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있는 힘껏 미워하겠습니다
2018.03.26.
최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아까 보았던 그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요?”
“그건 최 교수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나루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으로 돌아와 관계가 소원해지긴 했어도, 최 교수는 나루가 신뢰하는 은사였다.
그런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하던, 내 사랑하는 남자를 죽인, 그리고 이 시간까지 따라서 돌아와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 교수뿐이었다.
최 교수는 미생물학 쪽으로 전공을 바꿔 보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절대 안 할 일이잖아요. 학생의 의사를 무시하고 다른 전공을 권유하는 건.”
“나루 양. 나는 그저 미생물학 쪽이 앞으로 더 발전을 할 거란 생각에…….”
“절대 안 할 일이잖아요. 저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거.”
“아, 그건 실수로…….”
“아니요. 실수가 아니에요. 교수님은 그런 실수 안 해요.”
“나루 양.”
최 교수가 다가오려 하기에, 나루는 뒷걸음질을 쳤다.
뒤가 허술하게 막아놓은 나무 난간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충격에 머리가 아파, 슬픔에 목이 메어,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교수님은 유전 공학 박사지만, 생명 연장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아뇨, 그래요. 술자리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고 있었어요. 그땐 저도 취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기억나요. 교수님은 신의 분노를 살 거라고 하셨어요.”
“나루 양.”
“저는 교수님을 믿었어요. 아빠처럼 따랐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연구에 대한 이야기도, 교수님한테만 했어요.”
“나루 양과 같은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들도 나루 양이 무슨 연구를 하는지 대충은…….”
변명처럼 말하던 최 교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나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연구소와 무슨 연구원들을 말씀하시는 거죠, 교수님?”
“나루 양.”
“어째서…… 어째서죠? 차라리 저한테 연구를 그만두라고 설득을 하시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저는 망설였겠지만 그만뒀을 거예요. 그만큼 교수님을 믿었으니까. 그런데 왜…… 왜 절 죽이려고 하셨어요? 왜…… 왜 지후를 죽인 거예요?”
“나루 양, 그건…….”
콰직―!
그때였다.
나루가 기대고 있던 난간이 떨어져 나간 것은.
나루의 몸이 휘청.
허공으로 뜨려고 하는 순간, 최 교수가 손을 뻗었다.
최 교수의 손이 나루를 손목을 잡아채 안쪽으로 끌어당겼고, 그 반동에 최 교수의 가벼운 몸이 부서진 난간 쪽으로 향했다.
“교수님!”
새된 목소리로 외치는 나루를, 최 교수는 응시했다.
최 교수의 몸이 난간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최 교수에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나루의 얼굴 또한 아주 오랫동안 응시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
.
현관문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최 교수는 나루의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초인종을 눌러볼까?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루는 해서는 안 될 연구를 했고, 거의 성공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지후가 죽은 일은 넘보아서는 안 될 일을 넘보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의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러나.
나루는 최 교수의 소중한 제자였다.
항상 밝게 웃으며 질문을 쏟아내던 나루를, 최 교수는 딸처럼 아꼈다.
‘그래, 일단 연인의 죽음에 대한 위로는 해 주자.’
그리 생각하며 초인종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뜬, 찰나의 순간.
최 교수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나루의 집 앞에 있었다.
복도의 냉기와 현관문 사이로 흘러나오던 나루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 최 교수는 저택의 서재에, 그것도 3년 전 팔아 버린 저택의 서재에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오래된 서적의 냄새가 그리움을 자아냈다.
최 교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왜 시간을 돌아온 걸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 답 또한 오래지 않아 알아냈다.
이것은 신이 주신 기회이자 시련이다.
신의 권능에 도전하려는 이를, 그 싹부터 뽑아 없앨 기회.
또한 신을 위해 네 애제자를 죽일 각오가 되어 있냐는 시련.
물론 신을 위해 이 손에 피를 묻힐 각오는 있었다.
