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축제, 그리고
2018.01.18.
봉사 동아리 사람들은 수화 공연을 끝내고 간단하게 뒤풀이를 한 후에, 각자 축제를 즐기기 위해 흩어졌다.
명진은 사람 많은 게 싫다며 집으로 가 버렸고, 지후와 재경, 나루만 남았다.
“너희 둘이 놀아라. 난 빠져줄게.”
재경이 담백하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나루가 재경의 팔을 잡았다.
“빠지긴 뭘 빠져. 같이 다녀.”
“아, 왜? 난 커플 사이에 끼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아.”
“옛 시간에서는 셋이 다녔다고.”
“됐어, 지금이 옛 시간도 아니고. 아까 지후한테도 말했지만, 너희들은 옛 시간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어. 여긴 옛 시간이랑 달라. 안 그래? 너희가 여기로 돌아온 그때부터, 여긴 다른 세상이 된 거야.”
재경의 말이 옳았다.
옛 시간과 비슷하게 흘러가기는 하지만, 달라진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윤영과의 관계도 그렇고, 선미와 지영의 관계도 그랬다. 그리고 명진도.
재경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재경이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상큼하게 웃었다.
“옛 시간에서 이 시기에는 사귀지 않았지? 연인으로서 대학 축제 즐기는 건 처음이겠다. 데이트나 실컷 해.”
재경이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게 되니 괜히 어색하고 수줍었다.
재경의 말대로 대학생의 신분으로 지후와 둘이 축제를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음, 그럼 가 볼까?”
지후의 말에 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후가 손을 내밀려다가 멈칫하고는 거둬들였다. 아직은 손을 잡고 다닐 만큼 공개적인 사이가 아니었다.
당연한 듯 나루의 손을 잡고 걸었던 일이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루는 아쉽지도 않은지, 혼자서 씩씩하게 잘 걷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지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왜 웃어?”
“그냥, 좋아서.”
무심코 내뱉은 말에 나루의 양 볼이 붉어졌다.
하얀 얼굴에 분홍빛 물감을 떨어뜨린 듯 홍조가 번졌다.
“뭐야, 갑자기. 쑥스럽게.”
“네가 그렇게 쑥스러워하니까 나도 괜히 쑥스럽다.”
“우리 원래 이런 얘기 엄청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는데.”
“응, 그랬지.”
“대학생인 너한테 이런 얘기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응, 나도. 하지만 늘 말하고 싶었어.”
“뭘?”
“좋아한다고. 옛 시간에서 이 나이 때에도, 나는 늘 말하고 싶었어.”
나루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늘 궁금했어. 나를 왜 좋아하게 된 거야?”
이 시간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 물어볼 수 없어서 답답했던 질문을 이제야 비로소 던졌다.
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루를 응시했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보자, 옛 시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우와, 너네! 진짜 키 크다!
나루는 검지로 재경과 지후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동그란 눈과 발그레한 볼, 살짝 벌어진 촉촉한 입술.
―으아, 맞다. 초면에 삿대질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
재경과 지후가 아무 말이 없자, 나루는 당황하며 얼른 손가락을 내렸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심장이 두근, 두근, 두근, 격하게 고동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처음부터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녀를 향한 감정이 헷갈린 적도, 무뎌진 적도 없었다.
늘 처음처럼 똑같이 그녀를 사랑해 왔다.
지후가 첫 만남을 떠올리는 동안, 나루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지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후는 씩 웃으며 말했다.
“비밀이야.”
“뭐?”
“비밀이라고.”
“뭐야, 치사하게. 알려 줄 수 있잖아.”
“한 번 맞춰 봐.”
“첫눈에 반한 거지?”
“그런가?”
“뭐야, 왜 말 안 해 주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어려워. 그런 말 하는 건 쑥스러우니까.”
지후가 걸음을 옮겼다.
나루는 총총총 지후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졸랐다.
“쑥스러워할 거 없어. 안 놀릴게. 말해 줘.”
“너한테 반한 게 놀림 당할 일은 아니잖아.”
“놀릴 수도 있지. 난 어디서든 놀림 포인트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래, 그럼 그 포인트 못 찾게 말 안 해야겠다.”
“아, 진짜 치사하네. 궁금하다고.”
“쭉 궁금해 해.”
입술을 비쭉 내밀고 따라오는 나루가 귀여웠다.
