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세상에서 제일 예뻐서
2018.02.01.
볼일을 보고 나온 윤영이 나루를 보고 멈칫했지만, 곧 모르는 척하고 세면대로 왔다.
“윤영아.”
나루는 목소리를 낮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윤영은 못 들은 척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여름 방학 때 계곡에 가?”
“…….”
“어느 계곡으로 가는지 알 수 있을까? 나도 여름 방학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괜찮은 곳 좀 있나 싶어서.”
“…….”
윤영은 계속 못 들은 척을 했다.
이제 곧 지영과 선미가 나올 것이고, 그러면 윤영은 그 둘과 딱 붙어 다닐 것이다.
그러면 윤영에게 말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 말해야 한다.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정신병자라고 생각되더라도, 이제는 말해야 한다.
“올해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계곡 물이 많이 불어날지도 모른다더라. 그러면 위험할 테니까, 계곡 말고 바다 같은 곳으로 가는 건 어때?”
“미친…….”
윤영이 중얼거리며 거울로 나루를 노려봤다.
“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앞으로 관계되지 말자고. 지금 내 휴가 계획까지 너한테 지적을 받아야 하니?”
“부탁이야, 윤영아. 계곡 말고, 바다로 갔으면 좋겠어. 정말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
“진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난. 너, 정말 왜 이래? 내가 어디로 가든,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화장실 안은 고요했다.
윤영의 목소리가 작지 않기에, 선미와 지영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루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알겠어, 윤영아. 그럼 내 말 잘 들어.”
나루는 거울로 윤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계곡에서 어쩌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도 몰라. 누군가 물에 빠질 거야, 아마도. 어쩌면 네 동생이.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곧바로 구해야 돼. 알겠지?”
나루의 음성은 진지하고 묵직했다.
농담이나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루의 목소리 안에 담겨 있었다.
윤영의 눈동자가 일렁 흔들렸다.
“너…… 정말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냐? 아니면 저주라도 하는 거니? 사고 나라고?”
“그런 거 아냐.”
나루가 윤영을 향해 돌아섰다.
“네가 날 싫어하는 거 알아. 하지만 나는 네가 아주 많이 좋아.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없더라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짜악―!
나루는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윤영이 나루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다.
윤영 자신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지, 윤영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가식 떨지 마. 나는 너랑 있으면 미쳐 가는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좀 나한테 상관하지 마. 제발.”
윤영은 신경질적으로 나루의 어깨를 밀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본의 아니게 나루의 뺨을 때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뺨을 때린 후였다.
‘화가 나서 때린 게 아니었어.’
무섭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날지도 몰라.’라는 예언 같은 말보다, ‘나는 네가 아주 많이 좋아.’라는 말이 더 무서웠다.
진심을 가득 담은 눈빛이, 오래전 지후가 지었던 눈빛과 똑같은 그것이 무서워서 뺨을 때리고 말았다.
‘어째서? 왜 그런 눈빛들을 하는 거야? 그리고 왜…….’
꿈을 꾼다.
지후, 나루와 멀어졌음에도 현실 같은 그 꿈을 매일 밤 꾸고 있다.
꿈에서 나루 커플과 셋이 놀러 가기도 하고, 나루와 단둘이 쇼핑을 하기도 하고, 재경까지 넷이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자꾸만 꿈에서 경험하게 된다.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상실감과 어쩌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혼란과 자꾸만 반복되는 꿈으로 인한 공포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언젠가 정말로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게 될까 봐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될까 봐서.
그러다 연나루라는 인간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될까 봐서.
* * *
“실패한 것 같아.”
라고 나루는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라고 지후는 말했고.
“윤명진, 너는 쓸데없는 짓 안 하는 게 좋겠다.”
라고 재경이 말했다.
명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 안 해. 나도 내 마지막 여름 방학을 제대로 즐겨야지.”
거짓말이었다.
처음부터 나루가 윤영을 설득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윤영 가족의 휴가에 따라갈 계획을, 이미 세워 놨다.
방학 첫 날부터 여행을 가진 않을 것이다. 동생이 고등학생이니까, 7월 중순 즈음 움직이면 되리라.
그때부터 이른 아침 윤영의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기다리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알게 되면 나루가 말릴 것이 분명했기에, 명진은 그 계획을 조용히 실행에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구할 거야.’
구하고 말 테다.
‘죽음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어.’
그리고 내년 봄.
‘나는 살아남을 거야.’