시간을 돌아온 것으로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신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니 신을 위해 이 몸을 바쳐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20살의 나루를 보면 마음이 무뎌졌다.
나루를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손을 뻗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해야만 해. 반드시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그러지 않으면 신의 분노가 나를 향하게 될 거야.
옛 시간에서 신의 권능에 도전하려던 나루를 대신해, 그녀의 소중한 연인인 지후가 죽었다.
그렇듯 신의 분노를 사면, 최 교수 본인이 아닌 최 교수의 가족들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내 딸을, 내 아내를 지켜야만 한다.
대학 축제 날,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횡단보도에 서 있던 나루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저 멀리서 속도를 내고 달려오는 버스를 보았을 때, 최 교수는 바로 이 순간이 기회라는 걸 알았다.
탁―
그녀의 등을 밀었고, 차와 차가 부딪쳤고, 비명소리가 울렸다.
최 교수는 도망치듯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사람을 죽였다.
나루를 죽였다.
이 손으로 타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 무게는 최 교수가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하지만 난 해냈어. 신께서는 나를 굽어살피실 거야.’
그렇지 않았다.
몇 시간 후, 그 사고로 나루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은 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희생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죽음이 최 교수를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무게는 크고 무겁고 어둡고 아팠다.
하루, 하루가 지옥을 걷는 것만 같았다.
매일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도 이토록 두려운데, 과연 나루를 죽일 수 있을까?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해 주던 애제자를 죽이고 견딜 수 있을까?
못 하겠다.
그리 생각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딸이 사고를 당했다.
공사 중인 건물 아래를 지나가다가, 위에서 철근이 떨어진 것이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최 교수는 그 사고를 신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해야만 해. 피할 수는 없어.’
평생 죄책감을 품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평생 꿈속에 나루가 찾아오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손으로는 무리였다.
사람을 고용했다.
돈 몇백으로 살인도 불사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았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살인을 의뢰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 손으로 해야만 하는 건가?’
결심을 굳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드시 죽여야만 하나?’
안식년을 고통과 고뇌 속에서 보냈다.
이 시간으로 돌아온 후,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안식년이 끝났고, 최 교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우선은 나루에게 제안을 해 볼 생각이었다.
유전 공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연구해 보는 쪽으로 유도할 셈이었다. 만약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루를 죽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착오가 있었다면, 나루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 거란 생각을 못 했다는 점이었다.
.
.
떨어지는 최 교수를 응시하는 나루의 얼굴에는 의문과 경악과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나루를 보며, 최 교수는 빙그레 웃었다.
최 교수 또한 의문이었다.
그대로 나루를 내버려 뒀더라면 나루는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저 아이를 살린 것일까.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저 아이를 아끼니까.
언제나 수많은 질문을 던지던 저 아이를, 좋은 성과를 거두면 쪼르르 달려와 보고했던 저 아이를, 마지막 순간까지 이 못난 선생을 믿은 저 아이를.
아주 많이 아끼니까.
나는 사실 단 한순간도 저 아이를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신의 분노를 사더라도, 그리하여 이렇게 죽게 되더라도, 저 아이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최 교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입을 열었다.
죽기 전, 나루에게 알려줘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힘겹게 내뱉었고.
강한 충격을 받았고.
암흑이 찾아왔다.
* * *
나루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형처럼 너부러진 최 교수의 아래로 붉은 선혈이 번졌다.
“꺄아아아아아!”
“사람이 떨어졌어!”
“으아아!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누구야? 누가 떨어진 거야?”
“어디서 떨어진 건데?”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으려 위를 올려다봤다.
“저기 사람이 있어.”
“저 사람이 민 거 아냐?”
“저거 누구야?”
사람들이 나루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데도, 나루는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온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최 교수는 나루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루를 구하고 대신 아래로 떨어졌다.
게다가.
‘무슨 말씀을 하려던 거였지?’
최 교수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지후를 죽인 건……!
거기까지만 들었다.
