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애인이 있어요
2018.03.01.
지후와 재경은 지후의 집 거실에 나란히 앉아 플스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외출을 하던 누나가,
“작작들 좀 해라. 눈에 핏발이 섰네.”
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둘의 눈동자는 TV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적장을 물리치며 적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지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후는 게임할 때 다른 걸 하지 않지만, 나루에게 온 문자일까 싶어 휴대폰을 들었다.
윤영에게 온 문자였다.
[나루랑 나랑 명동에 간다.]
지후는 답장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나루야?”
재경이 적들의 목을 베며 물었다.
“아니, 윤영이. 나루랑 명동에 갈 거래.”
“흐응. 그런 걸 왜 일일이 보고한대? 네가 나루 아빠라도 돼?”
“그러게. 어, 거기. 뒤에.”
“아, 죽을 뻔했네. 피 좀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좀 돌아서 와. 여기 치고 있을게.”
몰려 있는 적들을 베던 지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재경이 지후를 올려다봤다.
“왜 그래?”
“제길.”
“왜? 보물 상자 못 열었냐?”
“명동이라니.”
지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시기에 명동에 가서 생긴 일을, 지후는 기억하고 있었다.
옛 시간에서 이 시기에, 나루는 윤영을 위로하기 위해 매일 윤영과 만났고 명동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꽤 괜찮은 남자에게 헌팅을 당했다.
그 당시엔 나루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헌팅으로 만난 남자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나루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없었다.
개강 후에도 그 남자와 연락을 하는 나루를 보며, 속이 새까맣게 탔던 일이 기억났다.
“가 봐야겠다.”
지후가 게임패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재경은 ‘이건 또 뭔 의처증이야?’라는 표정으로 지후를 올려다봤고, 실제로도 지적했다.
“너, 그거 의처증이다? 나루도 윤영이랑 밖에 나가서 놀 수 있는 거지. 그런 거 일일이 간섭하고 따라다니면…….”
“헌팅을 당할 거야, 오늘.”
“어?”
“S대 다니는 훈남한테.”
“훈남? 훈남이 뭔데?”
이 시간에 없는 단어를 썼더니, 재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따라서 일어났다.
“훈훈하게 생긴 남자.”
“뭐야, 그건?”
“그런 게 있어. 하여간 상당히 나루 취향인 남자한테 헌팅을 당할 거야. 윤영이는 그걸 알면서 나루를 데리고 간 거고, 나한테 경고 문자를 보낸 거겠지.”
“오오. 추리력 대단한데? 탐정인 줄.”
비아냥거리면서도 재경은 지후를 따라 나왔다.
유독 추운 날이라,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나왔는데도 코가 얼었다.
재경은 빠르게 걷는 지후의 뒤를 따라 걸으며 투덜거렸다.
“야, 그래도 이젠 걱정할 거 없지. 그때야 너랑 나루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사귀고 있잖아. 그런 헌팅남한테 나루가 걸려들 리 있겠냐?”
“물론 없겠지.”
“그런데 왜 이런 추운 날에 명동을 가려는 건데.”
“싫으니까.”
“뭐가?”
“딴 놈이 나루한테 치근거리는 게.”
재경이 콧등을 찡그렸다.
“너, 원래 그렇게 질투가 많았냐? 아니면 12년이란 시간을 더 살면서 그렇게 변한 거냐?”
“원래 이랬어. 티를 안 냈을 뿐.”
“연기력 대단하시네.”
“그래, 뭘 해도 먹고 살겠지.”
이럴 때마다 재경은 지후가 ‘성재경의 민지후’가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그가 재경은 모르는 12년을 살다가 왔음을, 이럴 때에 실감하게 된다.
재경은 경이로운 눈으로 지후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대체 12년 간, 이 녀석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너무 추워서 그런지, 명동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추억 속의 명동 거리를 보니 그리움이 밀려왔다.
20대 초반에는 명동에 참 자주 왔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명동에 오게 될 일이 별로 없었다.
“12년 후에는 여기에 길거리 음식이 엄청 발달하게 돼.”
“응, 그래?”
윤영은 신경이 다른 데로 간 듯 보였다.
계속 두리번거리는 윤영에게 물었다.
“여기서 누구 만나기로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 너무 춥다. 저기 들어가자.”
윤영이 쇼핑센터를 가리켰다.
옷이 저렴해서 중, 고등학생들이 자주 찾는 쇼핑센터였다.
나루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유행인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유행 패션이 아닌, 언제든 입을 수 있는 평범한 옷을 몇 벌 골랐다.
싸구려 액세서리도 구경하고, 신기한 옷들을 골라 입어보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배고프다. 뭣 좀 먹을까?”
윤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응, 그러자. 뭐 먹을까?”
