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지켜줄게
2018.01.22.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나루는 차게 식은 손가락을 다른 쪽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쿵, 쿵, 쿵, 아플 정도로 뛰었다.
차와 차가 부딪치는 소리, 비명 소리, 수많은 소리들이 여전히 고막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소리에 뇌가 울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누군가가 날 죽이려고 했어.”
나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 내 등을 떠밀었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명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루를 응시했다.
“확실해?”
“확실해. 등에 아직도 누가 밀었을 때의 감촉이 남아 있어.”
등골이 서늘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버스에 닿기 전, “연나루!”라는 외침과 함께 명진이 나루를 끌어당겼다.
버스는 방향을 틀었고, 중앙선 반대쪽에서 달려오던 차와 세게 부딪쳤다.
버스와 충돌한 차는 소형차라, 버스에 깔리다시피 했다.
피가 흘렀고, 비명이 들렸고, 그 수많은 소리들을 헤치고 명진은 나루를 안듯이 부축해 조용한 곳으로 들어온 터였다.
“죽었겠지? 자동차에 타고 있던 사람.”
나루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 탓이 아냐.”
“알아. 그런데…… 죽었겠지?”
“그건 모르겠다.”
“나, 진짜 죽을 뻔했어.”
“응.”
“네가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 난 죽었을 거야.”
“응.”
“대체 누구지? 누가 내 등을 민 걸까?”
나루는 혼란스러웠다.
명진은 걱정스럽게 나루의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나루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카페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루는 휴대폰이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후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루야!]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지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응, 지후야.”
[뭐야? 나루 전화 받아? 받은 거야?]
[어, 받았어.]
[어디래? 괜찮대? 안 다쳤대?]
[잠깐만. 나루야, 너 어디야?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나 지금 학교 맞은편 카페야.”
[그럼 우리가 거기로 갈게.]
“응.”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니 지후와 재경도 사고 소식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명진이 나루의 이름을 부르는 걸, 누군가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 보니, 좀 진정했나 보네.’
떨림은 멎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차가웠다.
“지후랑 재경이, 여기로 온대?”
명진이 물었다.
“응.”
“그래. 오면 얘기하자.”
“응.”
나루는 명진을 빤히 응시했다.
“왜?”
“너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거야. 네가 내 목숨을 구했어.”
“뭘 그렇게 거창하게 그러셔.”
“거창한 게 아냐. 내가 널 구하려고 했는데, 네가 날 구했어.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너한테 계속 도움만 받는 것 같아. 정말 고마워.”
명진이 빙그레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후와 재경이 도착했다.
커피숍 문을 부서질 듯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은 나루를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둘은 나루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까의 사고에 대해 들었다.
“누가 널 밀었다고?”
지후가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
“응, 날 밀었어. 착각이 아니야.”
“그래, 그런 걸 착각하진 않겠지. 그런데 대체 누가?”
재경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모르겠어.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김윤영 아냐?”
라고 물어본 건, 명진이었다.
“어?”
“김윤영이 널 민 거 아니냐고.”
“설마…….”
“설마가 아니지. 지금 널 싫어하는 사람, 널 죽이고 싶어 할 사람, 걔밖에 없잖아.”
“아니, 그럴 리 없어.”
나루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살다 온 시간의 김윤영은 너랑 친했을지 모르지만, 여기선 아냐. 그 시간과 이 시간을 다르게 생각해야 돼. 잘 생각해 봐. 김윤영이 정말 아닐 거라고 확신해?”
명진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루는 눈을 감았다.
몇 시간 전, 윤영은 나루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응, 아니야.”
다시 눈을 뜬 나루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시간의 윤영이가 나의 윤영이랑 다르다는 거, 인정하고 있어. 그래도 아니야. 윤영이는 그런 짓을 할 리 없어.”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네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또 있을 리 없잖아.”
“있을 수도 있지.”
재경이 중얼거렸다.