말을 끝내기 전, 최 교수는 땅과 부딪쳤다.
최 교수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낸 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구급차가 오고, 경찰이 오고, 그 경찰들에게 사람들이 나루를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고, 경찰들이 올라와 나루를 데리고 갈 때까지.
나루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경찰서에서는 고된 시간을 보냈다.
경찰들은 2년 전의 버스 사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 번이나 사건에 휘말린 나루를, 그들은 의심스러워했다.
경찰들은 나루에게 설명을 듣고 싶어 했지만, 나루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온 부모님과 친구들이 경찰들에게 항의를 했고, 나루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니.”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나루의 머리를, 엄마가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우리 딸이 사람을 밀었을 리가 없잖아! 아주 이유 없이 사람을 의심하고 있어!”
아빠가 화를 냈다.
재경과 윤영, 명진도 제각각 한 마디씩 거드는 가운데, 나루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최 교수가 떨어지던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후를 죽인 건……!
그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최 교수님은 왜 나를 구한 걸까?
날 죽이려고 했을 텐데, 어째서 구했을까? 그냥 놔뒀으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날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많은 의문이 실타래처럼 엉켜 머릿속이 소란스러웠다.
‘정신을 차리자.’
나루는 다시 눈을 떴다.
‘우선 누명을 벗어야 돼.’
그 장소에는 최 교수와 나루뿐이었다.
경찰들이 나루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루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가족들과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전 괜찮아요.”
나루는 엄마와 아빠에게 말했다.
“경찰서에 가서 제대로 진술하고 와야겠어요. 엄마랑 아빠는 우선 돌아가세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서 돌려보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알겠지?”
“응, 그럴게요. 아빠.”
“너 혼자 두고 가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다.”
“괜찮아요. 친구들도 있고. 이따 연락드릴게요.”
부모님이 떠나는 걸 확인한 후, 나루는 경찰서로 향했다.
* * *
“담당 형사에게 진술을 했어. 믿어주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내가 민 게 아니라고 증언을 해 준 사람이 있다더라. 누구냐고 물었더니 지영이래. 정지영. 지영이가 증언을 해 주려고 일부러 경찰서에 다녀간 거야.”
나루는 테이블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 아이보리색 테이블은 많이 낡았고,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고추장 국물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 테이블 맞은편에 지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서 나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형사는 현장을 조사한 후에 답을 줄 거라고, 멀리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어. 예전에, 이런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지. 버스 사고.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지.”
“나는 그때처럼 과 애들이 나를 향해 비난의 시선을 던질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는 지영이랑 선미가 분위기를 바꿔 둔 후였어. 내가 민 게 아니고 떨어질 뻔한 나를 구하려다가 최 교수님이 대신 떨어진 거라고. 분명히 봤다고.”
왜 그런 데를 올라간 거야?
조심 좀 하지.
놀랐겠다.
과 동기들은 그런 이야기를 건넸다.
최 교수가 떨어진 데에 어느 정도 나루 탓은 있지만, 완전히 나루만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영이랑 선미는 옛 시간에서 나랑 소원한 관계였어. 그리고 3학년 때는 두 사람이 싸워서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었지. 그런데 이 시간에서는 그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를 돕더라.”
“다행이네.”
“응.”
나루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최 교수님은 어때?”
“수술은 성공했지만 깨어나지는 못하고 계셔. 병원 측에서는 앞으로 평생 못 깨어날 수도 있다고 했나 봐.”
“최 교수님 가족들이 널 비난하진 않고?”
지후의 질문에 나루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비난은 물론 받고 있었다.
최 교수의 부인은 학교까지 찾아와 나루의 머리채를 잡았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죽었어야 했다고, 그렇게 외쳤다.
옛 시간에서는 남편의 애제자인 나루를, 우리 집 장녀라며 아껴주던 분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서는 아마도 평생 나루를 미워하리라.
남편 대신 살아남은 나루를, 있는 힘껏 증오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