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당신이었어?
2018.03.22.
경치가 보이지도 않는 창밖을 보며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누다가, 일단 저녁을 먹기로 하고 호텔을 나왔다.
사람 많은 낯선 거리를 걷다 보니, 한 방에서 자게 생겼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구경에 집중했다.
낯선 거리, 낯선 언어, 낯선 냄새와 낯선 먹거리.
새로운 문화가 시야 안에 쉴 새 없이 들어왔다.
맛있는 걸 먹고, 거리를 구경하고, 작은 선술집에 들어가 이름 모를 꼬치를 시켜서 사케를 한 잔 마시고 나니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다시 ‘동침’으로 생각이 옮겨졌다.
선술집에서 계산을 하고 나와 호텔로 가는 내내, 둘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 말 안 하고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호텔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 앞에 도착했고, 카드키로 방문을 열었다.
아까 들어왔을 때보다 농밀한 설렘과 긴장감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지후가 엄지로 나루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 피 나겠다.”
“아, 응.”
입술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지독히도 뜨겁게 느껴졌다.
나루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지후를 올려다봤다.
지후 또한 나루의 아랫입술에 엄지를 댄 채로 나루를 내려다봤다.
조금은 긴장된,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을까.
지후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나루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고, 살짝 벌어진 나루의 입술 안으로 달콤한 타액이 흘러들어 왔다.
지후가 나루의 둥근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고, 나루는 지후의 양쪽 허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길고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였다.
이윽고 지후가 입술을 떼어냈을 때, 나루는 아쉬움을 느꼈다.
지후가 강아지처럼 올려다보는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나가서 잘게.”
“어? 응?”
생각지 못한 말에,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텔 로비에 소파가 있더라. 거기서 잘게.”
“아니, 왜…….”
“안 그러면 위험한 짓을 하게 될 것 같아서.”
평소보다 한 톤 낮은 지후의 음성에, 나루의 몸이 굳었다.
위험한 짓.
그것이 어떤 행위인지 모를 만큼 어리진 않았다.
나루는 지후를 아주 많이 좋아했지만, 그와 몸을 섞을 만큼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나루를 보며, 지후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나갈게. 잘 자.”
나루가 잡을 새도 없이, 지후는 방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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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는 정말 순진했구나.’
그때의 나루에게 첫 경험은 어떤 기분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은밀하고도 두려운 행위였다.
그것을 하는 순간 아주 많은 것을 잃게 될 것 같았고, 약간의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지후를 붙잡지 못했지.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눕히고 덮쳐 버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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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후는 로비의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는 지후의 옆에, 나루는 슬며시 다가가 앉았다.
“왜 안 자고 내려왔어?”
지후의 질문에 나루는 작게 웃었다.
“나도 여기서 너랑 같이 밤 새려고.”
“내일 피곤할걸.”
“응, 그래도.”
나루는 지후의 손을 잡았다.
오늘 내내 이 손을 잡고 싶었다.
용기를 내서 잡았더니, 지후도 나루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커서, 그와 함께하게 될 시간이 늘 든든하고 즐거우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날, 둘은 호텔 로비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여정은 조금 졸리긴 했지만 아주 피곤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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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전부 20대라서 가능한 일이었지. 32살 때 그랬으면 지쳐서 쓰러졌을 거야.’
“뭔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웃어?”
선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너무 오랫동안 추억에 젖어 있었나 보다.
선미는 자기 몫의 식사를 끝낸 후였다.
“지후 생각.”
나루의 대답에 선미가 웃었다.
“아주 달달하다, 달달해. 너도 힘들겠다. 사귀자마자 지후가 군대 가 버려서.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주말에 지후 보러 가기로 했어.”
“아, 그래? 지후는 잘 지낸대?”
“응, 밥 잘 먹고 잘 지내나 봐.”
“다행이네. 하여간 난 다음 수업 있어서 가 봐야 하거든. 명진이한테 꼭 좀 전해줘. 이상한 짓 좀 하지 말라고.”
“응, 알겠어.”
나루는 웃으며 대답했다.
선미가 손을 바이바이 흔들고 자리를 떠났다.
나루도 남은 음식을 먹고 있는데 윤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업 한 시간 비니까 산책이나 하자는 전화였다.
윤영과 학생 식당 앞에서 만났다.
윤영의 팔짱을 끼고 교정을 걸으며, 방금 선미와 만난 이야기며, 지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최 교수가 걸어오고 있었다.
작년 안식년을 끝내고 학교에 돌아온 최 교수는, 안식년을 너무 즐겁게 보냈는지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루와 윤영이 인사를 하자, 최 교수가 걸음을 멈췄다.
“오오, 연나루 양, 김윤영 양.”