“누구? 너냐?”
명진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재경이 씩 웃었다.
“나는 알리바이가 있어. 그 시간에 친구랑 같이 있었거든. 아무튼 나루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거, 다들 잊은 거야?”
“그게 대체 누군데?”
“너희들의 시간에서, 연나루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아……!”
생각도 못 한 인물들의 등장에, 나루와 지후, 명진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연나루랑 민지후가 돌아왔어. 어쩌면 그 사람들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럴 리가. 이런 게 그렇게 쉽게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그래, 쉽게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 나는 아직도 긴가민가하니까. 하지만 너희에게 벌어진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야. 애초에 너희가 이 시간으로 돌아온 정확한 이유를 아직도 알지 못하잖아.”
“…….”
“어쩌면 그들도 왔을지 몰라.”
심장이 콱 죄었다.
나루는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새된 신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 시간으로 돌아와 지후 역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도 돌아왔을 가능성을 알게 되자 더 불안해졌다.
스멀스멀 잠식하는 어두운 공포에 다시금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차게 식은 나루의 손을 지후가 꽉 잡았다.
그의 손은 늘 그렇듯 따뜻했다.
“괜찮아, 나루야.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래, 이건 가능성일 뿐이야. 하지만 염두에 둬야 할 일이기는 해.”
명진이 말을 받았다.
그동안 계속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준 명진까지 그리 말하니, 거의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루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계속 불안에 떨 시간은 없었다.
나는 오늘 죽을 뻔했고, 어쩌면 나를 죽이려다가 지후를 죽인 사람들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날 죽이려는 무리들이 누군지를 알아내야 돼.”
떨림이 멎었다.
“오늘 사고가 있었어. 경황이 없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긴 했지만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나는 경찰서에 가서 사실대로 다 이야기할 거야. 그러면 누가 밀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라.”
“괜찮겠어?”
“괜찮지 않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리고.”
나루는 지후를 돌아봤다.
해야 할 일을 찾은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지후야. 이 시간에서는 절대로 날 구하려고 들지 마. 나는 조심할 거지만, 혹시라도 위험이 닥치면 그냥 도망쳐.”
지후가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알잖아.”
“알아.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어. 너 없는 세상에, 날 혼자 두지 마.”
“너 없는 세상에, 내가 혼자인 건 괜찮고?”
“어차피 죽어야 할 사람은 나였잖아. 넌 날 구하다가 죽은 것뿐이고. 나는 네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돼.”
“그럼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나는 내가 널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겠지.”
“지후야…….”
“적당히들 해라.”
명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번엔 위험을 자각하고 있잖아. 둘 다 안 죽으면 되지. 둘 다 안 죽는 방향으로 연구해 보자고.”
* * *
얘기가 끝나자마자 나루와 명진은 사고 장소로 향했다.
사고 장소에서 버스와 차는 사라졌지만, 경찰들은 남아 있었다.
나루는 경찰에게 자신이 아까 버스 앞으로 밀린 사람이라고 말했고,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나루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우선은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다.
나루는 괜찮다고 했지만 명진은 굳이 나루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지후가 빌라 앞에서 나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다.”
지후가 명진에게 말했다.
“별말씀을. 좋은 시간 보내셔들.”
명진은 툭 내뱉듯이 말하고 돌아섰다.
명진이 돌아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지후는 나루의 손을 꽉 잡았다.
“지켜줄게.”
지후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루는 고개를 들어 지후와 눈을 맞췄다.
“나도. 나도 널 지켜줄게.”
* * *
Y대 앞에서 벌어진 버스와 승용차의 사고 이야기는 뉴스에도 나왔다.
승용차에는 남편과 아내, 갓 돌이 지난 아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앞좌석에 있던 남편과 아내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아들은 경상이라고 했다.
[미리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이른 아침 전화를 건 명진이 말했다.
