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연나루가 싫었다
2018.01.15.
“왜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어?”
지후의 앞에 서서 책망하듯 물었다.
“올 줄 알았어.”
지후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욕심이 생겼다.
이 목소리를, 저 눈빛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윤영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일 리 없는데도 현실 같은 그 꿈속에서, 지후는 나루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걸, 윤영은 알고 있었다.
“안 오려고 했어.”
“응. 하지만 왔잖아.”
“정말로 안 오려고 했어. 나는 안 온다고 하면 안 오는 사람이야.”
윤영이 고집스럽게 말하자, 지후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나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다정한 미소였다.
“아니, 넌 그런 사람 아냐.”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알아. 그래서…… 하아.”
지후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미안해, 윤영아. 네 마음을 알면서도 널 이용해서.”
“그건 됐어. 내가 그래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그러라고 했잖아.”
“그래도 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미안해. 내가…… 의지할 사람이 없었어.”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어,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지후가 울듯이 웃었다.
“그래,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들을래.”
윤영이 지후의 말을 끊었다.
난처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지후에게, 윤영은 말했다.
“나는 너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는 걸로, 됐어. 그래, 그거면 됐어.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들을래.”
“윤영아…….”
“연인인 척하는 거, 오늘로 끝내자.”
윤영은 울음을 삼키고 말했다.
“연락하는 것도, 데이트하자고 조르는 것도, 이제는 안 할게. 인사만 나누는 대학 동기로 돌아갈게. 그러니까 또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면, 그때는…… 그때는 지후야.”
“너한테 말할게.”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윤영을 지켜보다가, 지후가 대신 말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정말로 미안해.”
“늦었어, 가.”
윤영은 고개를 숙였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후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대답했다.
“그래, 갈게. 조심해서 들어가.”
다른 때라면 밤길이 위험하니 데려다주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배려로 윤영을 흔들리게 할 수 없었다.
윤영을 놓아두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윤영에게는 정말로 못할 짓을 했다.
아무리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어도, 도움이 필요했어도, 윤영이 괜찮다고 말했어도, 그래서는 안 됐다.
지후는 집으로 돌아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윤영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옛 시간에서 보았던 윤영의 활발한 모습이, 축 처진 어깨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금의 뒷모습과 겹쳐졌다.
이윽고 빌라에 도착해, 나루의 집 앞에 섰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누군지 확인하고 좀 열어.”
지후가 나무라자 나루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올 줄 알았는걸.”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
“그럼 한 대 걷어차고 문을 잠가 버리지, 뭐. 들어와.”
나루가 가볍게 말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지후는 안으로 들어가 방바닥에 앉았다. 나루도 지후의 앞에 마주 앉았다.
“얘기, 잘했어?”
“응.”
“윤영이는, 괜찮아?”
“아니.”
나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어. 판단을 제대로 못해서, 윤영이한테 상처를 주고 말았어. 아무리 마음이 급했어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는데.”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지후를, 나루는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보듬어 안았다.
그의 넓은 등을 쓸어주며, 나루는 말했다.
“우리는 늘 시행착오를 겪어. 그 과정 속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혹은 내 자신이 상처를 받기도 하지. 시간을 돌아온다는 거, 다시 한 번 살아간다는 거, 쉬운 일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처음 살아본 것처럼 어렵고 혼란스럽더라.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는 이런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자.”
* * *
지후와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다가 돌려보내고, 나루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윤영이 걱정스러웠다.
윤영은 자존심이 셌다. 이런 일로 타인의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힘들어할 윤영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했다.
휴대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어도 연락을 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게 슬펐다.
‘윤영아. 그거 알아? 내가 힘들 때 너는 늘 내 곁에 있었고, 네가 힘들 때 나는 늘 네 곁에 있었어.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참 아쉽고 슬프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윤영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그렇게 대학 축제가 시작되었다.
* * *
봉사 동아리에 들어왔던 윤영이 갑자기 그만두는 통에, 윤영뿐 아니라 그녀를 데리고 온 지후의 이미지도 안 좋아졌다.
하지만 그런 일로 지후를 책망하는 것은 잠시였고, 축제 준비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갔다.
봉사 동아리의 수화 공연은 오후 5시, 태권도 동아리 공연이 끝난 직후에 시작되었다.
대강당은 동아리 사람들의 지인과 타 학교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대강당 앞에는 학생들이 운영하는 노점상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만에 참가한 축제에, 나루는 조금 들떴다.