나루는 기분이 상하면 입술이 먼저 튀어나왔고, 그래서 지후는 늘 그녀가 말하기 전에 그녀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지후가 기분을 풀어주고 나면 나루는 항상,
“그런데 내가 기분 상한 건 어떻게 알았어?”
라고 물었지만, 지후는 말해 주지 않았다.
너, 얼굴에 기분이 다 드러나.
둘만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던 시간은 잠깐이었다.
노천극장으로 향하다가 주점을 하고 있던 과 선배들에게 붙잡혔다.
선배들은 서빙 할 사람이 부족하다며, 나루와 지후에게 강제로 일을 떠맡겼다.
억지로 앞치마를 두르다가 저 멀리 걸어가는 재경을 발견했다.
재경은 ‘꼴좋다.’는 표정을 지어 준 후, 나루가 부르기 전에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났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주점 쿠폰을 구입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대부분 지인들에게 쿠폰을 팔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찾아올 때마다 쿠폰을 판 사람이 상대를 해 줘야만 했다.
‘나도 애들한테 쿠폰 좀 팔 걸 그랬나.’
요리를 할 인원이 부족해서 주방 쪽을 도우려니, 요리 못하는 나루로선 죽을 맛이었다.
“내가 할게.”
어설프게 주방 일을 돕는 나루를 보다 못한 지후가 말했다.
지후에게 식칼을 넘겨주려고 할 때, 기다렸다는 듯 지후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민지후!”
“역시 키가 크니까 딱 보이네.”
“것 봐, 내가 한 번에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옛 시간에서 몇 번 만난 적 있는, 지후의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지후가 미안한 듯 나루를 돌아봤다.
“괜찮아,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
“손 안 베이게 조심해.”
“응, 걱정 마. 내 몸은 내가 지키니까.”
지후가 친구들에게로 향했다.
저 친구들은 아직 연나루의 존재를 모른다.
나루는 신기한 기분으로 지후 친구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양파를 썬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자 선배가 나루의 옆으로 다가왔다.
“나루야, 이거 내가 할 테니까 마트 가서 고기 좀 사올래?”
“아, 모자라요?”
“응, 생각보다 손님이 많네. 대부분 재경이 손님인데, 재경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아까 도망치더라고요.”
“어휴, 걔도 참. 일단 이 카드로 계산하고 영수증 받아와. 아, 재경이 발견하면 걔도 좀 끌고 오고.”
“네, 그럴게요.”
나루가 나가는 걸 본 지후가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마트에 간다고 했더니 따라온다고 하는데, 그걸 본 선배가 지후를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일손 부족해. 딱 붙어 있어.”
그래서 결국 나루 혼자 마트로 향했다.
교문을 나와서 앞에 있는 큰길 횡단보도에 섰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멍하니 신호등을 보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저 멀리서 커다란 버스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기 직전이라 그 전에 횡단보도를 지나기 위해 버스가 속도를 냈고.
탁―!
누군가 나루의 등을 떠밀었다.
휘청―!
멍하게 서 있던 터라 떠미는 힘에 대비할 수가 없었다.
나루의 몸이 나풀거리며 앞으로 튕겨 나갔다.
나루는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모른 채, 눈을 크게 뜨고 달려오는 버스를 응시했다.
버스가 다가오는 속도가 무척 느리게 느껴졌다.
“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끼이이이익―!
뒤늦게 나루를 발견한 버스의 브레이크.
그리고.
* * *
혼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재경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지영과 그녀의 남자 친구를 발견했다.
분명 지영과 눈이 마주쳤는데, 지영은 모르는 척 다른 쪽으로 가려고 했다.
―옛 시간에선 너 때문에 지영이랑 선미가 엄청 크게 싸워.
문득 나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영이는 결국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거의 10년을 힘들어하면서 지내. 재수생 남자 친구가 의대 합격하고, 되게 성공하거든. 그것 때문에 계속 후회하지.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난 지영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선미와 사이도 안 좋아지고, 남자 친구랑 헤어진 후에 만난 남자들은 다 쓰레기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면서 울었었어.
나루는 그렇게만 말했지만, 나중에 지후에게 그 사건에 대해 묻자, 지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행동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어.
행동을 분명하지 않게 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나루 때문이리라.
