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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73화 (73/93)

73화. 한 남자

2018.03.12.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지후의 표정이 굳었다.

지후는 명진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듯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하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생각해야지.”

명진이 얄미운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문제잖아. 군.대.”

“너는 안 갈 것 같냐?”

지후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묻자, 명진이 씩 웃었다.

“난 가족 중에 국가유공자가 있어서 면제거든.”

지후의 참패였다.

“게다가 넌 두 번이나 가는 거고. 진짜 지옥이 따로 없겠다.”

“하아.”

지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걸, 명진은 재미있다는 듯 지켜봤다.

12년 후 죽으리라는 걸 확신했을 때보다 군대에 가야만 한다는 걸 지적한 지금이, 지후는 더 괴로워 보였다.

군대를 가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어마어마하게 괴로운 곳인가 보다.

시간을 돌아오는 바람에, 그런 곳엘 두 번이나 가게 됐으니 얼마나 싫을까.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군대 제대하는 시점으로 돌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 * *

명진이 죽음을 벗어난 후에야, 나루는 대학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루와 윤영, 재경, 지후는 학과 모임뿐 아니라, 수업에도 제대로 나가지 않던 차였다.

명진이 살아남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중간고사가 있었고,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재경과 윤영은 그 여파에 힘겹게 시험 준비를 해야 했다.

“기억나는 것 좀 없냐? 시험 문제!”

시험을 하루 앞둔 날, 재경이 더는 안 되겠다는 듯 지후에게 매달렸다. 윤영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눈으로 지후를 올려다봤다.

두 친구의 애절한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지후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 이 시기엔 나도 시험을 잘 못 봐서.”

“대체 왜!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지, 공부 안 하고 뭘 한 거야?”

“나루한테 정신이 팔려 있었거든.”

“하?”

“기억나는 게 없다. 나루 얼굴 말고는.”

“됐다, 너한테 뭔가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게다가 나는 졸업하고 관련 직종이 아니었다고. 누가 10년도 더 된 시험을 기억하겠냐?”

“나루는 기억하잖아. 명진이가 아주 나루 덕을 톡톡히 봤다던데.”

“나루야, 관련 직종이기도 했고 머리 하나는 좋았으니까.”

“머리는 좋은 게 왜 그렇게 둔탱이람.”

“재경이 너, 나루 욕하지 마.”

윤영이 재경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약한 부위를 찔린 재경이 불 위의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야, 여기 건드리지 말아 줄래?”

“뭐야, 성재경.”

윤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가 약해?”

윤영이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찌르려고 하자, 재경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윤영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재경은 윤영의 손목을 낚아챘다.

“하지 마라.”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하는 재경을 보며, 윤영이 피식 웃었다.

“옆구리 약한 주제에 센 척은.”

“아씨, 이 여자랑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재경이 짜증난다는 듯 윤영의 손을 놔줬다.

지후는 흥미롭다는 듯,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진짜. 나루는 바빠서 이런 걸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하다.”

나루는 옛 시간에서 친하게 지냈던 연구원들을 하나, 하나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다.

원래는 지후도 함께하려고 했지만, 나루는 거대한 몸집의 지후가 같이 다니면 상대가 경계를 할 거라며 거절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멀찌감치 서서 수상한 점이 있는지, 혹시 이 시간으로 돌아온 기색이 없는지만 체크해 보고 돌아올 거니까.

옛 시간에서 나루는 과거사를 나눌 만큼 친하게 지냈던 연구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수상한 점이 없다는 걸 한 명, 한 명 체크하는 건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명진이 만났는데, 명진이가 그러더라.”

재경이 입을 열었다.

명진은 이번 학기를 휴학한 김에, 학교 앞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지후 너, 내년 봄에 군대 간다며?”

“하, 그 자식을 그냥……!”

지후는 당장 PC방으로 달려갈까 하다가 관뒀다.

“어쩌냐, 예쁜 나루 놔두고. 원래 여자들은 대학 3, 4학년 때가 가장 예쁘다던데.”

윤영이 놀리듯 말했다.

“맞아. 선배들 보면 예쁜 선배들 진짜 많잖아. 화장도 잘하게 되고, 꾸미기도 잘 꾸며서.”

“후배들이랑 복학생 선배들이 졸졸 따라다니겠네.”

“지후보다 멋있는 놈이 있을 수도 있고.”