* * *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나루는 본가로 돌아왔다.
나루의 본가와 지후의 본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 30분 거리였다.
아주 멀리 사는 것도 아닌데, 바로 옆집에 살 때처럼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누난 좋겠다. 벌써 방학이라서.”
일요일 오후.
밤새 게임을 하다가 늦게 일어난 미루가, 배를 긁적이며 거실로 나왔다.
나루는 소파에 앉아 TV 채널을 바꾸는 중이었다.
“요새 뭐 재미있는 거 안 하나?”
“이 시간엔 별로 안 하지. 재방송이나 봐.”
“뭐가 있지?”
12년 전 TV에서 뭘 했는지 기억날 리 없었다.
“누나, 그거 좋아하잖아. 토요일에 하는 거. 그…… 무슨 작대기인가?”
“아, 그거. 맞다. 그거 봐야지.”
나루는 TV 채널을 변경했다.
나루가 이 당시에 즐겨 보았던 예능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32살 때에 봤던 것보다 훨씬 젊어진 연예인들, 어느 순간부터 TV에 나오지 않게 된 연예인들을 다시 보는 게 신기했다.
한참 그렇게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 왔나 봐. 나가 봐.”
“아, 누나가 나가.”
“얼른 좀 나가 봐. 저녁 사 줄 테니까.”
나루가 옆에 앉아 있는 미루를 발로 밀었다.
“에이 씨. 지는 방학도 했으면서.”
미루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나루가 하품을 하며 지후에게 문자라도 보내 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거칠게 현관문이 열리고 미루가 뛰어 들어왔다.
“뭐야, 누나! 남자야, 남자!”
“어?”
“남자가 찾아왔어! 누나 남친 있었어?”
“남자라니…….”
“민지후라던데. 우와, 키 엄청 크더라. 되게 잘생겼던데. 아, 그리고 성재경인가? 우와, 나 진짜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봤어. 연예인이야? 뭐야? 진짜 남자 친구야? 둘 다 사귀는 중? 바람? 양다리?”
“……저기, 미루야. 좀 진정할래?”
“아, 신기하니까 그렇지. 진짜 잘생겼던데.”
나루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옛 시간에서 지후와 재경은 이 집에 자주 찾아왔었다. 첫 방문도 아마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자주 드나들며, 나루의 가족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미루는 이런 반응이었지.’
똑같은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미루가 뒤를 졸졸 따라왔다.
“넌 왜 따라와?”
“잘생긴 형들 얼굴 좀 더 구경하려고.”
“넌 진짜 변함이 없구나.”
“변하긴 뭘 변해. 얼마나 집 떠나 있었다고.”
대문 밖에서 지후와 재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루는 나루의 뒤에 숨어(옛 시간에서도 그랬다.) 지후와 재경의 얼굴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옛 시간에서 미루와 친하게 지냈던 지후는, 오랜만에 보는 미루의 어린 모습이 귀여운지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와, 네 동생은 너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미루를 처음 보는 재경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응, 그런 말 많이 들어. 그런데 둘 다 어쩐 일이야?”
“저기요.”
미루가 끼어들었다.
“둘 중 누가 우리 누나 남친이에요?”
“내가.”
지후가 곧바로 대답했다.
“우와. 왜죠? 왜 하필이면 우리 누나죠?”
“야, 연미루.”
“아, 왜. 진짜 궁금해서 그래. 성질머리도 더럽고 까탈스러운데, 왜 좋아하는 거지? 정말 좋아하는 거 맞아요? 약점 잡힌 건 아니고?”
“야, 너…….”
“세상에서 제일 예뻐서.”
지후가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평생 내 눈이 즐겁고, 내 마음이 즐거울 것 같아서. 그래서 사귀는 거야.”
지후의 감미로운 말에, 미루가 얼굴을 붉혔다.
“웬일이야. 이 형, 너무 멋있다. 아, 뭐야, 설레.”
미루가 호들갑을 떨며 안으로 들어갔고, 재경은 살짝 벌어진 입으로 지후를 돌아봤다.
이놈은 어떻게 된 놈이기에, 이런 야릇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가, 라는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너의 뻔뻔함이 무서울 정도라서. 안 무섭냐, 나루야? 이런 소리를 네 동생 앞에서도 막 하는데?”
