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다를 거야
2018.02.19.
“꿈을 꿨어. 지완이가 죽은 후 계속 서로를 원망하는 우리 가족들, 그리고 도망치듯 학교에 나갔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있었어. 나는 절망과 괴로움과 죄책감과 후회에 빠져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지. 그리고 네가, 그때만 해도 나랑 인사만 간신히 나누는 사이였던 네가 내게 말을 걸었어.”
―윤영아. 요새 무슨 일 있어?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듯한 목소리와 눈빛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강의실 안의 모두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데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루는 조금 당황하는 듯했지만, 곧 윤영을 감싸 안으며 일으켰다.
―우리, 나가자.
사람이 별로 오지 않는 기숙사 근처의 벤치에서, 나루는 윤영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함께 있어 줬다.
윤영은 한참을 울었고, 더듬더듬 여름 방학 때의 일을 이야기했고, 서로 싸우는 가족들에 대해서도, 죄책감에 대해서도 전부 털어놓았다.
“너는 진지하게 들어줬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얘가 왜 이렇게 열심히 내 얘기를 들어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얘기에 집중을 해 줬어. 그리고 그 날 늦게까지 나와 함께해 줬어.”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기 때문일까.
나루는 그 날 이후로 매일 윤영과 함께해 주었다.
“어느 날엔가는 수업이 끝나고 네가 말했어. 식물원에 가자고. 집에 가기 싫은 나는 너와 식물원에 가고, 거기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또 울고, 그러면 너는 싫은 기색 없이 내 옆에서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줬어.”
매일 그랬다.
“너는 내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말을 기억했고, 매일 이유를 붙여서 나와 함께 아주 늦은 시간까지 있어 줬어. 정말로 매일. 시험 기간에도 빠짐없이.”
누군가의 우는소리를 매번 들어주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루는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어. 어느 날 네게 말했지. 이런 일 안 해 줘도 괜찮다고, 이제 충분하다고. 그랬더니 네가 그러더라.”
―응? 난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건데?
널 위한 일이야.
내가 널 위로해 줬어.
난 역시 착해.
난 역시 대단해.
그런 우월감이, 나루에게는 조금도 없었다.
윤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루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윤영이 나루를 돌아봤다.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어?”
“윤영아…….”
“아무리 꿈이라지만…… 그 꿈에서 매일 나와 함께해 준 너를, 그래서 현실에서조차 내 슬픔을 가져가 준 너를, 내가 어떻게 계속 미워할 수가 있겠어?”
나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널 찾아올 엄두가 나지 않았어. 무서웠어. 그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땐, 꿈은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는 그 꿈이 현실이었으면 해서, 네가 그저 꿈이라고 말할까 봐, 그런 일 하나도 모른다고 말할까 봐 무서웠어. 나는 꿈꾸는 걸 기다리게 됐어. 매일 밤, 잠이 들 때면 기대가 됐지. 네가 날 어디로 데려가 줄까, 지후랑 재경이가 날 어떻게 웃겨 줄까. 우리 넷은 또 무슨 일을 할까. 그리고…….”
“지후가 죽었지.”
“그래, 지후가 죽었어. 그제야 너를 찾아올 용기가 생겼던 거지.”
이야기를 끝낸 윤영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넌 이제 좀 괜찮아?”
나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많이 괜찮아졌어. 참 이상해. 그저 꿈을 꿨을 뿐인데 위로를 받고 괜찮아지다니. 엄마랑 아빠는 아직 슬픔에 잠겨 있어.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서로를 비난할 때도 있고. 하지만 내가 괜찮으니까, 두 분을 위로해 줄 수가 있어. 아무것도 못 하고 함께 싸웠던 꿈에서와는 달리.”
“그래, 다행이다.”
“너한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동안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모르고 그런 거잖아.”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정말로 어떻게 됐던 것 같아.”
윤영이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남자에 미쳐서 죄 없는 너를 미워하고, 질투하다니. 나, 그렇게까지 몹쓸 애는 아니었는데.”