“겨울이니까 따뜻한 거 먹자. 우동이나 칼국수 어때?”
“칼국수 좋아. 칼국수 먹자.”
명동에서 유명한 칼국수 가게로 향했다.
칼국수 두 개와 만두를 하나 시키고 가게 안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여기 진짜 자주 왔었는데. 여기는 김치가 맛있어.”
“맞아. 김치 맛있지.”
“흐음. 너 오늘 좀 이상해.”
“내가? 왜?”
“뭔가 좀 딴 데 정신이 팔린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에이, 아냐. 오랜만에 쇼핑 나오니까 살 거 많아서 그러지.”
“그래?”
“응, 신난다. 같이 이렇게 쇼핑 나오니까.”
윤영이 즐거운 듯 웃는 모습에, 나루도 미소를 지었다.
윤영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옛 시간에서 이 시기의 윤영은 무척 어두웠었다.
쇼핑을 하다가도 몇 번이나 “이거, 지완이가 가지고 싶어 했는데”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 우리 이따가 재경이랑 지후도…….”
만나고 들어갈까, 라는 뒷말은.
“저기요.”
테이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끊겼다.
나루는 고개를 돌렸고, 옆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보는 순간, 윤영이 왜 이렇게 정신이 딴 데 팔린 듯 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추억 속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우와.’
이 시간으로 돌아와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에, 나루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루의 표정을 오해한 듯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냥…… 음, 너무 제 스타일이라서요.”
그의 입술 사이로 추억 속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제가 원래 이런 걸 잘 안 해 봐서…… 아,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음, 실례했어요.”
얼굴이 터져 나갈 듯 빨개진 그는 주절주절 말을 하다가 돌아서려 했다.
그때, 윤영이 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냥 가려고 해요? 얘, 마음에 들어서 오신 거 아니에요? 남자가 한 번 말을 걸었으면 번호라도 따야지.”
이것도 옛 시간과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김윤영, 뭐 하는 거야! 난 지금 지후랑 사귀는 중이라고!’
옛 시간에서와 달리, 나루는 지후와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아, 그렇지.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 날의 만남은 짧았지만, 그 날 밤 연락이 왔고 문자로 시작된 연락은 통화가 되었고, 며칠 후 실제로 만나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박학다식해서 대화를 하면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는 점점 적극적이 되었고, 그의 적극성에 나루의 마음도 조금씩 그를 향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귈래?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늦봄, 어느 날.
그는 커다란 꽃다발과 향수를 준비했다.
―네가 참 좋아.
고백을 하는 목소리는 긴장한 듯 떨렸지만 따뜻하고 다정했다.
참 좋은 사람이라고, 이런 남자와 사귀면 행복할 거라고, 나루는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미안해.
그의 고백을 거절하고 말았다.
충격으로 굳어지던 그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생각할 시간을 줄게.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해 주면 안 될까?
그의 조심스러운 제안을, 나루는 거절했다.
―미안해, 오빠. 한 번 더 생각해도 마찬가지야.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나는 오빠랑 사귈 수 없어.
사귈 수 없었다.
그의 고백을 듣는 순간, 지후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루의 속도를 맞춰 걷기 시작하고, 나루가 허둥대다가 넘어지려 하면 붙잡아 주고, 윤영이 걱정된다고 말하면 몇 시간이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지후의 얼굴이 눈앞을 가려, 그의 고백을 받아 줄 수가 없었다.
“아, 그렇지. 번호 좀 알려 줄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에 회상에서 벗어났다.
나루는 난처한 표정으로 윤영을 돌아봤고, 윤영은 재미있다는 듯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루가 어째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그때, 지후는 재경을 데리고 명동 거리를 헤매는 중이었다.
“어디서 헌팅을 당했는지를 듣지 못했어!”
* * *
그가 축 처진 어깨로 친구와 함께 가게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나가고 가게 문이 닫힌 후에, 나루는 젓가락으로 윤영의 그릇을 톡 두드렸다.
“너, 정말 못됐어.”
윤영이 웃었다.
“못되긴. 한 번 마주쳐야 할 인연이긴 했잖아.”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나는 지후랑 사귀는 사이인데…….”
미안하다고, 거절했다.
미안해요, 애인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하다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를 가지고 논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윤영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을 좀 해 봤거든. 널 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윤영이 주제에서 벗어난 말을 했기에, 나루는 젓가락을 내려놨다.
“날 죽이려는 사람들이랑 저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
“네 시간에서 이 시간으로 돌아온 사람이, 그래서 널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꼭 네 연구 때문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만…….”
“저 오빠는 널 좋아했었고, 너한테 차였어.”
