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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2018.03.08.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머릿속도 눈에 보이는 천장만큼이나 하얗게 비어 있었다.
“오빠? 오빠, 깨어난 거야?”
그때, 옆에서 새된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눈물이 가득 고인 여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얘가 왜 여기 있을까.
왜 우는 거지?
여긴 어디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많은 질문들이 오가는 가운데, 엄마와 아빠가 들어오고, 누나들도 들어왔다.
부둥켜안고 우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듣자, 천천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 그래. 나 죽었지.’
그런데 왜 가족들이 함께 있는 걸까?
‘설마…….’
명진은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 안 죽었어?”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동생이 명진의 팔을 아프게 때렸다.
“죽긴 뭘 죽어? 가벼운 뇌진탕인데 일주일이나 안 깨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명진은 여동생에게 맞은 팔을 문질렀다. 확실히 아팠다.
믿을 수가 없는 현실에 정신이 말끔해지지 않았다.
이 상황을 진짜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아니면 나는 죽어 가는데, 죽기 전 내가 원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 보았던 만화의 내용이 떠올랐다.
산속에서 얼어 죽어 가다가 구출돼서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전히 산속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건 없어.’
명진은 곧 생각을 바꿨다.
살아났다.
나는 살아남았다.
“엄마는 괜찮아? 전화를 받았어. 엄마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자전거에 부딪쳐서 계단을 구른 것뿐이야. 뼈가 부러진 곳도 없고, 팔에 상처가 조금 난 건데 뭘 그리 호들갑들인지.”
쯧쯧 혀를 차는 엄마는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트럭에 치였던 것 같은데. 택시 기사 아저씨는 괜찮고?”
“택시랑 부딪치긴 했는데 트럭이 속도를 줄이기도 했고, 택시가 옆으로 방향을 틀어서 크게 사고가 나진 않았어. 택시 아저씨는 완전 멀쩡해. 오빠가 엄살 부리면서 며칠이나 깨어나지 않았던 거지.”
“맞아. 하, 진짜 큰 사고도 아닌데 호들갑은. 내가 말했잖아. 곧 멀쩡하게 깨어나서 바보 같은 소리할 거라고.”
막내 누나가 고개를 저었다.
“뭔 소리야. 언니가 제일 많이 울었으면서.”
“내가 울긴 언제 울었다고 그래? 운 적 없거든?”
“학교도 안 가고 밤새 오빠 옆에 붙어 있었잖아.”
투닥투닥 말다툼을 하는 남매들을 보자,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됐다.
이것은 현실이다.
‘나는 죽음을 이겼어.’
가슴이 벅찼다.
직전에 느꼈던 무거운 공포와 두려움, 슬픔들이 전부 거짓인 것만 같았다.
명진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육체가 무사하다는 것을, 감각도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 밤샘 얘기하니까…… 복도에 네 친구들이 있어. 걔네, 너 입원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 데도 안 가고 병실 앞에서 네가 깨어나길 기다렸어.”
둘째 누나가 말했다.
묻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네가 제일 많이 연락한 사람한테 연락한 건데…… 연나루인가? 그런데 왜 그런 문자를 주고받은 거야? 너 꼭 죽는 사람처럼 문자를 보내놨더라.”
그때 보냈던 문자들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걔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뭔 시한부 인생 사는 사람들처럼 연락을 주고받아? 걔가 네 여자 친구야?”
“아니야. 아, 누나는 왜 남의 문자를 훔쳐보고 그래?”
“그럼 어떻게 해? 어쨌든 네 친구들한테도 사고 소식을 알리긴 해야 할 거 아냐.”
“아씨. 걔네, 아직도 밖에 있어?”
“있지, 그럼. 그런데 걔네 좀 이상하던데?”
“뭐가?”
“아니, 뭐…… 복도 지나다니다가 걔네 하는 얘기가 들렸거든. 그런데 무슨 죽음이 어떻고, 운명이 어떻고, 그런 소리를 하더라. 좀 이상한 종교 믿는 애들 아냐?”
“아냐, 그런 거.”
그 상황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의 눈에는 분명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아이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빠 최근에 되게 이상했잖아. 이상한 종교 믿는 거지? 그렇지?”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명진은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오래 누워 있어서인지 빈혈 때문에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너 일주일이나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 있었어. 갑자기 일어나려고 하지 마.”
“친구들 만나고 싶어.”
“너, 이상한 종교에 빠지고 그런 거면 가만 안 둔다?”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좀!”