“옛날 생각난다.”
공연을 위해 대강당 무대 뒤에서 기다리며, 나루가 말했다.
“그러게. 그땐 정말 긴장했었는데.”
“정말? 너도 긴장을 했었어?”
“응, 당연하지. 사람들 앞에 서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엄청 담담해 보여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
“응, 그래서 ‘우와, 얘는 완벽하게 외웠나 보다. 대단하다.’ 막 그랬었어. 네가 완전 실수를 할 줄은 몰랐지.”
“뭐야, 지후가 실수했었어?”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재경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응, 실수했어. 왼쪽으로 돌아보면서 걸어가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걸어가다가 나중에야 잘못 걸었다는 걸 알고는 멈추더라.”
“푸핫!”
재경이 비웃자,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재경은 지후의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얘가 가끔 맹한 부분이 있어. 세상에서 제일 근엄한 척하고 있어서 다들 민지후가 똘똘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되게 바보거든.”
“맞아, 맞아.”
나루가 동의했다.
“응, 나도 약간씩 느끼고 있다.”
지후가 ‘윤명진, 너마저.’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명진은 무시했다.
“이번에는 안 틀려.”
지후가 각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안 틀려야지. 두 번째 공연인데. 아, 내 차례다. 나 먼저 하고 내려올게.”
나루가 손을 바이바이 흔들고 선배들을 따라 무대로 향했다.
여자 공연과 남자 공연이 나눠진 파트가 있어서, 남자들은 전부 대기실에 남았다.
연습한 걸 맞춰 보며 앞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선배 한 명이 다가와서 지후에게 물었다.
“민지후, 너 윤영이랑 헤어졌냐?”
“네, 뭐…… 헤어졌다고 해야 하나…….”
“걔랑 얘랑 둘이 사귄 적도 없어요.”
재경이 끼어들었다.
“어? 그래? 사귀는 것처럼 보였는데. 둘이 찰싹 붙어 다녔잖아. 윤영이가 남친 때문에 이 동아리 들어온 거라고도 했고.”
“에이, 그거 다 장난이었어요. 그냥 윤영이랑 지후랑 친해서 장난친 거죠, 뭐.”
“장난이면 윤영이는 왜 갑자기 안 나오는 건데?”
“개인 사정이 있나 보죠. 요새 수업도 안 나오던데.”
“흐응. 그래? 민지후가 김윤영이랑 사귀다가 연나루랑 바람나서 헤어진 건 아니고?”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얼추 맞췄다. 하지만 재경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 그런 소문이 돌아요? 하여간 다들 남 얘기하는 거 진짜 좋아한다니까.”
“아니, 잘 나오던 애가 갑자기 안 나오니까 그러지. 뭘 남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고 그래?”
선배가 기분 상한 듯 버럭 쏘아붙이고 돌아갔다.
지후가 재경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
“재경아, 날 도와주지 않아도 돼.”
“딱히 널 도우려고 한 건 아닌데.”
“진짜야. 저 선배, 옛 시간에선 너랑 좋은 사이였어. 졸업한 후에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 나 때문에 네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아.”
지후의 말에 재경이 미간을 좁혔다.
“너희들의 옛 시간에 집착하지 마. 지금 이 시간은 너희가 살아온 시간이랑 달라. 모든 게 똑같이 돌아가진 않을 거고, 그럴 때마다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건 없어.”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여자 팀의 공연이 끝나고 나루가 무대 뒤로 내려왔다.
“난 잘하고 왔어. 너희들도 틀리지 말고 잘해. 특히 민지후, 너.”
나루가 양손을 주먹 쥐고 파이팅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지후는 싱긋 웃으며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보는 눈이 많다는 걸 깨닫고 관뒀다.
명진이 나루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지후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하지만 명진의 손이 나루의 머리에 닿기 전, 지후가 그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마.”
“뭐야, 날 질투하는 거야?”
“어, 널 질투해.”
“허, 참.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명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선배들의 뒤를 따라 무대로 향했고, 재경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명진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들이 전부 무대로 올라간 후, 뒷문이 열리고 윤영이 들어왔다.
다들 다음 공연 준비를 하느라 방문객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나마 눈치챈 몇 명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윤영은 나루를 똑바로 응시하며 다가왔다.
생각지 못한 윤영의 등장이지만, 나루는 당황하지 않고 윤영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냈다.
나루의 앞에 멈춘 윤영이 입을 열었다.
