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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78화 (78/93)

78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2018.03.29.

나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받아들일 수 있어.”

견딜 수 있다.

옛 시간에서 지후의 누나인 지연의 증오도 견뎌냈으니까.

참으로 사랑했던 남자의 가족, 그리하여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의 비난도 이 몸으로 오롯이 받아들였으니까.

“참 지독한 생명이야, 난.”

다른 때와 달리 바싹 말라 갈라진 나루의 입술 사이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옛 시간에서는 네가, 이 시간에서는 최 교수님이. 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

“최 교수님은 안 돌아가셨잖아.”

“하지만 돌아가신 거나 마찬가지지. 아니, 돌아가신 것보다 더 나빠. 병원비가 장난이 아닐 텐데, 최 교수님의 가족들은 어떻게 해. 병원에서는 이대로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했대.”

“…….”

“정말로 지독한 생명이야.”

“그렇지 않아. 네가 있어서 나는 살아가. 네가 있기에 나는 숨을 쉴 수 있고. 나한테는 네가 빛이고 공기고 생명이야. 네 삶은 한 남자의 세상이야, 나루야.”

그의 감미로운 위로에, 나루는 힘없이 웃었다.

“이게 지난주에 편지도 못 보내고, 면회도 오지 못했던 이유야. 그저께가 돼서야 경찰에서 연락을 받았어. 최 교수님이 날 구하려다가 떨어진 걸 본 사람이 몇 명 더 있다더라.”

“그래, 다행이네.”

“이유를 모르겠어. 최 교수님은 나를 죽이고 싶어 했는데, 왜 구한 걸까? 그냥 놔뒀으면 죽었을 텐데.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라는 말을 지후의 앞에서는 할 수가 없었다.

지난 며칠 간,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나는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죽으면 10년 후, 지후가 죽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이야기는 당연히 하지 못했다.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타인의 생명을 딛고 살아남은 목숨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던져 둘 수는 없었다.

나는 또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또 살아가야 한다.

희생으로 얻어낸 이 목숨을, 있는 힘껏 제대로 사용해야만 한다.

나루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후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참으로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긴 속눈썹으로 장식된 기름한 눈과 오뚝한 코, 때로는 고집스럽게 보이는 붉은 입술과 갸름한 턱선.

이 얼굴을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끊임없이 사랑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사랑하겠지.

“지후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지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루는 이곳에 오기 전에 챙겨온 것을, 가방에서 꺼냈다.

검은색 작은 상자를, 지후는 의아한 듯 응시했다.

“나랑 결혼해 줘.”

나루가 상자를 열며 말했다.

상자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금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예상 못 한 프러포즈에 지후의 눈이 커지는 것을, 나루는 즐거운 기분으로 감상했다.

“어…… 뭐라고?”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나랑 결혼해 줘, 지후야.”

“아…….”

뒤늦게 이것이 프러포즈라는 걸 깨달은 지후의 눈가가 붉어졌다.

지후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이런. 내가 제대하고 하려고 했는데.”

“옛 시간에서는 네가 했잖아. 이 시간에서는 내가 하려고. 너의 매시간을 행복하게 해 줄게. 1분, 1초도 우울한 일 없게 해 줄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줄게.”

면회실에는 나루와 지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군인들의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이 이쪽을 돌아봤다.

그들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후와 함께하는 이 시간은, 언제나 둘만의 세상이었으니까.

“나랑 결혼해 줘.”

나루가 미소를 지었고, 지후는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의 입술이 양옆으로 슬며시 올라갔다.

언제 보아도 황홀한 미소가 그의 얼굴 전면을 물들였다.

지후는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 * *

도서관에 오긴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재경은 같은 페이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읽다가 포기하고 일어났다.

주말인데도 도서관 열람실은 빈자리가 없었다.

‘나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괜한 일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성적 관리를 잘 해둬야만 했다.

도서관 입구 계단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웨이브가 있는 단발머리, 그 아래로 보이는 하얀 목과 마른 어깨, 자그마한 몸.

윤영이었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재경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윤영의 옆에 가서 앉았다.

“뭐 하냐? 도서관에 공부하러 온 거?”

“아니. 널 기다렸어.”

“날?”

“응, 널.”

윤영이 재경을 돌아봤다.

“나를 왜?”

“너, 점심은 먹었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다.

“아니. 입맛이 별로 없다.”

“흐응.”

윤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재경을 응시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난 입맛 좀 없으면 안 되냐?”