최 교수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나루는 최 교수가 누군가를 부를 때 늘 ‘양’, ‘군’을 붙이는 말투가 좋았다.
최 교수는 교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학생들에게 항상 정중했다.
“교수님, 안식년 잘 보내셨어요?”
나루는 올해 최 교수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그래요. 가족들이랑 여행을 다녀왔어요.”
“아, 그래서 이렇게 살이 빠지셨구나.”
최 교수는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후덕한 인물이었는데,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온 최 교수는 걱정될 정도로 말라 보였다.
‘원래 이랬던가?’
옛 시간에서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루 양이랑 윤영 양은 내년에 졸업이지요? 진로 계획은 잘 세워놨나요?”
“네, 잘 세웠어요.”
“저도요.”
“그래요. 아, 나루 양한테 진로 문제로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언제 시간이 되겠어요?”
“저, 오늘 5시에 수업 다 끝나요.”
“음, 나는 6시에 수업이 끝나는데.”
“제가 그럼 6시에 찾아뵐게요.”
“그래요. 제2연구동에서 만나요.”
“네.”
최 교수와 헤어져 걸어가며, 윤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랑 최 교수님이랑 되게 친했던 것 같은데, 이 시간에서는 별로 안 그러네?”
“응, 아무래도 내가 이미 진로가 정해져 있으니까.”
옛 시간에서는 진로와 교과 과정을 놓고 최 교수와 상담을 자주 했었다.
―연나루 양은 정말 호기심이 많네요.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교수실로 찾아오는 나루에게, 어느 날엔가 최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8살 딸도 이렇게까지 호기심은 없는데.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귀찮게 해 드렸죠?
―그렇지 않아요. 교수가 비싼 돈 받으면서 하는 일이 뭐겠어요? 학생들 궁금증 풀어주는 거라도 해야지.
최 교수는 똑똑한 나루를 아꼈고,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맞아주는 최 교수를, 나루는 좋아했다.
KOB와 다른 연구소를 두고 고민을 할 때도, 잘 풀리지 않는 연구 때문에 지쳐 있을 때도, 최 교수는 늘 좋은 상담사가 되어 주었다.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상담하고 싶었던 사람이 최 교수님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멀어져 버렸네.’
옛 시간에서와는 달리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역시 이 시간은 옛 시간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윤영과 수업을 듣고, 5시에 강의가 끝이 났다.
윤영이 기다려 주겠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먼저 보내고, 나루는 도서관에 들러 시간을 때웠다.
이윽고 최 교수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나루는 제2연구동으로 향했다.
제2연구동은 증축 공사를 하는 중이어서, 주위가 공사 자재들로 지저분했다.
다행히 저녁이라 인부들이 돌아갔는지 시끄럽진 않았다.
나루는 안으로 들어가 생물 연구실로 향했다.
실험을 끝내고 나오던 아는 얼굴들이 보였고, 그중에 지영도 있었다.
“최 교수님은?”
“담배 피우신다고 위층에 가셨어.”
“아, 거기 공사 중 아냐?”
“흡연은 할 수 있게 해놨나 봐. 교수님 보러 왔어?”
“응.”
“이따 술 한잔할래? 선미가 남친 소개시켜 준대.”
“아, 그래? 그럼 윤영이랑 같이 갈게.”
“오케이. 이따 봐.”
나루는 연구실에서 기다릴지, 위로 올라갈지 고민하다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두 층 올라간 곳에, 흡연 구역이 있었다.
흡연 구역에서 나오던 최 교수가 나루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듯한 그의 모습에, 나루는 괜히 흡연 구역까지 따라왔다고 후회했다.
“죄송해요, 교수님. 여기 계시다는 얘기를 들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왕 올라온 김에 여기서 얘기할까요?”
“네, 좋아요.”
최 교수가 다시 몸을 돌려 흡연 구역 쪽으로 나갔고, 나루도 그 뒤를 따랐다.
흡연 구역은 증축 공사 중인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는 벽으로 막혀 있는 테라스였는데, 벽을 뚫어놓고 나무로 대충 막아놓았다.
허리 높이까지 듬성듬성 쳐놓은 나무판자 사이로 반대쪽이 보였고, 가까이 가면 아래가 내려다보였다.
지영이 막 건물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 나루는 난간에서 한 발 뒤로 떨어졌다.
“어쩐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요새 수업은 잘 듣고 있어요?”
“네, 그럼요. 출석도 열심히 한답니다.”
“그렇군요. 1학년 때 너무 자주 빠져서 걱정했었어요.”
“아하하하.”
그때는 그랬다.