“연나루.”
“응.”
“난 역시 네가 싫어.”
“응.”
“너무너무 싫어.”
“응.”
“나는 앞으로 뒤에서 널 욕할지도 모르고, 가끔 널 괴롭힐지도 몰라. 나는 정말 네가 끔찍이도 싫거든.”
험담을 하겠다는 말을 솔직하게 전하는 윤영의 모습은, 옛 시간의 윤영과 같았다.
그래서 나루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너, 내가 우습니?”
나루의 미소를 오해한 윤영이 날카롭게 물었다.
“아니, 난 네가 우스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내가 싫은 거, 이해해. 내 욕을 해도, 날 괴롭혀도, 이해해. 하지만 윤영아.”
나루는 미소를 거두고 윤영을 똑바로 노려봤다.
“나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 * *
윤영은 대강당을 나와 주먹을 꽉 쥐고 걸었다.
왜일까.
나루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해도 나루가 타격을 받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짜증이 났다.
그녀의 어른스러운 눈빛도, 우아한 미소도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윤영은 생각했다.
‘진짜 연나루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지후에게는 좋게 말하고 헤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지후가 좋고, 여전히 나루가 미웠다.
생각을 하며 걷느라 누군가 윤영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깨를 탁 치는 느낌에 돌아보니, 선미와 지영이 있었다.
지영의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도 있었는데, 아마도 재수를 하는 중이라는 남자 친구인 것 같았다.
“윤영, 뭔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몰라?”
“요새 왜 이렇게 보기 힘들어? 일주일이나 학교도 안 나오고.”
“어디 아팠어? 걱정했잖아.”
선미와 지영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윤영은 감정을 꾹 억눌렀다.
“그냥 좀.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응, 그래. 진짜 걱정했어. 연락해도 안 받고.”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 여긴 내 남자 친구야. 인사해.”
지영이 남자친구를 소개해 줬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순한 인상의 남자였다.
윤영은 그의 인사를 받으며 생각했다.
‘이 남자는 알까? 자기 여자 친구가 대학 다니면서 다른 남자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걸?’
쓴웃음이 나왔다.
사랑이란 그렇다.
죽고 못 살 듯 굴어도, 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게 사랑이다.
어쩌면 사랑은 애초에 있지도 않은 감정인지도 모른다.
잠깐 스치는 설렘과 호기심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의미를 부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데이트 잘해. 난 가 볼게.”
“어, 나도 같이 가. 둘이 데이트해, 지영아. 나 윤영이랑 같이 갈게.”
선미가 윤영을 따라왔다.
선미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남의 불행을 궁금해하는 눈빛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윤영은 간신히 그 감정을 감췄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줄 알았던 선미는, 의외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교문이 보일 무렵, 선미가 꺼낸 말은 윤영의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축제, 안 보고 그냥 가게?”
“응, 그럴 기분이 아니야.”
“아, 그래? 그래도 사람들 많은 곳에 있으면 기분 좀 나아질 텐데.”
“나, 지후랑 헤어졌어.”
얘기가 이어져도 ‘무슨 일이냐?’고 물을 기색이 없기에, 윤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예상한 일인지, 선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 그렇구나.”
이런 걸 기대하진 않았다.
왜? 어째서 헤어졌는데? 나루 때문이야?
선미가 당연히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나루가 지후를 빼앗았어. 나랑 지후랑 사귀는 거 뻔히 알면서, 나한테서 지후를 빼앗아 갔어.”
“그래서…… 지후가 헤어지자고 한 거야?”
“응.”
“아, 그래.”
“나루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학교도 못 나온 거고.”
‘네가 왜 피해? 네가 피해자인데. 창피할 사람은 연나루야.’
그런 식의 위로를 기다렸는데, 선미는 그저 “안됐다.”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윤영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무튼 그래서 난 그만 가 보려고.”
“그래, 윤영아. 마음 안 좋을 텐데 빨리 풀고 수업 나와.”
“……응.”
선미의 배웅을 받으며 교문을 나왔다.
조금 걷다가 돌아보니, 선미는 돌아서서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누구보다도 남 이야기를 좋아하는 선미는 윤영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재경을 꾀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지영은 남자 친구를 모두에게 보여 주려는 듯 데리고 왔다.
다들 조금씩 성장하는데, 나 혼자만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다들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데, 나 혼자만 뒷걸음질을 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외롭고, 슬프고.
연나루가 싫었다.