“고기나 먹으러 갈래? 나, 오늘 고기 땡긴다.”

“난 별로.”

“그러지 말고. 삼겹살이랑 된장찌개에 공깃밥 하나 시켜서 먹자. 김치 맛있는 집을 알아.”

윤영이 일어나 재경의 팔을 잡아끌었다.

재경은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윤영을 따라갔다.

학교 근처 가게로 갈 줄 알았는데, 윤영은 택시를 잡았다.

“야, 어디까지 가게? 나 공부하고 있었거든?”

“어차피 공부도 안 될 거 아냐?”

그랬다.

그제야 재경은 윤영이 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에, 재경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택시를 탔고, 윤영은 택시 기사에게 강남 쪽의 어딘가로 가 달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강남 쪽은 차가 많은데, 주말이라 길이 더 막혔다.

한참이 지나서야 강남역에 도착했고, 택시비도 많이 나왔지만 윤영이 지불했다.

“얼마나 대단한 삼겹살이기에 강남까지 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말했지만, 윤영의 표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낯선 골목을 걸어 구석에 있는 허름한 가게로 들어갔다.

일부러 찾아올 만큼 맛있는 가게일까 싶었는데, 두툼한 삼겹살은 고기질이 좋아 보였다.

치직―

달궈진 불판에 고기를 올리자, 맛있는 소리가 났다.

입맛이 없었는데, 고기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걸 보니 허기가 졌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을 자르고, 김치를 올려 돼지기름과 같이 굽는 동안, 윤영은 말이 없었다.

삼겹살이 다 익었을 때, 공깃밥과 된장찌개가 나왔다.

“먹자. 다 익었다.”

재경이 젓가락으로 삼겹살을 한 조각 집으며 말했다.

“응, 먹자.”

삼겹살은 맛있었고, 김치도 잘 익어서 밥과 함께 먹으니 입맛이 돌았다. 된장찌개에는 게 다리 하나가 들어가 있어서, 국물이 진했다.

입맛이 없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재경은 맛있게 고기를 먹었다. 윤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윤영이 제대로 안 먹는 바람에, 재경이 2인분을 거의 다 먹었다.

“으아, 배 터지겠네. 이렇게 많이 먹은 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밥을 먹었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여기 진짜 맛있다. 다음에 또 오자.”

“재경아.”

“응?”

“여기였어.”

“뭐가?”

“옛 시간에서 나루와 지후가 결혼 발표를 했던 곳.”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재경은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윤영을 응시했다.

“옛 시간에서 그 나루는 여기, 이 자리에 앉아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말했어. 그리고 그 날 밤, 지후랑 나루가 돌아가고 나서 너는 나한테 술 한 잔 더 하자고 했지.”

“…….”

“그 날 너는 말했어. 아주 오랫동안 나루를 사랑해왔노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감정을, 나한테 처음으로 말했어.”

재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얘기를 왜 해?”

의도한 건 아니지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차피 옛 시간의 일이잖아. 그 성재경은 내가 아니야. 이 시간과 옛 시간은 다르고, 존재하는 사람들도 감정들도 달라. 여긴 우리의 시간이고, 우리의 세계야. 너도 그렇고 지후랑 나루도 그렇고, 왜 그렇게 옛 시간에 얽매이는 거야?”

방어적으로 말이 빨라졌다.

윤영은 가만히 앉아 재경의 격한 발언을 듣고 있었다.

윤영은 저토록 담담한데, 혼자 흥분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재경은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걱정이 됐어.”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윤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나루가 지후에게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네가 괜찮을지 걱정됐어.”

“나는 괜찮아!”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괜찮다고. 나루랑 지후는 시간을 돌아오면서까지 서로를 지키려고 할 정도로 인연이야. 그런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 없고, 미련 떨고 싶지도 않아. 오히려 축하하고 있어. 내 좋은 친구 두 명이 사랑을 한다니까, 그 결실을 맺겠다고 하니까, 아주…… 아주…….”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뒤늦게 깨달았다.

재경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의연한 척하려고 했는데. 친구의 행복을 빌어주는 멋진 친구의 역할을 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아팠다.

―내일 지후한테 프러포즈를 하려고.

어제 저녁 만난 나루는, 윤영과 재경, 명진에게 그렇게 말했다.

―10년 후, 지후가 죽을지 안 죽을지는 모르겠어. 내가 죽을지, 안 죽을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이 10년, 아주 농밀하게 사용해 보려고.

일부러 선포하듯 말한 이유는, 아마도 재경 때문일 것이다.

