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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74화 (74/93)

74화. 좀 이상한 사람

2018.03.15.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3학년 1학기에는 안 보이는 얼굴들이 많았다.

군대를 가거나 휴학을 한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더 반가웠다.

신입생 환영회를 하며 신입생들의 긴장한 모습에 즐거워하기도 하고, 조금 이른 3학년 MT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 남자를 보았다.

벚꽃도 다 지고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시기였다.

그때 나루는 명진과 함께 동아리방에 가는 중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였다.

면바지에 스프라이트 셔츠를 걸친 남자는, 무심히 나루를 스쳐 지나갔고, 그 순간 나루는 걸음을 멈췄다.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그래?”

나루가 따라오지 않자, 명진이 걸음을 멈추고 나루를 돌아봤다.

나루는 고개를 돌려 지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나루.”

명진이 다시 한 번 부르자, 정신을 차린 나루가 그 남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루의 수상쩍은 행동에, 명진도 나루를 따라 걸었다.

“왜 그래?”

“저 남자, 나랑 같은 연구소에 있던 남자야.”

“어? 그래? 친했어?”

“아니, 이름만 아는 사이. 아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안 나네.”

“네 기억력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냐? 남들은 못 외우는 전공 서적은 그렇게 잘 외우면서.”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내 지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중이야. 그런데 저 남자가 뭔가 엮여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어. 연구 분야가 유전 쪽이 아니었거든.”

“그러니까 더 엮여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유전자 조작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아, 그런가?”

그러는 동안 남자는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기색도 없었는데, 그게 나루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어서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멈춘 곳은 실험실 건물 앞이었다.

나루와 명진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멈춰서 남자를 지켜봤다.

잠시 후, 실험실 건물에서 나오는 여자를 향해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 남자의 팔짱을 끼었다.

나루와 명진은 멍하니 두 남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방금 그거…….”

두 사람이 멀어지자, 명진이 입을 열었고.

“선미 맞지?”

나루가 말을 받았다.

“선미가 저 남자랑 사귀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저번 주였나? 다른 학교랑 미팅 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거기 선미가 나갔던 것 같아.”

“호오.”

명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선미와 남자의 모습은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멀어졌다.

명진이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따라가야지.”

“따라가서 어쩌게?”

“저 남자가 선미랑 사귀게 된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아봐야지. 쟤네 데이트하는 데 가서 내가 떠볼게.”

“그런 거라면 나도 같이 가.”

“넌 안 돼. 만약 저 남자가 시간을 돌아온 거라면, 네가 표적인 거잖아. 얼굴을 보여서 좋을 게 없어.”

“만약 저 남자가 날 죽이려는 사람이라면 살인마라는 건데, 네 얼굴을 보이는 건 괜찮고?”

“글쎄. 과연 살인마일까?”

명진이 중얼거리며 나루의 어깨를 꾹 눌러 세웠다.

“아무튼 넌 기다려. 내가 다녀올 테니까.”

* * *

선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맞은편을 응시했다.

‘대체 이놈이 왜 이럴까?’

선미의 눈에는 의문과 경악과 당혹감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지난번 미팅에서 꽤 괜찮은 남자를 만나, 좋은 만남을 갖는 중이었다.

오늘 보고 싶다며 학교로 찾아온 그 덕분에 행복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의 팔짱을 끼고 나와 쌀국수 가게에 들어올 때만 해도,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메뉴를 주문하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불청객이 난입했다.

명진이었다.

1학년 때보다 많이 밝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불량한 차림새의 명진은 선미에게 불편한 사람이었다.

가게로 들어오는 명진의 모습에 눈을 피하려고 했는데, 명진이 선미를 향해 손을 들고 아는 체를 했다.

“여어, 선미. 이런 데서 다 만나네?”

이렇게 아는 체를 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미는 함께 있는 남자를 생각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사달이었다.

명진이 선미의 테이블에 와서, 남자의 옆자리에 앉은 것이다.

‘얘가 원래 이렇게 싹싹했나?’

명진은 남자와 통성명을 했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전공은 뭐냐, 선미는 어떻게 만났느냐, 삶의 철학이 뭐냐, 생명 공학이란 학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친하지 않은 친구의 연인에게 던질 만한 질문이 아니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릴 생각도 못 하고 명진이 하는 꼴만 지켜봤다.

사람 좋은 선미의 연인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진지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명진의 질문은 이윽고 ‘장래 희망’에 도달했다.

“야, 윤명진.”

두 살 많은 선미의 애인에게,

“형님, 그런데 장래 희망이 뭡니까? 생각해 둔 일은 있어요?”