* * *
침대에 앉아 씩 웃고 있는 명진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루는 코를 훌쩍이며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결국 살아남았구먼.”
재경이 명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게, 결국 살아남았네. 진짜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다행이다, 정말.”
“응, 다행이지.”
명진이 나루를 돌아봤다.
눈물로 흠뻑 젖은 나루의 얼굴을 보니,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왔다.
그중 가장 큰 감정은.
“야, 나 좀 민망하다.”
민망함이었다.
죽을 줄로만 알고 했던 모든 행동들이, 살아남고 나니 민망하고 쑥스러웠다.
너무 오버했던 게 아닌가 싶어서 얼굴이 달라올랐다.
하지만 나루는 그렇지도 않은지, 두 팔을 벌려 명진을 끌어안았다.
달콤한 향기가 명진의 코를 간질였다.
“다행이야, 명진아. 정말로 다행이야.”
“어, 다행이긴 한데.”
명진이 시선을 들었다.
지후가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네 남친이 곧 나를 죽일 것 같은데.”
“정말 죽는 줄로만 알고…… 전화도 안 받아서 죽은 줄로만 알고…… 정말로…….”
나루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했다.
명진이 피식 웃으며 나루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물론 그럴수록 지후의 표정은 점점 무시무시해졌지만, 그런 건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살았어, 나루야. 죽음이 잠깐 물러났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는 법이니까. 일단 나는 운명을 바꿨어.”
“응, 맞아.”
“지후도 그럴 거야.”
“지금은 그런 얘기하기 싫어.”
‘그런’ 얘기라니.
지후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고, 재경과 윤영은 그의 얼굴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표정을 보며 즐거워했다.
명진도 유쾌해졌다.
“그래, 그럼. 그런 얘기는 관두고 일단 나의 삶을 축하하자.”
* * *
“‘그런’ 얘기는 너무했어.”
병원을 나오며, 지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명진이가 살아났잖아. 완전 기뻤단 말이야.”
“그래, 나도 기뻐. 하지만 ‘그런’ 얘기는 너무했어.”
“징징거리지 좀 마, 민지후. 징그러우니까.”
뒤따라오던 재경이 투덜거렸다.
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덩치는 산만 한 게, 그런 걸로 칭얼거리다니. 너무 별로다.”
애인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버림받은 지후가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윤영의 동생을 구하지 못해서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진은 죽음을 벗어났다.
어둡게만 보였던 미래에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바꿀 수 있다.
끝을 정해두고 불안함과 슬픔에 휩싸여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처음으로 그들 사이에 ‘희망’이라는 꽃이 피어났다.
죽음의 메신저로만 보였던 벚꽃이 이제야 해사한 빛을 띠고 시야에 들어왔다.
나루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흩날리는 벚꽃을 감상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에, 괜히 눈물이 나왔다.
* * *
가족들은 “깨어났으니 됐어.”라며 매정하게 돌아가 버렸다.
병실에 혼자 남은 명진은 침대에 누워 살아남았다는 벅찬 감동의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그조차도 밤이 되니 사라졌다.
명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고 어두운 거리를 내려다봤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니, 지후가 서 있었다.
“야, 깜짝 놀랐다.”
“뭘 그리 놀라?”
“놀라지, 그럼. 아직은 죽음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실감이 안 난다고.”
“겁쟁이군.”
“지는 아닌 것처럼 말하네.”
지후가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와 음료수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퇴원은 언제 해?”
“2, 3일 더 있어 보라더라.”
“아픈 데는?”
“아까는 두통이 심했는데 이젠 괜찮네.”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기쁜 순간이 없었어.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 트럭이 확 덮쳐오는데, 아, 역시 죽음은 못 피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하지만 피했지.”
“오토바이를 타지 않아서인가?”
“글쎄. 돌아가는 상황을 우리가 어찌 알겠냐.”
“그런데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막 죽음을 벗어난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의논을 좀 하고 싶어서.”
“어떤 의논?”
명진은 1인실에 입원해 있었고, 1인실에는 소파가 있었다.
둘은 소파로 가서 마주 보고 앉았다.
“네가 나루에게 정리해서 전해 준 자료 있잖아. 그걸 좀 봤어.”
“아, 그래. 그거 진짜 열심히 조사했다. 이제 내가 죽지 않았으니 좀 더 제대로 파 봐야지.”
“해외 단체들도 많더라.”