윤영와 재경은 이럴 때만 죽이 착착 맞았다.

“니들은 요새 나 놀리는 재미로 사냐?”

“응!”

“당연하지!”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대체 왜? 내가 너희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지후의 말에 윤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있잖아.”

윤영의 지적에 지후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래, 너한텐 큰 잘못 했지. 더 놀려도 좋아.”

“나한테도 잘못한 거 있잖아.”

재경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한테 무슨 잘못을…….”

“결국 네가 나루랑 사귈 거면서 나랑 잘되라고 등 떠밀었잖아. 잠시나마 품었던 희망이 산산조각 나서 가슴이 쓰리다, 나는.”

“……그래, 너한테도 내가 죽을죄를 졌네. 더 놀려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과하는 친구를 보면 안쓰럽게 생각하며 용서해 줄 법도 하건만, 재경과 윤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 그런 말 안 해도 온 힘을 다해서 놀려 줄 생각이었으니까.”

* * *

불안할 정도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또다시 여름이 찾아왔고, 또다시 겨울이 되었다.

옛 시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2학년 2학기 때 학교에 윤명진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2학기 때 복학한 명진은 1학년 때보다 더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런 명진을 보는 게, 나루도 지후도 즐거웠다.

“아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야.”

“그러게. 잘 자라서 다행이야.”

나루와 지후는 아들을 키우는 부부 같은 대화를 나누며,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겨울 방학은 조금 긴 이별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지후에게 영장이 나왔고, 방학이 끝나기 전 군대에 갈 터였다.

옛 시간에서 지후가 군대에 갈 때에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나루는 연인으로서 지후를 군대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년 몇 개월만 지나면 다시 만나게 되는데, 아니, 면회도 갈 수 있고 휴가 때도 만날 수 있는데. 아주 먼 타지에 보내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허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드러내면 지후가 걱정할 것이 뻔하기에, 나루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다.

이윽고 지후가 군대에 가는 날이 되었고, 나루와 친구들은 지후를 배웅하기 위해 훈련소에 따라갔다.

나루는 그곳에서 지후의 부모님과 그의 누나를 처음으로 만나 인사했다.

“네가 지후 여자 친구구나? 맞지?”

나루를 보자마자 지후의 누나인 지연이 말했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네가 우리 지후를 죽인 거야! 네가 내 동생을 죽였다고!

옛 시간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연의 표정이 떠올라,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아렸다.

“네, 언니. 안녕하세요.”

나루가 꾸벅 인사하자, 지연이 웃었다.

“우와, 진짜 예쁘다. 지후가 집에 붙어 있질 않아서, 연애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우리 지후, 잘 부탁해.”

“네.”

“아, 군대 기다리는 거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지후 진짜 이기적이네. 잘 부탁한다는 말 취소. 그냥 걷어차 버리고 다른 남자 만나다가, 얘 제대할 쯤에 다시 사귀든가 해.”

“아, 누나.”

지후가 볼멘소리를 냈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누님.”

재경이 거들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지연은 늘 나루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상냥하게 대해주었고, 친언니처럼 챙겨주었다.

하지만.

‘옛 시간에서, 나 때문에 언니의 동생이 죽었어요. 이 시간에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지연의 밝은 미소를 보며, 나루는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혔다.

넓은 훈련장에 모인, 앞으로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될 남자들 사이에서 유독 키가 큰 지후가 눈에 들어왔다.

구령에 맞춰 가족들에게 경례를 하고, 훈련병들은 훈련장을 빙 돌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을, 나루는 울지 않고 지켜봤다.

지후의 어머니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루도 울고 싶어졌지만,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아주었다.

지후의 가족들과 헤어져 친구들과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윤영이 나루의 손을 잡았다.

“잘 참았어. 이제 울어도 돼.”

윤영의 다정한 음성을 듣자마자,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진짜 기분 이상해.”

나루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영원히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없었잖아, 너희는.”

“그건 그래.”

지후가 간혹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나루는 늘 지후와 붙어 있었다. 이렇게 장기간 떨어져 있게 된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돼. 옛 시간에서는 못 했던 걸 해 볼 수 있잖아.”

“응. 고무신 카페도 있는 것 같더라. 그런 데 가입해 봐.”

“그래야겠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그런 걸 해 보겠어.”