라고 묻는 명진을 보다 못해, 선미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긴. 친한 친구가 만나는 남자가 제대로 된 인간인지 확인하는 거지.”

“친한 친구?”

선미가 콧등을 찡그렸다.

“너랑 나, 하나도 안 친하잖아.”

“에이, 넌 나루랑 친하잖아. 나도 나루랑 친하고.”

그렇게 말하며, 명진은 선미 연인의 표정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남자의 얼굴엔 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난처한 미소뿐이었다.

“나는 그냥 나루랑 친한 거지, 나루 친구들이랑 친한 건 아니거든?”

“그래, 그래. 그래도 뭐, 앞으로 잘 지내면 좋지. 아무튼 방해해서 미안했다.”

명진이 일어났다.

“야, 방해해서 미안하면 진즉에 좀 미안해하든가.”

“하하하하.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은 내 쪽에서 해야 하는 거거든. 방해한 네가 아니라!”

“우리 선미, 잘 부탁합니다, 형님.”

명진은 선미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남자에게 인사를 한 후, 가게를 나왔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생각을 정리한 후, 나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루야. 이 사람은 아닌 것 같긴 해. 하지만 경계심을 풀지는 마.”

* * *

[(중략)

명진이 말로는 그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긴장하고 있을 생각이야.

이번엔 태권도에서 1단을 땄어.

도복을 입고 검은 띠를 맨 내 모습을 보면, 너는 나한테 다시 한 번 홀딱 빠질걸? 나, 요새 진짜 멋지거든.

사범님이 돌려차기를 이렇게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칭찬해 줬어.

나는 잘 지내고 있고, 늘 네가 그리워.

너는 어떻게 지내? 두 번이나 하는 군대 생활이 많이 지겨울 것 같아서 걱정이야.

보고 싶어.

다음 주에는 면회를 갈게. 외박 신청할 수 있으면 해 둬.

―네 사랑―]

지후는 나루에게 온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나루는 매일 편지를 보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루의 편지를 읽을 때면, 피곤이 싹 풀렸다.

‘이러다가 나루 편지 읽어야만 잠을 잘 수 있는 게, 새로운 습관이 되겠군.’

지후는 피식 웃으며 편지를 사물함에 집어넣었다.

군대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느릿하게 흘러갔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을 했는데도, 손가락을 꼽아보면 겨우 2, 3일이 지나 있을 뿐이었다.

‘하아. 진짜 길기도 기네.’

얼른 군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옛 시간에서는 군 생활 하는 내내, 제대 후 나루에게 고백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시간으로 돌아온 지후의 머릿속은, 그때와 비슷하지만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대하자마자 프러포즈를 해야지.’

* * *

나루는 학생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오늘의 점심은 불고기 덮밥.

지후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시간을 돌아온 것까지 합치면 지후와 사귄 지 벌써 14년.

참으로 오랜 기간을 함께했는데도, 항상 그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지후도 그럴까?

지금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후가 무척 그리웠다.

지금 지후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면, 식판 위의 불고기를 한 숟가락 떠서 그의 밥 위에 얹어 줄 텐데.

3학년이 되니, 친구들과 겹치는 수업이 많지 않았다.

특히 졸업 후 의대로 편입하려는 재경은, 나루보다 듣는 수업도 많고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나루야. 여기 자리 비어?”

선미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었다.

식판을 든 선미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응, 비어.”

선미가 식판을 내려놨다.

선미의 메뉴는 튀김 우동과 볶음밥이었다.

선미는 튀김 우동에 든 튀김을 반 잘라 나루의 반찬 접시 위에 놓아주며 물었다.

“나루야, 윤명진 있잖아.”

“응.”

“걔, 좀 이상하지 않아?”

“응?”

“아니, 며칠 전에 내 남자 친구가 학교로 찾아왔었거든. 아, 혹시 들었나? 나, 남자 친구 생긴 거?”

“응, 들었어.”

“그래, 오빠랑 데이트하는데 갑자기 와서 오빠 옆에 앉더니, 막 이상한 거 물어보더라.”

“이상한 거?”

어떤 걸 물어봤는지 알고 있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선미는 그 날의 일이 떠오른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그 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아, 명진이가 좀 엉뚱한 구석이 있기는 해.”

“너랑 지후랑 사귈 때도 그랬어? 그렇게 지후한테 이상한 것들 물었어?”

“응. 그랬지.”

“걔, 안 그렇게 생겼는데 오지랖이 진짜 넓다.”

“아하하하. 그런가? 그래도 좋은 애야. 정도 많고.”

“뭐, 그러니까 네가 친하게 지내는 거겠지만.”

“네 남자 친구는 명진이에 대해서 뭐래? 기분 많이 상했지?”