“하지만 그런 걸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 사람은 아주 사소한 걸로도 사람을 죽일 마음을 품기도 하는 법이야. 그래서 난 네가 지금껏 만났던 인연들을 하나, 하나 만나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윤영이 짚어주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과거를 그대로 답습해 보는 게 최고야. 똑같이 밟아가다 보면 틀린 점이 발견될 테니까. 아, 슬슬 나가자. 명동 거리를 헤매고 있는 불쌍한 늑대를 구해 주러.”
“불쌍한 늑대? 그런 게 있었나?”
의아해하는 나루를 보며 윤영이 씩 웃었다.
“응, 오늘은 그런 게 있을 거야.”
* * *
가게를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단번에 지후를 발견했다.
키가 큰 지후와 재경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키가 작았어도.’
나루는 단번에 지후를 찾아냈을 것이다.
이 눈은 그를 보기 위해 존재하니까.
지후 역시 곧바로 나루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왔다.
그가 허둥대는 일은 거의 없기에, 그의 다급한 모습이 놀라웠다.
“불쌍한 늑대.”
나루의 앞에 멈춘 지후를 보며 윤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후가 인상을 찌푸리고 윤영을 노려봤다.
“김윤영, 너.”
“왜? 난 네 편이야.”
윤영이 생긋 웃었다.
“내 편은 무슨.”
“네 편이 아니었으면 너한테 미리 문자도 안 보냈지.”
“너…….”
그제야 나루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나루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후의 뺨에 살며시 손을 얹자, 지후가 나루를 돌아봤다.
“걱정했어? 헌팅 당할까 봐?”
“그래.”
“네가 있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넌 그 사람을 꽤 마음에 들어 했어.”
“그랬었나?”
“개강하고 나서도 그 사람 얘기만 했었지. 따로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하지만 결국 안 사귀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속이 새까맣게 탔겠지.”
윤영이 지후의 말을 이었다.
“그랬어?”
“응.”
“그럼 말하지. 좋아하니까 그 사람 만나지 말라고.”
“어떻게 그래? 나는 군대를 가야 하는데.”
“아…….”
“너한테 군대를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없었어. 그거, 힘든 일이잖아.”
“지후야.”
그의 깊은 마음씀씀이에 감동받았다.
“난 네가 힘든 거 싫어.”
“응, 나도 그래.”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둘의 모습에, 뒤늦게 도착한 재경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얘들은 왜 또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이 난리야?”
“힘든 게 싫대.”
“힘든 게 싫지, 그럼. 힘든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얘네 세상에서는 있나 보지.”
“그나저나 윤영이 너, 헌팅 꿈까지 꿨던 거야?”
“응, 꿨었어. 꽤 사소한 부분들까지 꿨어.”
“진짜? 아, 좋겠다. 나도 그런 꿈 꿨으면 좀 더 힘을 내서 지후를 놀려 줄 수 있었을 텐데.”
재경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걱정 마.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놀림 포인트가 있을 때마다 알려 줄게.”
“거참 든든하네. 앞으로는 이런 일 있을 때 꼭 말해 주기다?”
“그래. 나 혼자 하는 것보단 둘이 하는 게 더 효과가 좋겠지.”
재경과 윤영이 지후를 놀려 줄 계획을 세우든 말든, 지후와 나루는 여전히 둘만의 세상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윤영의 가설에 따라, 이 시기에 했던 일들을 비슷하게 밟아갔다.
최근에 옛 시간의 꿈을 꾼 윤영은 나루보다 기억을 잘 하고 있었다.
1학년 겨울 방학 때 큰 사건이라면, 과 친구들과 다함께 스키장에 놀러갔던 일이었다.
1월 말, 윤영이 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10명 정도가 모여서 스키장을 다녀왔다.
시간이 흘러가고 추위도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나루는 겨울을 싫어했다.
그러나 올해는 이 겨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봄이 깊어져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이 되면, 명진은 죽는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지후와 데이트를 하면서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루는 명진에 대한 생각을 거둘 수가 없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혼자 울고 있진 않을까.
무서워서 잠을 못 자고 있는 건 아닐까.
몇 번이나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관뒀다.
만약 잘 지내고 있다면, 괜히 문자를 보내서 명진을 뒤흔들고 싶지 않았다.
개강을 하루 앞둔 날.
자취방에 돌아와 한숨을 짓고 있을 때에, 명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지내지?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너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나루가 힘들어할까 걱정스러워 하는 명진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루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나는 잘 지내. 앞으로도 잘 지낼 거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 * *
나루의 답장을 받은 명진은, 휴대폰을 꽉 잡고 고개를 숙였다.
해가 바뀌고 추위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달이 바뀔 때마다 심장이 죄여 왔다.
괜찮고 싶은데, 의연하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이제 한 달 후, 나는 죽는다.
명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