“어쩌면 나랑 지후가 시간을 돌아오는 바람에, 너에게도 그런 영향이 간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 우리랑 가까워질수록 네가 변했으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닐 거야. 그저…… 나는 원래 그런 애였고, 그런 내 모습이 싫어서 노력을 해왔을 뿐인지도 몰라. 그래도 안심해. 나, 이제 지후에 대한 마음은 깔끔하게 정리가 됐으니까.”
“그런 걸로 너무 걱정한 적은 없어.”
“그래도 조금은 걱정한 거 아냐?”
“아주 쪼끔?”
윤영이 작게 웃었다.
“아직은 현실의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널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졌으니, 우리는 다시 평범하게 시작할 수 있겠지.”
“응.”
“앞으로 잘 부탁해, 나루야.”
“응, 나도.”
“네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울게.”
“나도야. 지완이 일로 힘들면 언제든 얘기해. 같이 있어 줄게.”
“응, 알아. 같이 있어 주리라는 거.”
* * *
나루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윤영은 괜찮다고 거절하고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의 의미를, 최근에야 실감하게 되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었다.
믿기지 않지만 믿고, 슬프면서도 기쁘고, 미우면서도 좋은, 여러 가지 감정이 윤영의 가슴속에 가득했다.
땅을 보며 천천히 걷는 윤영의 옆을, 누군가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같은 속도로 걷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윤영은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키에 곧은 자세, 그림 같은 옆선.
재경이었다.
윤영의 시선을 느낀 듯 재경도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재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윤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조용히 따라서 걷던 재경이 입을 열었다.
쓸쓸한 음색이었다.
“꿈에서 지후와 나루의 시간을 봤다고 했지?”
“응.”
“나는, 어땠어?”
울컥―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재경은 최대한 가벼운 어투로 물었지만, 사실은 가벼운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해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적당히 거짓말을 섞는 게 좋을까?
아주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오갔다.
윤영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거짓말을 해 봐야 언젠가는 들통날 것이다.
“너는 여전히 나루를 좋아했어.”
“그래.”
“나루가 지후와 약혼했다는 걸 알리던 날, 너는 나한테 고백했어. 나루를 사랑한다고. 쭉 사랑해 왔다고.”
“아아, 그렇구나. 역시.”
재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고, 그게 윤영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이 친구는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도 아픈 짝사랑을 한다.
“나는 슬퍼 보였어?”
재경이 물었다.
“아니. 하지만 쓸쓸해 보였어.”
“그래.”
대화가 끊겼다.
윤영은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미련하게 짝사랑을 하는 이 친구와 조금 더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둘은 대화가 없이 느리게 걸었다.
윤영이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재경은 지적하지 않았다.
“이 시간의 나는 다를 거야.”
이윽고 재경이 입을 열었다.
“옛 시간의 성재경은 미련하게 고백도 못 하고 12년을 끌고 갔지만, 이 시간의 나는 고백을 했고, 제대로 차였어.”
“그래서 마음이 접혔니?”
“아니. 전혀. 아직도 나루를 보면 아프고 슬퍼. 하지만 나루와 지후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기뻐. 그 두 개의 감정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기쁨이 더 커. 옛 시간의 성재경도 그래서 고백하지 않는 것을 택한 거겠지.”
“바보 같아. 너는 12년 간 제대로 연애도 못해. 누구를 만나도 짧게 사귀고 헤어지지. 나루를 못 잊어서.”
“응, 아마 한동안은 그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 시간의 나는 분명 정리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지금보다 더 크고 성숙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게 되겠지.”
“정말로 그럴 거라고 생각해?”
윤영은 걸음을 멈추고 재경을 돌아봤다.
재경도 윤영과 시선을 맞췄다.
왕자처럼 화려한 얼굴에는 쓸쓸한 미소가 묻어 있었다.
낙엽 같은 쓸쓸함이 더해졌음에도, 재경의 화려함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응,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그러니까 너도 그럴 수 있을 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지후에 대한 그 마음, 너도 곧 정리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네 감정을 부정하려고 하지 마, 윤영아. 옛 시간에서 어땠든, 이 시간에서 너는 분명 지후에 대한 사랑을 느꼈어. 그건 없던 일이 되지 않아.”
윤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마음을 나루에게는 도무지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다 보면 언젠가 정리되리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내 아픔을 알아주고 있다.
