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가장 달콤한 노래
2018.01.29.
나루가 바닥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더니, 지후는 나루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잘 생각해 봐. 요리하고 있을 테니까.”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난 알고 있다니까.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지?”
“나는 알고 있네요.”
지후는 씩 웃어주고는 봉지 안에서 식재료를 꺼냈다.
오늘은 나루가 좋아하는 해물떡볶이와 닭갈비를 할 예정이었다.
재료를 손질하는 와중에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괜히 고집을 부리는 나루가 귀여웠다.
나루가 지후에게 사랑을 느낀 순간을, 지후는 알고 있었다.
20대의 풋풋했던 시절.
사랑은 처음인지라, 지후는 어떤 식으로 나루에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섣부른 고백으로 좋은 관계를 망치고 싶지도 않아, 조심스럽게 나루의 곁에 머물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곁을 서성이며, 행여나 그녀에게 먼저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을까 봐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예쁘고 당당한 그녀는 항상 인기가 많았고, 그녀를 노리는 남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찰싹 붙어, 그녀에게 친근한 척하는 남자가 있을 때마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곤 했다.
민지후가 연나루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지나가던 개까지 알 정도였지만 나루만 몰랐다.
2학년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어느 날.
지후는 도서관에서 나루가 엎드려 자고 있는 걸 보았다.
조금 추운지 옹송그리고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등에 재킷을 걸쳐주었다.
그걸 느낀 듯 나루가 잠에서 깨어났고, 뒤를 돌아봤다.
입가에 침이 묻어 있기에, 엄지로 슬쩍 닦아주고 작은 목소리로 “더 자.”라고 말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루가 지후에게 사랑을 느낀 건.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른 색채를 띠며 일렁, 흔들리는 장면을 지후는 똑똑히 목격했다.
커지는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 볼에 번지는 복숭아 빛 홍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후는 확신했다.
바로 지금, 연나루도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곧바로 나루는 당황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고, 벌떡 일어나 “커피 한 잔 마시자.”라며 열람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나루가 그때부터 사랑을 자각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후는 그때부터일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확신하면서도 고백하지 못한 이유는, 군대 때문이었다.
나루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2학년 때 가려던 군대를 1년 더 미뤘다. 나루가 3학년 때, 지후는 군대에 갈 예정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20대 초반, 그 좋은 시절. 남자 친구를 기다리며 2년을 보내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루에게 고무신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고백을 군대에 다녀온 후로 미뤘다.
그 전에 나루에게 연인이 생길까 봐 불안했지만, 그 불안 때문에 나루에게서 20대를 즐길 자유를 빼앗기는 싫었다.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는 느낌에, 지후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루가 지후의 뒤에서 지후를 안고, 그의 등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요리를 할 때면, 나루는 종종 이렇게 뒤에서 안아주곤 했다. 그래서 요리를 하는 시간이 더 즐거웠다.
“지후야.”
“응?”
“고집 그만 부리고 맞춰 봐.”
“뭘?”
“내가 너한테 반한 순간.”
“고집은 네가 부리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나는 알고 있다고.”
“그래? 그럼 그냥 나는 모르는 걸로 하자. 난 모르겠으니까 말해 줘. 언제, 어떤 이유로 나한테 반했는지.”
“으으.”
보지 않아도, 나루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볼에 공기를 넣어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을 것이다.
심술이 날 때마다 짓는 그 표정을, 지후는 몹시도 사랑했다.
“말 안 해 줄 거야.”
“응, 그럼 말해 주지 마.”
“알고 싶지도 않아?”
“뭐, 난 아니까. 알고 싶은 건 너겠지.”
그렇게 말다툼을 하는 동안, 요리는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치사하다, 민지후. 알겠어. 내가 졌어. 나 모르겠으니까 말해 줘. 내가 대체 언제 너한테 반했는데?”
“그건…….”
지후가 말해 주려고 돌아설 때였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고.
“으아, 배고파!”
“맛있는 냄새!”
재경과 명진이 들어왔다.
“애들 왔네. 나중에 말해 줄게.”
지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루는 도끼눈을 하고 눈치 없는 두 남자를 노려봤다.