옛 시간의 성재경은 나루에 대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다른 여자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 시간은 달라. 나는 그 성재경이랑 다르게, 나루에게 내 마음을 알렸으니까.’
재경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려는 지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영, 뭐가 그렇게 바빠?”
“아, 재경아…….”
“남자 친구야?”
“아, 응.”
지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재경은 남자 친구가 지영의 뒤쪽에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야, 멋지시네. 인사 좀 시켜줘.”
“아, 음. 내 남자 친구 최철희야. 철희야, 이쪽은 우리 과 동기 성재경.”
재경과 철희가 싹싹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철희는 유독 잘생긴 재경에게 경계심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은 재수생인데, 여자 친구의 옆에 화려한 미남인 명문대생이 있으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철희의 심정을 헤아린 재경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철희의 손을 잡았다.
“지영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멋진 남자 친구가 있다고.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
재경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굳어 있던 철희의 표정도 풀렸다.
“아, 응. 난 이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는데.”
“뭐,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그렇지?”
재경이 지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영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안심해. 난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네 여자 친구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축제 구경 잘 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
재경은 지영과 철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자리를 떴다.
‘이 정도면 되겠지.’
지영과는 제대로 선을 그었다. 다음에는 선미와도 선을 그어야겠다.
‘이제 어디로 가 볼까? 노천극장에 가서 응원단 공연이나 볼까?’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야, 성재경. 너 여기서 뭐하냐?”
“오, 너희들 언제 왔어?”
“아까. 주점에 갔더니 지후 혼자 열심히 일하고 있더라.”
“아하하하. 일하기 싫어서 도망 다니는 중이야.”
“넌 진짜 여전하다. 지후가 네 뒤치다꺼리 다 해 주고.”
“맞아. 지후는 나한테 엄마 같은 존재거든.”
“됐고. 주점에 같이 가자. 거기 애들 모여 있어.”
“싫어. 나 일하기 싫다고. 나도 축제를 즐길 거야.”
반항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친구들에게 끌려 주점으로 향했다.
나루도 있을 줄 알았는데, 주점에서 일하는 건 지후뿐이었다.
아는 면면들이 보였다.
재경은 은근슬쩍 친구들 사이에 끼어 앉으려 했지만, 선배들이 재경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앞치마를 입혔다.
“아, 선배. 저는 첫 축제라고요.”
볼멘소리를 내며 쟁반을 들고 있을 때였다.
“야, 학교 앞에서 사고 난 거 알아?”
처음 보는 얼굴의 남학생이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아무래도 다른 과 학생인 것 같았다.
“사고? 뭔 사고?”
“교통사고. 엄청 크게 났어.”
“진짜? 뭔 일인데? 언제?”
“방금. 오다가 봤는데. 으아, 진짜 깜짝 놀랐어. 그런 걸 실제로 보는 거 처음이야.”
“뭔데? 뭔데? 사람이 죽기라도 한 거?”
소식을 들고 온 남학생들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지후와 재경도 움직임을 멈추고 남학생을 돌아봤다.
모두의 관심을 받자, 남학생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거기까지는 모르겠는데, 피를 그렇게 흘렸으면 죽지 않았을까?”
“피까지 났어요? 진짜? 어디 깔린 거예요?”
“어, 거의 깔리다시피 했지. 다들 비명 지르고 난리였어.”
“구급차는 불렀고?”
“다들 신고하는 것 같더라고. 구급차 오는 것까지는 못 보고 왔어.”
“지금도 가면 있으려나?”
“아마 그럴걸? 난 사고 나자마자 거의 바로 여기로 왔으니까.”
“가 보자, 가 보자.”
“야, 구경났냐? 사람이 다쳤다는데?”
“아, 그래도. 가 보자.”
주점 안이 수선스러워졌다.
다른 과 주점에서도 소식을 들었는지, 교문 쪽으로 향하는 무리들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후와 재경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사고가 났나 보구나, 라고 생각하며 각자 할 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소식을 들고 온 남학생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애가 여기 애 이름을 부르던데.”
“여기 애 이름이라니?”
“생공에 그 이름 특이하고 예쁜 애. 연나루였던가?”
* *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렸다.
옆을 살펴볼 여유도,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연나루’, ‘피’, ‘교통사고’라는 단어만이, 지후와 재경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교문에 도착하기 전부터 구급차와 사람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갔을 때, 두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을 물들인 새빨간 선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