다른 일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이제는 열심히 듣고 있어요. 교수님,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너무 마르셨는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런 것보다…… 나루 양은 1학년 때부터 쭉 수석이었지요?”
“네. 맞아요.”
“아주 훌륭해요.”
최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훌륭하네요.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이런 미소를 본 적이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
‘아, 그래. 그때였어.’
나루가 최 교수에게 생명 연장과 관련된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였다.
그때, 최 교수는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나루는 훌륭하구나.
칭찬을 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게 소름 끼친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나루는 저도 모르게 팔뚝을 쓸었다.
‘그래, 내 연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어. 최 교수님.’
KOB의 연구원들만이 아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나루는 문득 든 생각을 억지로 떨쳐냈다.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나루 양은 졸업을 하면 어느 쪽으로 일을 해 볼 생각인가요? 대학 졸업하고 바로 취업할 예정인가요?”
“아니요. 대학원에 가서 박사 학위까지 따려고요.”
“호오, 박사 학위. 어느 전공을 하려고 하죠?”
“유전 공학이요.”
“유전 공학. 그거 좋지요.”
“네, 교수님을 존경하거든요.”
나루가 헤헤 웃자, 교수도 웃었다.
“그럼 우리 대학의 대학원으로 가나요?”
“고민 중이에요. 외국으로 갈지, 한국 대학원으로 갈지.”
“나루 양 성적이라면 어디라도 입학할 수 있겠지요. 정말 훌륭해요.”
왜일까?
대화가 왜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 시간으로 돌아와 최 교수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가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느껴질 이유는 없었다.
그저 교수님과 학생의 대화일 뿐이니까.
그런데도 나루는 이 대화가 마치 묘한 탐색전처럼 느껴졌다.
예민한 생각이라고 떨쳐내고 싶지만, 쉽지 않았다.
팔뚝에 돋은 소름이 가라앉지 않았다.
가라앉기는커녕, 등에 식은땀까지 맺히고 있었다.
―유전 공학이란 말일세. 신의 뜻에 반하는 학문이야.
언젠가 최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제였지? 언제 이런 말을 들었지?
그래, 동기 모임 때였다.
동기 모임을 할 때, 최 교수를 초대했고, 최 교수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은지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 옆에 앉은 나루에게 말했다.
―나는 연구를 할 때마다 고민해. 이 연구는 괜찮은 걸까? 신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진 않을까?
나루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루도 취해 있어서 그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전 공학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위험한 학문이야. 선악과와도 같지. 잘못 건드리면 신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것이야. 그러니까 우리 유전 공학자들은 선을 지켜야만 해.
나루는 최 교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야, 아니야.’
일단은 부정했다.
최 교수는 나루의 가장 좋은 조언자였다.
그런 사람이 나루를 죽이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 나루는 훌륭하구나.
‘그 대화 후에 무슨 말을 했었지?’
나루는 눈앞의 최 교수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기억을 짜냈다.
‘어떤 대화를 나눴지?’
―그 연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은가?
―아니요. 일단은 비밀로 하고 있어요. 몇 명은 대충 눈치를 챘을 테지만, 완전히 알지는 못할걸요. 제가 하는 연구가 생명 연장뿐 아니라, 영생에 관한 연구라는 걸.
‘영생.’
그 단어를 사용한 건, 최 교수의 앞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나루가 유전자를 변형해 생명 연장뿐 아니라 ‘불사’를 발견하려고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잘했네. 워낙 큰 연구이니, 알려져서 좋을 게 없을 게야. 반드시 함구하고 믿을 만한 사람한테만 말하도록 하게.
그래서 나루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후에게조차도.
“헌데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때, 최 교수가 입을 열었다.
“제안이요?”
나루는 긴장을 갈무리하며 되물었다.
“그래요. 얼마 전에 우리 학교랑 교류 중인 미국 쪽 대학에서 제안에 들어왔어요. 교환 학생을 받고 싶다고.”
“교환 학생……이요.”
“그래요. 장학금을 받게 될 거고, 생활비와 기숙사도 제공이 될 거예요. 학생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지요.”
“그렇겠네요. 그런데 어떤 분야예요?”
“미생물학이요.”
“아…….”
“어때요? 좋은 기회인데, 나루가 가 보는 건.”
나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루 ‘양’이 아니라 나루였다.
옛 시간에서 나루와 아주 친해지기 전까지, 최 교수는 단 한 번도 나루의 이름을 부르며 ‘양’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친해진 이후에야 ‘나루’라고 불렀다.
게다가.
거대한 무언가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친 기분이었다.
나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최 교수와 눈을 똑바로 맞췄다.
“최 교수님이셨군요.”
“네?”
“교수님이 시간을 돌아와, 저를 죽이려고 하신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