랑 멀리 떨어져 있는데, 괜찮겠어?”

나루는 아직 KOB에 입사하지 않았지만, 내후년쯤부터는 그곳의 연구원이 될 터였다.

“응, 괜찮아. 테라스가 있는 집으로 구해보자. 애들 불러서 고기도 구워먹고, 술도 마시고 그럴 수 있게.”

“그래, 슬슬 발품 팔아봐야겠네.”

신혼여행은 여기로, 드레스는 이런 느낌으로, 가구는 이렇게, 침대는 저렇게.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며 하나, 하나 정해 나갔다.

“아이는 어쩔까?”

지후의 질문에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

그 문제는 옛 시간에서 지후에게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 그러게. 아이. 아이 문제가 있구나.”

큰 문제였다.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한다면 언젠가 아이를 낳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서는 다른 계획이 필요했다. 다른 상황이니까.

“아이는…… 더 고민해 보자, 우리.”

깊은 고민이 필요한 문제였다.

옛 시간에서 지후는 32살에 죽었다. 이 시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혹은 나루가 죽을 수도 있었다.

“널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을 거야. 하지만 만약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 그러면…….”

“한쪽 부모가 없는 아이가 되겠지.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나?”

“큰 문제는 아냐. 하지만 만약…… 그래, 네가 32살 때 죽지 않고 살아남더라도,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우리 둘 다 모르잖아. 그 이후의 일은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만약 나한테 계속 위험이 따라다니면? 날 죽이려는 단체가, 사람이, 최 교수님 말고도 있다면?”

그러면 아이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아이는 우리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 다시 계획을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아. 미안해, 지후야.”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연구를 해 버려서.

발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발견해 버려서.

지후가 빙그레 웃으며 나루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우리의 신혼 생활이 길어지겠네. 더 잘됐는걸.”

이런 상황에서도 잘되었다 말해주는 지후가 좋았다.

* * *

결혼식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큰 트러블도, 다툼도 없이 결혼식을 하는 날이 되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벚꽃이 만개해,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이 아름다웠다.

‘기분 되게 이상하네.’

신부 대기실에 앉아, 찾아온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며 나루는 생각했다.

‘내가 20대에 유부녀가 되다니!’

옛 시간에서 27살 때는 결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지후와 결혼하게 되겠지만, 아주 먼 훗날의 일이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시간, 나루는 27살에 유부녀가 된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유부녀가 돼. 후회 안 하겠어? 네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아?”

윤영이 장난조로 물었다. 나루가 웃었다.

“조금 아까울지도.”

“아하하하. 너 정말 예쁘다.”

“그래? 화장 괜찮아? 이렇게 진하게 해 본 게 처음이라 이상하게 보이던데.”

“하나도 안 이상해. 정말 예뻐.”

A라인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루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때, 입구 쪽을 보던 나루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가 싶어 시선을 돌린 윤영도 나루처럼 웃고 말았다.

신부 대기실로 들어오던 명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 왜? 사람 얼굴 보자마자 웃는 건 어느 나라 예의야?”

나루와 윤영은 웃느라 명진의 볼멘소리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힘겹게 웃음을 멈춘 나루가 말했다.

“너, 진짜 우와. 우와. 우와, 신기해.”

“그러게. 진짜 우와다.”

명진은 예고한 대로,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왔다.

목선이 보이도록 단정하게 자른 머리를, 왁스를 발라 살짝 뒤로 넘기고 검은색 정장까지 차려입은 명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험악한 인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헤어스타일을 바꾸니 의외로 순한 느낌도 풍겼다.

“야, 진작 좀 이렇게 하고 다니지. 훨씬 낫다.”

윤영이 명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냐? 영 어색한데.”

“아냐, 진짜 훨씬 나아. 우와, 근데…… 푸하하하하! 아, 너무 웃겨.”

“아, 훨씬 낫다면서 왜 그리 웃어? 진짜 어이가 없네. 됐다, 난 나갈래.”

“가긴 어딜 가. 나루랑 사진 한 장 찍고 가. 윤명진 단정 기념샷.”

“응, 찍고 가.”

나루가 손을 내밀었다.

명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나루의 옆으로 향했다.

“아, 이런 머리로 사진 남기기 싫은데.”

“앞으로도 이러고 좀 다니라고.”

나루의 옆에서 어색하게 웃는 명진을, 윤영이 카메라로 찍어주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명진이 나루에게 말했다.

“너, 정말 예쁘다.”

“그래?”

“응, 행복해 보여.”

“행복해. 정말.”

명진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나루를 응시했다.

오래전, 명진의 옆에서 서럽게 울던 나루를, 명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후를 사랑하지만 말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명진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다행이다.

나루가 이렇게 웃어서.

이제 이 미소가 슬픈 추억을 밀어내고 이 가슴에 자리 잡을 것이다.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어디서 신부 머리를 함부로 만져! 머리 망가져!”

윤영의 호통에 손을 거뒀다.

“아, 진짜 무서워 죽겠네.”

명진은 투덜거리며 신부 대기실을 나갔다.

그리고 명진과 배턴 터치를 하듯, 재경이 신부 대기실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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