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러니까 우리, 오늘부터
2018.02.12.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대문을 여는 소리를 못 들었다.
“담 넘었지.”
“그러다가 다쳐.”
“20살이잖아. 다쳐도 금방 나아.”
“20살이 천하무적인 건 아니거든?”
지후가 창문 너머에서 손을 뻗어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튼 납치하러 왔어. 나와.”
“납치하러 온 사람이 나오란다고 순순히 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지후가 나루를 가리켰다.
나루는 콧등을 살짝 찌푸렸다가,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하고 거실로 나왔다.
TV로 드라마를 보는 엄마에게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고 말한 후,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지후가 나루의 손목을 꽉 잡았다.
“가자.”
“어디 가?”
“어디든. 가고 싶은 데 있어?”
“납치하러 왔다며? 장소도 안 정해 둔 거야?”
“늘 첫 번째는 네가 가고 싶은 곳. 그다음이 내가 정해 둔 장소.”
“가고 싶은 데 없어. 네가 정해 둔 데로 가자.”
나루의 말에 지후가 멈칫했다.
나루는 그의 넓은 어깨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물었다.
“너, 정해 둔 데 없지?”
“나는 어디를 가든 너만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야.”
“아니, 그런 로맨틱한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거든? 정해 둔 데 없는 거지?”
“어디든 네가 있는 곳이…….”
“으이그. 말 돌리지 말라고.”
나루가 지후의 뺨을 꼬집었다.
지후가 즐겁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서 가까운 데에 공원 하나 있지 않아?”
“아직 그거 생기기 전이야.”
“아, 좀 나중에 생기나?”
“응.”
“그럼 일단 나가서 좀 걸으면서 생각하자.”
밖으로 나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걸었다.
오랜만에 걷는 동네가 조금은 낯설었지만, 걷다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길 끝에 너랑 갔던 공원이 있어. 아, 공원이 아니라 놀이터라고 해야 하나?”
나루가 사는 동네에는 크고 작은 공원들이 많았다.
“응, 기억난다. 되게 을씨년스러운 놀이터 말이지?”
“응. 거기 그네, 되게 삐걱거렸잖아.”
“맞아. 거기서 내가 무서운 얘기해 줬더니 네가 울면서 매달렸지.”
“안 울었거든.”
“울었어.”
“안 울었다고. 누구를 울보로 아나.”
“울보잖아.”
“울보는 너지. 네가 사귀자고 했을 때, 내가 그러자고 했더니 울었잖아.”
“안 울었어.”
“안 울긴. 눈가가 빨개졌거든.”
“하품했거든.”
“하품 안 했네요. 입 안 벌리고 하품하니?”
“속 하품이 있어. 어려운 자리에서 입 안 벌리고 하는 하품.”
“호오. 그래서 나한테 사귀자고 하는 그 중요한 순간에 하품을 하셨다?”
“읏…….”
“일로 와, 민지후. 감히 하품을 해? 이 몸이 사귀어 주겠다고 허락하는데?”
지후의 볼을 꼬집으려고 하는데, 지후가 나루의 손목을 잡았다.
가로등 아래였다.
연노란 가로등 불빛이 지후와 나루의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후의 진중한 눈동자가 불빛 아래에서 더욱 맑고 깊게 빛났다.
“나루야.”
“응?”
“우리 사귀자.”
“…….”
“네가 좋아. 세상에서 제일. 그러니까 나랑 사귀어 줘.”
새삼스레 심장이 뛰었다.
처음도 아닌데, 우리는 오랫동안 연인이었는데, 그런데도 새삼 가슴이 벅찼다.
“내가 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게.”
옛 시간에서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울보’라고 놀림을 받을 게 뻔하기에, 나루는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코를 훌쩍거리게 되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엄지로 나루의 코 아래를 문질렀다.
“네가 울보라도 괜찮아.”
“울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겁쟁이여도 되고.”
“겁쟁이도 아니거든.”
“너의 눈물도, 두려움도 전부 내가 함께해 줄게. 그러니까 나루야.”
“응, 사귀자.”
지후가 또다시 말하기 전, 나루가 먼저 대답했다.
나루는 두 팔을 벌려 지후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후는 구부정한 자세로 나루의 등에 손을 올렸다.
“우리 사귀자, 지후야. 네가 바보라도 괜찮고.”
“바보 아냐.”