그저 배가 고팠을 뿐인데, 나루의 원망스런 시선을 받은 두 남자는 두 손을 슬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겠어, 알겠어. 네가 제일 많이 먹게 해 줄게.”
* * *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녁을 먹고 나서 윤영의 동생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자, 지후가 말했다.
“어차피 구할 수 없을 거야.”
“윤영이가…… 많이 힘들어했었어. 여행 가는 길에, 동생이랑 엄청 싸웠나 봐. 휴게소에서 언성 높이며 싸우다가 동생한테 죽어 버리라고 했대. 그래서 진짜 죽은 것 같다고.”
펑펑 울던 윤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많이 울었어. 죄책감도 계속 가지고 있었고. 동생 죽고 나서 부모님들 관계도 안 좋아지고, 윤영이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했어. 몇 년 지나서 괜찮아지긴 했지만, 아마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겠지. 계속 우울한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게 미안해서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나는 잊은 거였고.”
나루는 한숨을 쉬었다.
“난 정말 왜 이런지 몰라.”
“보통 그렇지, 뭐. 자기 일이 아닌 이상에야.”
명진이 중얼거렸다.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어. 사실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는데, 최근에는 좀 고민이 되기도 해. 나랑 지후랑 멀어지면서 윤영이가 원래대로 돌아왔거든. 우리가 가까이 하는 게 윤영이한테 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윤영이한테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아.”
“그래도 말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재경이 말했다.
“동생의 죽음은 평생 가슴에 품고 갈 일이잖아. 말해 주고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못 구해. 죽을 사람은 죽게 되어 있어.”
지후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명진이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난 지금 나루와 또다시 12년을 보내는 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12년 후에도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우린 죽을 거야.”
“너, 이렇게 부정적인 놈이었냐?”
재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부정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거야. 헛된 희망을 품어 봐야 희망이 무너졌을 때 괴로울 뿐이야.”
“아, 됐고. 말해.”
명진이 듣기 싫다는 듯 말했다.
“나루 말대로, 김윤영이 너희와 가까워져서 좋을 게 없는 건 맞아. 그런데 말해 줄 건 해 줘야지. 구하든 구하지 못하든,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냐? 선택은 김윤영이 하게 해 주는 게 옳다고 본다, 나는.”
“응, 나도 명진이 생각에 동의해. 선택은 김윤영이 해야지. 지후처럼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든,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든, 그건 김윤영이 판단해야 할 몫이라고 봐.”
“만약 김윤영이 믿지 않으면?”
지후가 말했다.
“나루가 말해 줬는데도 믿지 않고 무시하다가 동생이 진짜로 죽으면? 그때 윤영이가 느낄 절망은 어쩔 건데?”
아무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지금 김윤영 가족이 어디로 휴가를 갔는지, 언제 갔는지 모르고 있어. 윤영이한테 물어봐도 말해 주지 않겠지. 그럼 윤영이를 계속 미행할 생각이냐? 미행한다고 해도 어떻게 따라갈 건데? 우리 중에 면허 있는 사람 있어?”
“나.”
명진이 손을 들었다.
“오토바이 면허는 있는데.”
“오토바이 타고 그 집 휴가 가는 걸 따라가게?”
“그러지, 뭐.”
명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절박하거든.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고.”
명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지후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넌 12년 남았지만, 난 1년이야. 아, 이젠 1년도 아니구나. 몇 개월 후면 나, 죽어. 죽는대. 솔직히 무서워. 왜 내가 죽어야 하나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래서 미리 좀 알고 싶어. 죽음을 피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명진아…….”
“아, 됐어. 그런 표정들 짓지 마라. 울적한 건 나 혼자로 됐고, 니들까지 그럴 필요 없어. 어쨌든 난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봐. 나루가 일단 윤영이한테 그런 뉘앙스를 흘리기라도 하고, 정 안 믿는 눈치면 내가 김윤영네 집 근처에 있다가, 걔네 휴가 갈 때 따라갈게. 걔 동생 물에 빠지면, 내가 구하지, 뭐.”
“그러다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지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럼 죽지, 뭐. 몇 개월 후에 죽으나, 지금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야.”