나 지후한테 프러포즈 할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한테서 마음을 접도록 해, 재경아.

나루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접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있는 힘껏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노력한다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 마음을 고스란히 밖으로 내비치고 있었나 보다.

나루에 이어, 윤영까지 이러는 걸 보면.

입안이 썼다.

몇 번이나 대차게 차였으면서도 마음을 접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사람을 사랑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재경의 마음을 읽은 듯, 윤영이 말했다.

“친구의 연인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것도, 나쁜 건 아냐. 그저 곤란한 일인 거지. 나는 네가 나쁘다고 생각 안 해. 네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안 하고. 어쩌겠어. 사랑하게 되어 버린걸.”

윤영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으나, 재경을 향한 걱정과 위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곤란한 기분일 것 같아서.”

윤영이 재경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영은 재경의 허벅지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같이 있어 주고 싶었어. 그뿐이야.”

다정한 위로가 재경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소복소복 쌓인 우아한 하얀빛 위로에, 찢긴 심장이 아주 조금쯤은 아문 기분이었다.

재경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고마워. 나, 오늘 정말 곤란한 기분이었거든.”

* * *

비슷한 듯 다르게, 시간은 흘러갔다.

기억에 있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고, 벌어지지 않기도 했다.

지후가 제대를 하고, 나루는 졸업을 했다.

나루는 대학원에 들어가고, 재경은 의대에 편입했다.

윤영은 회사원이 되었고, 명진은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지후가 졸업하던 해에, 나루와 지후는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습니다.”

양가 부모님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의 아버지는,

“너무 빠른 게 아닌가?”

라고 우려했지만,

“딱 적당해요.”

나루의 말에 결국은 허락을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딸, 잘 부탁하네.”

나루의 아버지는 옛 시간에서와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하며, 지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 시간으로 돌아온 지 한참이 흘렀지만, 옛 시간과 같은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아릿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흐릿한 배경으로 존재하는 옛 시간은, 이 시간에서 같은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또렷한 색채를 지니고 튀어나왔다.

“돈은 있어? 둘 다 사회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내년 봄으로 결혼 날짜를 잡고,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할 때 윤영이 물었다.

“응, 주식을 좀.”

지후가 대답했다.

나루도 몰랐던 사실이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후를 돌아봤다.

“대학 다닐 때 모아둔 돈으로 간간이 주식 투자를 했었어. 어떤 기업이 성공할지 아니까.”

“우와, 그런 걸 다 기억해?”

“응, 나는 머리가 좋잖아.”

지후가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나도 머리 좋거든?”

나루의 말에, 명진이 중얼거렸다.

“웃기고 있네.”

“나 과 수석이었다고.”

“과 수석이면 뭘 하냐? 중요한 건 하나도 기억 못 하는데. 지후에 대한 것도 기억을 못 해, 어떤 회사가 성공할지도 기억을 못 해. 대체 그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 거냐?”

“너, 내 예비 와이프한테 말이 심하다.”

지후의 말에, 명진이 콧등을 찡그렸다.

“지금 네 편 들어주고 있는 거거든?”

“관둬. 쟤들은 그냥 지들 세상에서만 사니까.”

윤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해. 대학 수업 처음 들어가던 날, 나루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 나오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런 일도 있었다.

“나루한테 처음으로 시간을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었고, 지후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고 우는 걸 보고 안타깝기도 했고…… 그런데 이렇게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감회가 새롭다, 야.”

“그러게. 감회가 새롭긴 한데, 네 헤어스타일은 왜 그때 그대로니?”

윤영이 지적했다.

명진의 헤어는 여전히 레게 스타일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바꿔볼까 하고. 추천 헤어 있냐?”

“단정하게 한번 해 봐. 네 단정한 머리는 어떨지 되게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진짜 명진이 단정한 머리를 본 적이 없네. 태어날 때부터 레게 스타일이었던 것만 같아.”

나루가 윤영을 거들었다.

“흐응. 좋아, 그럼. 너네 결혼식 때 기념으로 단정하게 등장해 줄게. 너무 단정해서 심장 멎을지도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들 하셔.”

“놀고 있네. 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 나셨다고.”

윤영이 비아냥거렸다.

“그나저나 오늘도 재경이는 바쁜가 보네.”

재경은 의대를 다니는 중이었고, 의대 공부는 바빠서 옛날처럼 어울리기 힘들었다.

오늘도 늦게라도 올 수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밤 10시가 되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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