“사귀자고 말하면서 하품을 해도 괜찮아.”
“사실 하품한 거 아니었어.”
“내가 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줄게.”
나루는 지후의 목에서 떨어져,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러니까 우리, 오늘부터 연인 하자.”
* * *
엄마 심부름으로 마트에 가던 재경은 우뚝 멈췄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 놀이터에서 눈에 익은 사람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놀이터 앞까지 뒷걸음질을 친 후에 고개를 돌렸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명진이 있었다.
놀이터 근처에 세워진 빨간색 오토바이는 명진의 것인가 보다.
명진은 벤치 옆자리에 헬멧을 놔두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명진은 재경이 다가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헬멧을 들고 옆에 앉은 후에야, 명진이 고개를 돌렸다.
“누가 이거 훔쳐 가도 모르겠네.”
재경의 말에 명진이 힘없이 웃었다.
“그런 걸 누가 훔쳐 가겠냐.”
“여긴 어쩐 일이야? 너, 이 동네 사는 거 아니잖아.”
“어. 이 동네 안 살지.”
“설마 나 보고 싶어서 온 거냐?”
“그런가?”
“뭐야? 왜 부정을 안 해?”
“그러게.”
명진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경은 명진의 심정을 짐작했기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헬멧을 끌어안고 앉아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명진이 입을 열었다.
“지후랑 나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걔들이 날 신경 쓰게 하기 싫다.”
“그래.”
“나는 항상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왔지. 머리가 좋거든. 뭐, 너도 좋겠지만.”
“…….”
“그런데 요샌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족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겠어. 이런 얘기를 누군가랑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누가 믿겠냐, 내가 내년 봄에 죽는다는 말을.”
“보통은 안 믿지.”
“그래. 그런데 내 말을 믿어 줄 지후랑 나루는…… 걔들 일로도 벅찰 거야. 방해하기 싫어.”
“걔들은 그걸 방해라고 생각 안 할걸.”
“응, 안 하겠지. 그런 애들이니까. 그래서 더 방해하기 싫어. 걔들은 서로에게 집중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날 보러 온 거야?”
“응.”
“연락이나 하지.”
“막상 만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이러고 앉아 있을 순 있잖아.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낫지 않아?”
재경의 말에 명진이 빙그레 웃었다.
“넌 정말 좋은 녀석이야, 성재경.”
“어이구. 남자한테 그런 말 들어봐야 기쁘지 않은데.”
다시 침묵이 흘렀다.
둘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봤다.
재경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심부름 나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어머니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재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아도 돼.”
명진의 말에, 재경은 “미안.”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딘데 안 들어와? 대파를 재배하러 갔니?]
“엄마. 나 친구랑 잠깐 마주쳐서. 얘기 좀 하고 들어갈게.”
[누구? 지후? 지후 저녁 안 먹었으면 데리고 와.]
“아니, 지후 말고. 대학 친구.”
[그 친구, 저녁 안 먹었으면 데리고 와.]
“얘기는 해 볼게. 아무튼 끊어요.”
재경이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가 화통하시네.”
“응. 저녁 먹으러 갈래?”
“아니, 난 그만 가 볼게.”
명진이 일어나서 헬멧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재경은 헬멧을 꼭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명진아. 더 앉아 있어. 더 있어도 돼.”
“됐어. 할 얘기도 없는데.”
“꼭 할 얘기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좀 앉아 있어. 헬멧 안 줄 거야.”
“그럼 그냥 가지, 뭐.”
“나루한테 이른다?”
“……비겁한 고자질쟁이.”
“그걸 이제야 알다니.”
명진이 다시 벤치에 앉았다.
또다시 소리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한참 그렇게 앉아 있다 보니 해가 기울어 갔다.
노을에 물든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명진이 입을 열었다.
“가족들에게 내 죽음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 말하면 믿지 않겠지. 하지만 내년 봄 내가 죽게 되면, 믿지 않았던 걸 후회할 거야. 그렇다고 알리지 않으면, 가족들은 내가 죽었을 때 많이 당황하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대하는 가족들을 볼 때마다, 정말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집에 있는 게 힘들다.”
“그래, 힘들겠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왔나 보다. 너한테 말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헬멧 줘. 그만 가게.”
“응.”
일어선 명진에게 재경이 헬멧을 내밀었다.