“아니. 좀 당황하기는 했는데, 별로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어. 무서워 보이는 친구래.”

나루는 명진의 스타일을 떠올리고 웃었다.

“남자 친구랑은 잘 지내고 있어?”

옛 시간에서 선미와 지영은 재경에게 푹 빠져 있었다.

3학년 1학기, 둘은 크게 싸웠고 얼굴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서 선미와 지영은 여전히 친했고, 재수생이었던 지영의 남자 친구는 의대 입학에 성공했다.

거기다 선미에게는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다.

“응, 잘 지내지. 여름방학 때 같이 일본에 가기로 했어. 남친이 수능 끝나고 일본에 갔었는데 되게 재미있었나 봐.”

일본 여행.

그 말에, 지후와 함께했던 첫 일본 여행이 떠올랐다.

.

.

지후가 제대할 무렵, 나루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대학 때와는 달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실험을 하랴, 교수에게 잘 보이랴, 조교를 하랴.

바쁜 와중에 불면증까지 겹쳐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더 짜증나는 건, 대학원에 2년 먼저 들어온 유동하라는 인물의 행동이었다.

동하는 두 학년 선배이긴 하지만, 나이는 8살이 더 많았다. 졸업 후 회사를 다니다가 대학원에 들어왔다고 했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왔는지, 나루가 입학했을 때부터 치근거리기 시작했는데 슬슬 그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해 봤기 때문인지, 동하는 교수에게 싹싹하게 굴 줄 알았고, 교수는 동하를 예뻐했다.

교수에게 예쁨을 받는 사람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기에, 나루는 동하 때문에 받는 울분을 꾹 참는 중이었다.

“나루, 오늘 저녁에 뭐 하나? 모처럼 일찍 끝나는데.”

연구실에서 실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뒤로 다가온 동하가 나루의 어깨 위에 슬그머니 손을 얹으며 물었다.

나루는 몸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데이트가 있어요.”

“아, 그 대학생 남친?”

“네.”

“공부하랴, 데이트하랴 힘들겠네.”

동하가 나루의 어깨를 주물주물 주물렀다.

나루는 동하의 뺨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참으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하지만 어깨에 얹어진 동하의 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인간은 늘 아무도 없을 때만 이런 짓을 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정중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나루가 동하에 대해 투덜거려 봐야,

“에이, 그 오빠가 그럴 리 없지.”

“그 형, 되게 매너 좋아.”

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나루, 오코노미야끼 먹어 봤어?”

동하가 물었다.

나루는 뭔가 필요한 척 일어서며 동하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아니요.”

그게 뭔지도 모르겠다, 이 자식아.

“그래? 신촌에 오코노미야끼 전문점이 생겼던데, 오빠랑 같이 먹으러 갈래? 오빠가 사줄게.”

동하가 항상 자기 얘기를 할 때 ‘오빠가’라고 붙이는 걸 듣는 게 역겨웠다.

“아뇨, 괜찮습니다. 나중에 남친이랑 같이 먹으러 가 볼게요, 선. 배.”

“에이, 딱딱하게 왜 그래. 그냥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버럭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짜증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지후가 봤다면, ‘입술 피나겠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후를 떠올리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주말에 교수님한테 식사 대접하기로 했어. 6시니까 기억해 둬.”

동하의 말에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안 좋아졌다.

‘빌어먹을 식사 대접.’

동하 때문에 점점 성격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동하는 이 핑계, 저 핑계 대서 회식 자리를 만들었다.

원래 이렇게 회식이 많은 과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동하가 들어오면서 한 달에 두세 번씩 회식을 하게 되었다며, 선배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교수 입장에선 떠받들어 주는 자리니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교수와 함께 식사를 하는 학생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회식 자리.

교수는 보통 1차까지만 하고 돌아갔지만, 때때로 2, 3차까지 함께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냥 죽여 버리고 싶어.”

나루가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재경이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연나루. 무서워졌네.”

“농담 아냐. 나, 진짜로 그 자식을 죽일지도 몰라.”

“관둬. 그런 놈 때문에 교도소 들어가면, 네 인생이 너무 아깝잖아.”

“그 자식이랑 같이 대학원 생활을 하느니, 교도소에 들어가는 게 낫겠어. 그놈의 오코노미야끼 타령은 왜 그렇게 하는지.”

“아, 그거 맛있지.”

재경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지만, 나루의 기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거 철판에 구워 먹는 거라며? 그 철판에 그 자식 얼굴을 굽고 싶다.”

“하하하하.”

나루의 과격한 언행에 재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후가 입을 열었다.

“오코노미야끼, 먹으러 갈까? 일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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