“나루도, 지후도, 네 감정을 없었던 일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부정하지 마.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네 가슴에 난 구멍만 커져.”
“인정하면 작아질까?”
“응.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더라. 그리고 어느 날, 만나게 되겠지. 이 구멍을 완전히 채워 줄 사람을.”
“너, 정말 희망적이구나.”
그래도 다행이라고, 윤영은 생각했다.
나루를 사랑해 왔다고 고백하던 재경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슬픔과 고독이, 대놓고 드러내는 감정보다 쓰라렸다.
보는 이조차 오열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 외로움을, 이 시간의 재경은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희망을 좀 가져. 그렇게 죽상 하고 있지 말고.”
재경이 윤영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윤영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몸을 뒤로 뺐다.
“건드리지 마, 왕자님. 난 잘생긴 남자라면 딱 질색이니까.”
* * *
윤영을 보낸 후 지후와 잠깐 만나고 들어왔다.
씻고 나왔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가 꿈인 줄로만 알았다.
한 번 더 울린 후에야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눈을 떴다.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휴대폰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였다.
‘이런 시간에 누굴까?’
지후일 리는 없었다.
‘혹시 날 죽이려는 사람일까?’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숨을 죽이고 현관문을 노려봤다.
“나루야.”
그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현관문 사이로 들어왔다.
명진이었다.
나루는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명진이 오토바이 헬멧을 쓴 채로 문 앞에 있었다.
누군지 묻지 않고 문을 열었더라면 깜짝 놀랐을 뻔했다.
“명진아.”
“잠깐 들어가도 될까?”
“응, 들어와.”
나루가 옆으로 비켜섰다.
아무 남자나 집에 들이지 좀 마. 지후한테 이른다.
평소라면 할 법한 말을, 명진은 하지 않았다.
나루는 명진이 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명진은 헬멧을 벗지 않았고, 앉지도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명진에게 “좀 앉아.”라고 말했지만, 명진은 들리지 않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헬멧 안으로 명진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지만,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아마도 그걸 의도하고, 명진은 헬멧을 벗지 않는 것이리라.
“금방 갈게. 걱정 마.”
“그런 걸 걱정한 적 없어. 무슨 일이야?”
“알잖아. 무슨 일로 왔는지.”
“…….”
“말해 줘. 윤영이 동생, 어떻게 죽은 건지.”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명진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가만히 나루를 응시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오늘 일찍 잠자리에 든 이유도,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개운한 정신으로 명진에게 전할 말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명진이 말했다.
“거짓말할 생각 없어.”
“이리저리 돌려서 꾸미지도 마.”
명진의 강경한 태도에 나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어.”
“말해 줘, 이제.”
“윤영이 동생은 물에 빠져서 죽었대.”
“그건 알아.”
“구하려고 했는데…… 못 구했대.”
“그래?”
“응.”
“그렇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윤영이 나루의 말을 믿고 동생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구할 수 없었다.
죽음은 표적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나루가 아는 표적은 둘 남아 있었다.
윤명진, 그리고 민지후.
윤영의 동생은 명진에게 있어 일종의 지푸라기였을 것이다.
윤영의 동생이 살 수 있다면, 명진도 살 수 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결과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윤영의 동생은 죽었다. 윤영이 살리려고 노력했음에도.
“갈게.”
명진이 돌아섰다.
“명진아.”
이대로 명진을 보낼 수 없었다.
그의 손목을 붙잡자, 명진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루야,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마음 좀 정리하고…… 마음 좀 정리하고…… 그러고 나서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랑 지후는…… 알겠지?”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띄엄띄엄 말하는 명진의 모습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루는 이를 악물고 명진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그럼. 잘 자.”
명진이 나가고 나루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게 흐느꼈다.
옛 시간에서 명진은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간의 명진은 나루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나루가 이 시간으로 돌아왔음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가장 먼저 믿어주고,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친구.
나루에게 이 시간을 걸어갈 용기를 주고, 운명에 부딪칠 힘을 준 친구.
그리하여 이 시간이 너무 고독하지 않도록, 함께 걸어와 준 친구.
명진을 잃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