명진이 헬멧을 잡았지만, 재경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헬멧을 사이에 둔 채, 재경이 명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명진아.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사랑한다, 행복하다, 그런 말도 많이 하고. 그리고……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네가 정말로 죽게 되면 내가 네 가족들에게 전해줄게. 네가 남기고 싶은 말들을.”
명진이 울듯이 웃었다.
“그래, 고맙다. 개강하고 보자.”
“언제든 와.”
“그래.”
오토바이가 떠나는 소리가 들린 후에도, 재경은 일어나지 않았다.
명진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괜찮을 거야. 이 시간은 지후랑 나루가 겪고 온 그 시간과는 다르잖아. 다른 추억들, 다른 행동들을 하게 되잖아.
그러니까 네가 꼭 죽는다는 법도 없어. 발버둥 치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을 거야. 벌써부터 포기하지 마.
경쾌한 목소리로 그런 말들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재경은 선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영의 동생이 여름휴가를 갔다가 사망했다는 것을.
* * *
지후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나루는 하나하나 정리를 시작했다.
비명횡사를 하더라도 부모님이 너무 많이 울지 않도록, 미루가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내가 없어도 잘 살아야 돼.
나는 행복했어. 나는 후회하지 않아. 모두들 사랑해.
슬프더라도 그것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 안 돼. 슬픔은 서로 보듬고, 아껴주고, 그렇게 슬픔을 이겨내야 돼.
내가 하늘에서 지켜볼 거야.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매일, 매일 적었다.
지후에게, 재경에게, 그리고 명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적었다.
갑자기 죽더라도 그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낮에는 지후와 데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신변을 정리했다.
잠이 모자라 20대의 젊은 육체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지만,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후와 통화를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도, 작은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곤 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나를 죽일지 모르기에, 온 신경이 예민해졌다.
민지후라는 강력한 수면제로도 잠을 잘 수 없는 나날이 지나, 개강을 하게 되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나마 잠을 잘 수 있었다.
지후가 가끔 와서 나루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줬고, 도통 잠을 못 잘 때는 밤새도록 나루의 곁을 지켜 줬기 때문이다.
수강 신청 정정 기간에는 굳이 출석을 할 필요가 없기에, 윤영이 출석하지 않는 게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다. 윤영 이외에도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몇 명 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윤영은 여전히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윤영이 안 왔어?”
일주일이 더 지난 후, 누군가의 질문에 선미가 말했다.
“윤영이 어쩌면 휴학할지도 몰라.”
“왜? 뭔 일 있대?”
“동생이 죽었대. 물에 빠져서.”
나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듣는 건 달랐다.
나루는 반사적으로 지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후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 무심히 선미 쪽을 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명진은 이를 악물고 선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명진의 시선을 느낀 듯 선미가 물었다.
“왜, 왜 그렇게 째려봐?”
“윤영이 동생이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확실해?”
“응, 나 장례식도 다녀왔어.”
“언제?”
“8월 초쯤에.”
명진이 윤영의 가족을 놓친 시기였다.
나루는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윤영은 울고 있을 것이다. 옛 시간에서처럼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윤영이 혼자 그러고 있는 게 싫었다.
그녀의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옛 시간에서처럼 그녀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달라. 내가 오히려 윤영이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어.’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친구가 도움이 되어주지 않는 것과, 친구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되어줄 수 없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괴로울까?
‘둘 다야.’
나루는 울고 싶었다.
‘둘 다 비슷하게 괴로워.’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니 강의가 끝나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명진이 도망치듯 강의실을 나가는 게 보였다. 나루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명진아.”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 혼자 있고 싶어.”
명진의 심정을 이해했다.
나루가 말한 대로, 윤영의 동생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렇다면 내년 봄, 명진도 죽는다.
이제야 그것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이리라.
“내일 봐.”
“그래.”
“아니, 언제든 네가 보고 싶을 때 봐.”
“그래.”
명진이 가 버리고, 나루도 지후, 재경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나루도 명진처럼 누군가와 대화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후는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나루의 옆을 걷고 있었다.
나루의 자취방이 있는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나루를 향해 달려들었다.
재경과 지후가 막을 새도 없었다.
“아……!”
나루가 짧게 비명을 질렀고, 상대에게 밀쳐져 쓰러졌다.
공포로 크게 뜬 나루의 눈에, 상대의 모습이 비쳤다.
윤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