나루와 윤영이 재잘거리는 동안, 두 사람의 앞자리에 앉은 명진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경이 명진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루 생각.”

“뭐야, 위험한 생각이냐?”

“위험하다면 위험하지.”

명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후가 나한테 나루를 부탁하고 갔어.”

“어, 나한테도.”

“재작년 여름 이후로, 나루를 죽이려는 시도는 없었어. 다행이지.”

“그래.”

“그게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정말로 나루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을 경우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게 더 위험해.”

“응. 이렇게 지내다 보면 경계심을 늦추게 될 거고, 경계를 늦췄을 때야말로 정말 위험한 거니까. 차라리 공격을 해 오면 편할 텐데.”

“그런데 그것도 문제야.”

명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나루를 죽이려는 놈을 잡았다고 쳐. 그놈을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그 현장을 목격하고 증거를 남겨야 경찰에 넘길 수 있겠지.”

“하지만 나루는 죽지 않았으니까 처벌이 크진 않을 거고, 그놈은 곧 자유로워져서 다시 나루를 노리게 될 거야.”

“하아.”

재경은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진퇴양난이네.”

“응. 진퇴양난이지.”

* * *

경계를 풀 거라는 명진, 재경의 걱정과 달리, 나루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경계심을 풀었을 때야말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지후가 군대에 가자마자, 나루는 호신술을 배우기 위해 체육관을 등록했다.

위험한 상황에서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몸 하나 지킬 힘은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몸을 혹사시키며 호신술을 배우는 틈틈이 옛 시간 함께 실험했던 연구원들의 행적을 조사했다.

바쁜 시간이 지나갔고, 지후에게서 첫 편지가 도착했다.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잘 지내.]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미 군대에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는 지후는,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루를 안심시키려는 마음이 가득 담긴 첫 편지를 읽으며, 나루는 조금 울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지후의 편지를 받은 그 날부터, 나루의 일과에 ‘지후에게 편지 쓰기’가 포함되었다.

나루는 집 근처 팬시점에 달려가 편지지 한 뭉텅이를 샀고, 매일 밤 편지지를 한 장씩 뜯어 일기처럼 편지를 썼다.

아침에는 우체통에 편지 봉투를 넣고 하루를 시작했다.

“매일 편지를 쓸 때마다 지후랑 같이 있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나루를, 재경은 눈부시다는 듯 응시했다.

3학년 개강을 이틀 앞두고, 나루는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재경은 이번 학기엔 자취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룸메이트였던 지후가 없어서 자취 비용이 부담되기 때문이었다.

명진에게 같이 자취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고 했다.

―미쳤냐? 난 남자랑 둘이는 안 살아.

그래도 나루가 자취방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재경은 짐 옮기는 걸 도와주러 왔다.

늘 같은 방이기에 옮길 것은 많지 않지만, 한 달 넘게 비워 둔 방을 청소하느라 짐 정리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정리를 끝내고, 둘은 한성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요새 주변에 수상쩍은 인물은 없고?”

재경이 물었다.

“응, 없어. 걱정 마.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까. 나, 태권도랑 검도도 배우고 있어.”

“흐응. 그런 걸 배운다고 쓸모가 있긴 하겠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아, 다음 주에 지후 면회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내가 거길 왜 가? 연인 사이에 끼기 싫다.”

“지후 안 보고 싶어?”

“나루야, 네가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지후랑 나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그럴 사이는 진짜로 아니거든?”

“정말? 너랑 지후랑 거의 연인이잖아. 작년에 신입생 애들은 너랑 지후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 알았다더라.”

“대체 왜? 네가 있는데! 너랑 지후, 이젠 공개 연애하잖아.”

“하지만 지후랑 전부 같은 수업 듣고, 점심 같이 먹고, 같이 하교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잖아. 난 다른 수업 들었으니까.”

“망했네.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재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못 벗어날걸. 옛 시간에서도 너랑 지후는…….”

나루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뒤를 휙 돌아봤다.

나루는 한동안 한성 식당 입구 쪽을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재경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아서…… 넌 뭐 본 거 없어?”

재경은 한성 식당 입구 쪽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네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다른 걸 볼 새가 없었어.’

라는 말은, 물론 할 수 없었기에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못 봤는데.”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나루가 목덜미를 쓸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 시간, 시간을 돌아온 한 남자가 빠른 속도로 한성 식당 앞을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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