나루가 명진과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마찬가지 아니야. 그 몇 개월은 너한테도, 네 가족들한테도 소중한 시간이야. 명진아. 그 몇 개월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
나루의 맑은 눈동자를 이길 수 없어, 명진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곧 쓰게 웃으며 명진이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조심해서 행동할게. 그러니까 이 일은 윤영이한테 기회를 주는 걸로 하자. 다수결로 해 보든가.”
여기서 윤영에게 말하는 걸 반대하는 사람은 지후뿐이었다.
모두가 지후를 돌아보자, 지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걱정이 되는 거지, 완전히 반대를 하는 건 아니야.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본다. 어차피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는 것 같으니까.”
* * *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윤영이에게 말하겠다고 결심하기는 했는데,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윤영은 나루와 지후를 유령 취급하고 있었다.
실험실 같은 조인데도, 나루와 지후에게는 아예 말을 걸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윤영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응, 지후야.”
[잠 안 오지?]
“응.”
[그럴 것 같더라.]
그의 나직한 음성을 듣자마자 잠이 쏟아졌지만,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내색하지 않았다.
“노래해 줘.”
[그럴까? 뭐 불러 줄까?]
“아무거나. 네가 잘 부르는 노래로.”
[그럼 애국가?]
지후의 대답을 듣자 옛 시간의 일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지후는 음주 가무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노래를 잘하는 편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루가 갑작스럽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노래? 이렇게 갑자기?
난처해하는 지후의 모습이 귀여웠다.
―응, 듣고 싶어. 아무 노래나 좋아. 네가 제일 잘 부르는 노래로 불러 줘.
그러자 지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흠흠, 목을 가다듬고 부르기 시작했다. 애국가를.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설레는 관계.
당연히 사랑 노래일 줄 알았는데, 너무도 예상치 못한 노래가 나오는 바람에 엄청 웃었던 게 기억났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배까지 잡고 웃었는데, 성실한 지후는 애국가 1절을 끝까지 다 불렀다.
그리고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노래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아, 이 남자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순간,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하리라는 걸 확신했다.
그 어떤 역경이 찾아와도, 애국가 1절을 끝까지 불러 주는 이 남자라면 내 손을 놓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루와 함께했고, 나루의 걱정만을 했다.
“응, 애국가. 그거 듣고 싶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를 들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멋없는 애국가이겠지만, 나루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사랑 노래고, 가장 달콤한 음악이었다.
나루는 그의 노래를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지후는 나루가 잠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노래를 멈추고 잠시 그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넌 내 수면제야.
함께 잘 때면, 나루는 지후의 품으로 파고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졸음이 잔뜩 묻어 나른한 그 목소리를 듣는 게 참 좋았다.
꼬물꼬물 품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자그마한 고양이 같아서 기분 좋았다.
“나루야.”
그 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리며, 지후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 * *
윤영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기말고사를 보게 되었고, 나루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방학이다.
지후는 이 일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말하지 못하면 그건 그것대로 운명인 거겠지.”
지후는 회의적이었고, 말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재경과 명진도 딱히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윤영이 지후, 나루만큼은 아니지만 재경과 명진도 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미래를 보고 왔는데, 네 동생이 죽더라.’라는 말을 해 봐야,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 뻔했다.
마지막 시험이 있는 날, 시험 하나를 끝내고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볼일을 보고 나와서 손을 씻는데, 윤영과 선미, 지영이 들어왔다.
“우린 계곡에 가기로 했어.”
여름 방학 계획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나 보다.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윤영과 거울로 눈이 딱 마주쳤다.
윤영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고, 선미와 지영은 나루에게 아는 체를 했다.
“나루, 시험 잘 봤어?”
“그냥 그래.”
나루는 대답을 하면서도 윤영을 응시했다. 윤영은 도망치듯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냥 그렇긴. 과 수석이잖아. 이번에도 수석 하는 거 아냐?”
“아, 나도 그런 거 한 번 해 보고 싶다. 대학도 간당간당하게 들어왔는데.”
“나도, 나도.”
선미와 지영이 재잘재잘 떠들다가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 기회였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나루는 세면대 앞에 조용히 서서, 윤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