[버스 앞으로 Y대 학생이 뛰어드는 바람에 버스가 피하려고 방향을 틀어서 벌어진 사고라는 것도 나왔어. Y대 학생이 너라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야. 학교 분위기가 별로 안 좋을지도 몰라.]
“응, 알려줘서 고마워.”
[오늘은 수업 안 들어오는 거 어때?]
“그럴 순 없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물론 그렇긴 하지만.]
나루는 명진의 걱정스러운 인사를 받으며 전화를 끊었다.
착잡한 기분으로 끊긴 휴대폰을 응시하다가 일어났다.
‘누군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해. 내가 죽지 않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죽었어.’
명진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지만, 가슴이 미어졌다.
‘옛 시간에서도 그랬어. 내가 사는 대신, 지후가 죽었지. 이 시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
대체 누굴까.
누가 나를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걸까.
‘옛 시간에서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 시간으로 따라온 거라면,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옛 시간에서는 그걸 파악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단체가 저지른 일인지, 개인이 저지른 일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나 좀 위험한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후가 죽었고 이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옛 시간에 있던 단체가 지금도 있으리란 법도 없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네.’
경찰이 나루의 등을 떠민 사람을 찾아준다면 다행이지만, 나루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는 아직 CCTV가 여기저기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찾아야 돼.’
그리고 그 인물을 처리해야 한다.
‘처리라.’
나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과연 그걸 할 수 있을까?’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저 연구를 좋아하고 한 남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런 일들은 그저 영화나 소설에서만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상대를 찾아낸들, 내가 죽일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지후가 하겠지.’
지후의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다.
‘이건 내 문제야. 나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야. 그러니까 내가 해야 돼. 그전에 날 죽이려는 사람들을 찾는 게 우선이지만.’
* * *
윤영은 눈을 번쩍 떴다.
흐르는 눈물에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꿈에서 울고 있는 나루를 보았다.
핏기가 가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나루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프고 또 아파서, 윤영도 울었다.
감히 위로해 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서러워서 속상해서 계속 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깼는데도,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아는데도, 계속 슬퍼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이래, 정말…….”
윤영은 흐느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정말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거야! 그만 좀 하라고! 제발 좀 그만하란 말이야!”
* * *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명진이 경고한 대로 시선이 곱지 않았다.
쟤 때문에 사람이 죽었어.
우와, 그런데도 뻔뻔한 얼굴로 학교를 오네.
그 애기가 불쌍해.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를 다 잃은 거잖아.
쟤 하나 때문에 무슨 일이야.
버스 승객들도 다친 사람이 있대.
비난이 섞인 눈빛이 사정없이 나루에게 꽂혔다.
나루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경과 지후, 명진에게는 도우려 하지 말라고 말해 둔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루를 거드는 사람이 있어 봐야 분위기만 더 악화될 뿐이다.
이런 비난들은 시간이 지나 진실이 밝혀지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진실이 밝혀질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나 때문에 사고가 벌어진 건 사실이다.
나루는 앞으로 그들의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것이고, 그로 인한 비난 또한 오롯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살인자.”
누군가 나루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뻔뻔하다, 뻔뻔해.”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멀쩡한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래 놓고 지는 살았잖아.”
“그 애는 쟤 때문에 고아가 됐잖아. 너무 불쌍해.”
“엄마, 아빠 얼굴도 모르고 살겠네.”
“아니, 대체 왜 버스 앞으로 뛰어든 거야?”
“무단 횡단이지, 뭐.”
“미친 거 아냐, 거길 어떻게 무단 횡단 해? 차들이 얼마나 빨리 달리는데.”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나루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벌떡 일어나려는 지후를, 재경이 간신히 붙잡아 앉혔다.
이 상황에서 지후가 나루를 두둔해 봐야 좋을 것이 없다.
지금은 나루가 조용히 견뎌내야 할 때였다. 이미 그러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적당히들 좀 해!”
버럭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