“응. 나루 얘기로는 외국에서도 스카우트가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응. 애초에 KOB 자체가 세계적인 연구소이기도 하고, 각 나라에 있는 연구소끼리는 연구를 공유하니까.”
“하지만 나루는 그 연구를 공개하지 않았지.”
“아는 사람만 알았을 거야. 같이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연구 내용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충 분위기를 봐서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렇겠지.”
“그렇다면 문제는 스카우트를 떠나서, 나루의 연구를 반대하는 극단적인 단체들인데.”
명진은 입을 다물고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복도에서 간호사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하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진은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가까운 인물일 것 같아.”
지후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명진이 시선을 들어 지후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전히 근사한 얼굴이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나루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아주 풍부한 감정이 얼굴 위에 새겨졌다.
지금 지후의 얼굴을 덮은 것은 오롯이 연나루라는 한 여자를 향한 걱정이었다.
신기했다.
아직 지후의 죽음을 벗어나지 않은 상황인데도, 지후는 오롯이 나루만을 걱정했다.
죽음을 확신했을 때에도 그랬다.
지후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보다는 그저 나루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저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단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의 행동은, 때때로 주인만 아는 충성스러운 강아지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모든 세상이 주인의, 주인에 의해, 주인을 위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강아지.
그래서 좋고, 그래서 슬펐다.
한 치의 벗어남도 없는 사랑을 지켜보는 건, 경이로우면서도 슬픈 일이다.
“생각을 좀 해 봤어. 누가 이 시간으로 돌아와 나루를 죽이려고 하는지. 물론 극단적인 단체들에서 보낸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들이 과연 나루에 대해 이렇게까지 잘 알고 있을까?”
지후가 설명했다.
명진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게?”
“지금은 그때로부터 12년 전이야. 나루를 살해하려는 자들이, 과연 나루의 12년 전 거취를 자세히 알고 있었을까?”
“아아, 그거.”
명진도 그 부분을 의심하고 있었다.
“나루가 12년 전 이 대학을 다녔다는 걸, 이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야.”
“나루의 출신 학교는 이미 알려져 있지 않나?”
“보통 어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땄는지 알려지지. 나루는 다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
“그래? 하지만…… 나루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런 부분도 미리 조사하지 않았을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보긴 했어. 그런데…… 나루는 죽이기 어려운 인물이 아니야.”
나루는 평범한 연구원에 불과했다.
국가에서 보호를 해 주는 것도, 배경이 든든해서 늘 보디가드가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보다 머리가 좋은,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이다.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 표적이 현재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로만 조사를 하겠지.”
“그건 그래.”
“그럼 여기서 그림을 그려보자. 나루는 지속적으로 협박을 받았어. 그 와중에 누군가 나루를 죽이려고 했지. 하지만 내가 나루를 구했고, 나루는 살아남았어.”
“그리고 과거로 돌아왔지. 어쩌면 나루를 죽이려던 그 인물도.”
“그래. 그럼 그 인물은 이곳에서라도 나루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 연구를 막기 위해.”
“만약 그 인물이 나루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면.”
“20살의 나루가 이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걸 몰랐겠지.”
“하지만 그, 혹은 그녀는 알고 있었고, 나루를 죽이려고 했어.”
“그러니까 그 인물은.”
“나루가 다녔던 대학을 알 만큼.”
“나루의 정확한 나이를 알고 있을 만큼.”
“나루와 친했던 사람.”
“그래, 나루가 그런 이야기를 할 만큼 친했던 사람이라는 거야.”
명진이 미간을 좁혔다.
“물론 100퍼센트는 아니지. 하지만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그렇다면 나루 성격이 문제인데…… 나루가 재잘대는 성격이야?”
“아니. 나루는 선을 분명하게 그어. 활발하고 친구도 많지만, 모두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
“연구원들은 나루가 다닌 대학을 알고 있었을까?”
“팀원들은 알고 있었을걸. 그 정도 얘기는 주고받을 테니까.”
“유독 친한 팀원은 있었고?”
“몇 명쯤 있기는 한데, 이 시간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을 거야.”
“그럼 그들을 중심으로 지켜봐야겠네.”
“그래, 그래야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지후를, 명진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넌 괜찮냐?”
“죽음이라면…….”
“아니, 그거 말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 이외에 다른 걱정거리는 없기에, 지후는 무슨 말이냐는 듯 명진을 쳐다봤다.
그런 지후를 향해, 명진은 뼈아픈 질문을 던졌다.
“너, 곧 군대 가야 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