재경이 나루를 돌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나루가 홍조 띤 얼굴로 황홀하게 지후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근묵자흑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겠지. 연나루를 빨리 포기하길 잘했네. 난 이런 건 도저히 못 하겠으니까. 아무튼 빨리 분홍빛 공기에서 좀 벗어날래? 여기 나도 있거든?”
서로를 응시하는 지후와 나루 사이에서, 재경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나루가 수줍게 웃으며 재경을 돌아봤다.
“아, 응. 미안. 그런데 정말로 둘 다 어쩐 일이야?”
“너네 옛 시간에서 우리가 종종 너네 집에 놀러 갔다더라고. 원래 너희 부모님이랑도 입학식 때 만나서 친해졌다며?”
“응, 그랬었어.”
“그거 다시 해야지. 부모님 계셔?”
“아니, 오늘 늦게 들어오신댔는데. 일단 들어와. 미루도 있으니까 같이 점심 먹고 놀자.”
* * *
그날 이후로도 재경과 지후는 종종 나루의 집에 놀러왔다.
밖에서 지후와 둘이 만나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재경과 셋이 만나 놀러 가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미루가 여름 방학을 했고, 나루의 가족도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윤영의 동생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자꾸만 그쪽으로 흘러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나루의 가족이 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름 방학 잘 보내고 있냐?]
“응, 넌 뭐하기에 연락이 안 돼? 문자 보낸 것도 다 씹고.”
[그냥 좀 그럴 일이 있어서. 서울 올 일 없냐? 저녁이나 같이 먹자.]
“서울 갈 일은 없지만 저녁은 같이 먹자. 학교 근처에서 볼까?”
[아니, 이 동네 좀 벗어나고 싶어. 강남에서 보자. 지후랑 재경이도 시간 되면 부르고.]
“응, 이따 봐.”
명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윤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러고 보니, 처음 윤영이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명진이 자기가 쫓아다니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음이 급해져 지후와 재경에게 연락을 해 두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다들 약속 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근처에 보이는 술집으로 향했다. 지하에 있는, 어둑한 술집이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나루들뿐이었다.
“오토바이 안 타고 왔냐?”
주문을 하기 전, 지후가 명진에게 물었다.
“응, 오늘은.”
“그럼 술 시킨다?”
“어, 난 생맥.”
끼니를 때울 만한 안주 몇 개와 생맥주, 소주를 시켰다.
먼저 나온 술을 홀짝거리며, 나루는 명진의 안색을 살폈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재경도 그걸 느낀 듯 명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너, 설마 윤영이네 가족 휴가에 따라갔었던 거냐?”
나루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후도 놀란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려고 했지.”
명진은 고등학교 방학 날부터 매일 윤영의 집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음을 털어놨다.
“새벽 4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있었어. 요새 진짜 3, 4시간도 못 잤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 죽을 것 같이 졸려서 알람을 못 들었어. 6시쯤 깨어나서 부리나케 나왔는데…… 놓친 것 같아.”
“놓치다니. 윤영이네가 오늘 휴가를 갔다고?”
“응. 걔네 아버지 차가 집 앞에 주차되어 있거든. 타고 나가시는 게 보통 7시 50분쯤인데, 6시에 갔더니 그 차가 없더라. 하필이면 내가 늦잠을 잔 날에, 휴가를 떠난 것 같아.”
“휴가를 간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애들 여름 방학 때 새벽 6시 전부터 출발할 일이, 휴가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친인척의 경조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글쎄. 내일 밤에 가 보면 답이 나오겠지. 친인척의 경조사 때문에 회사를 며칠씩 결근하진 않을 테니까.”
나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명진이 매일 윤영의 집 근처에 있을 때는 잠잠하다가, 하필이면 명진이 늦잠을 잔 날에 여행을 떠났다면.
“죽음은 명진이가 윤영이 동생을 구할 기회도 주지 않으려나 보군.”
지후가 중얼거렸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모순된 말이지만, 죽음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체를 가진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어느 때든 집어삼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재경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입을 열었다.
“바다나 가자.”
“바다?”
“그래, 여름이잖아. 죽음을 피할 수 있든, 없든. 이런 식으로 우울해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낭비야. 지후가 12년 후에 죽는다면, 지금 추억을 잔뜩 만들고, 명진이가 내년에 죽는다면 이렇게 우울할 시간에 뭐라도 하나 더 해야 하지 않겠어?”
명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죽음을 그렇게 발랄하게 얘기하니까 안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야.”
“그래, 안 죽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우리, 바다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